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라지지 않는 불 / 출애굽기 3:1-5

by 【고동엽】 2021. 12. 19.

사라지지 않는 불

출애굽기 3:1-5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를 만나서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인물, 성격, 체질, 습관 모든 면에서 자기가 알든 모르든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만남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만남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내 생에 결정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모세라는 사람을 봅니다. 모세는 부모로부터 남다른 영향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 요게벳에게서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태어난 레위 족속은 혈통이 좋았지만 그는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당시에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학대 속에서도 번식하고 창성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도 남자 아이로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어머니가 죽일 수 없어서 석달동안 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로 상자를 만들어 나일강에 띄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에 목욕을 하러 왔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히브리인의 아이인 줄을 알면서도 이 아이의 용모가 준수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궁궐에 데리고 가서 기르게 됩니다. 데리고 가서 보모를 찾는 중에 모세의 어머니를 보모로 택하여 기르게 됩니다.

모세는 어렸을 때 그 어머니 품속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깊은 기도와, 사랑과, 정신을 잠재하게 됩니다. 그 어머니는 모세를 품에 안고 “모세야, 네가 비록 궁궐에 살지만 너는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히브리인이다. ‘너는 네 백성의 신음과, 탄식과, 눈물을 항상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장차 이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가 되라’ 하는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어머니의 눈빛속에서 히브리인의 정신을 받고 자랐습니다.

모세가 학문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간적으로 성숙한 40세 되던 어느날 자기 동족들의 고달픈 고역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순간 ‘내 백성들이 너무 고생하고 헐벗고 굶주리는구나!’ 하는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히브리 자기 동족이 애굽인에게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가슴속에 타오르는 분노로 애굽인을 쳐 죽입니다. 좌우를 살펴볼 때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그를 쳐서 죽여서 모래 속에 숨겨둡니다. 그는 마음속에 ‘분명히 내 동족들이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나를 지도자로 인정하겠지’ 그런 생각과 꿈에 부풉니다.

다음날 또 고역의 현장에 나갔는데 이번에는 자기 동족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왜 동족끼리 싸우느냐’고 말릴 때 저들이 그럽니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14절). 그때 모세는 자기가 애굽인 죽인 것이 탄로난 것을 알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무리를 이끄는 머슴살이 목동이 되어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호렙산 기슭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종종 사막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나고 확 타버리는 것을 보았지만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어서 사라지지 않고 불이 계속 타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 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고난의 역경 속에서 불타 없어지지 않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 속에는 가시떨기 나무와 같이 쓸모없고 보잘것 없는 초라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불이 임하는 계시적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모세의 생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는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은 사건을 통해서 자기 존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다. 여기에서 모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시떨기는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쓸모없는 존재, 죄인된 인간의 가련한 모습, 이것이 바로 가시떨기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가시나무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할 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18)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짓고 난 이후에 나온 것입니다. 가시떨기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땔감도 못되고, 재목으로 쓸 수도 없고, 관상으로 쓸 수도 없는 아무런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오히려 가시나무는 등산객들의 옷을 찢고 상처를 냅니다. 그래서 가시는 곧 인간의 타락한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떨기는 모세입니다. 애굽인을 쳐 죽인 살인자의 존재, “네가 이 민족을 구원한다는 정의감은 있지만 가시돋힌 존재다.”

모세는 광야에서 가시떨기 나무에 종종 불타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빛이 정오에 비쳐올 때 사막이 달아오르면서 갑자기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연기가 나고 금방 하나의 잿더미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모세는 호렙산 기슭에서 연기가 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불을 볼 때 불은 불인데 연기나는 불이 있고 연기나지 않는 불이 있습니다. 완전히 소화될 때는 연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 탈 때는 연기가 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은혜를 받기는 받지만 은혜가 잘못되어 연기나서 남들의 옷을 더럽히고, 집안을 어둡게 하며, 남의 눈에서 눈물을 빼는 신자가 있습니다. 이런 신자를 연기 신자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을 사랑해서 애굽인을 쳐 죽일 정도로 그 속에 타올랐던 민족에 대한 애국심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생활하면서 하나의 잿더미와 같은 존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하여 종종 놀라는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열심을 냈는데 지금은 다 꺼져버렸습니다. 어느 때는 내게 타오르는 첫 열심도 있었고 충성스러운 열심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열심이 꺼진 것을 보게 됩니다. 불이 꺼진 잿더미로 남아있는 모세와 같이 자기 자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인을 쳐 죽이면서 좌우를 살폈습니다.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12절)

모세는 어머니의 믿음으로, 어머니의 기도로 자랐지 자기 신앙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고백하고 만난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옆으로 사람만 보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위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좌우로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좌우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좌우에 부모가 있습니다. 좌우에 친구가 있고 인도자가 있습니다. 좌우에 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한 때 우리는 타올랐습니다. 열심히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사람 때문에 시험들고 낙심되고 목사 보다가 시험들고 그래서 다 식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보지 말고 위로 하나님을 보십시오.

교회를 처음 개척해서 규모가 작을 때는 사람이 없으니까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지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목사도 나를 안알아주지 전에 개척할 때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은데 내가 필요하나’ 그러면서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그러면서 낙심이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한 때 인간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으로 안됩니다. 위에서 타오르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불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2절)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3절)

모세는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합니다. ‘어찌하여 사라지지 않는가’ 그리고 자기 속에 타던 불이 다 꺼졌던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렇게 타올랐던 정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 박력도 있었는데 모세는 40년동안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면서 다 꺼져버렸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이 늙고 초췌하고 애굽의 모든 학문이 사라진 그 시간,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본 것입니다.

나의 생애 속에서 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전에는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시들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예수님은 초대교회 사도와 성도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이 3년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기적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없었습니다. 배울 때 뿐이었습니다. 들을 때 뿐이었습니다. 기적을 볼 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불이 임하고서야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불이 속에 임한 것을 느꼈습니다. 저들은 약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비겁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담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불은 감옥에 가도 꺼지지 않았으며 핍박과 환난이 와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저들은 가난해도 그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시들지 않았습니다. 누가 자기들을 괴롭혀도 이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불은 인간의 것이 아니요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이 불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 이 불을 받아야 됩니다.

베드로는 민족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세와 같은 자였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코자 하는 민족적 의협심과 정의감이 타오르듯 베드로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칼을 품고 예수님의 뒤를 열심히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종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들을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할 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장담을 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그는 장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은 하룻밤도 지나지 못했습니다. 하루 밤도 가지 못해서 꺼졌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멀찍이 따랐고 모닥불 옆에 있던 연약한 소녀 앞에서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장담하던 불이 꺼져버렸습니다.

장담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의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늘로부터 불을 받아야 됩니다. 잿더미처럼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성령의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이 사라지지 않는 불 때문에 환난이 오나, 핍박이 오나 로마에 가서 거꾸로 매달렸으나 그 불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필요에 의해 열심내는 불은 언제든지 타버리는 잿더미가 됩니다. 사람 때문에 열심내는 것은 사람 때문에 꺼집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내는 것은 사람 때문에 시듭니다. 목사님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을 내는 것은 목사님이 조금만 인정하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하늘로부터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4절)

여기 돌이켜 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았습니다. 돌이켜 온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라지지 않는 불은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와야 보는 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제 발로 다녔습니다. 제 혈기로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누구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합니까? 돌이켜 오는 자에게 임합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회개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메타노이’ 방향을 돌이켰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편으로, 내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나를 위해 살던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은 내 정열입니다. 내 감정입니다. 내 의욕입니다. 내 욕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이켜 올 때 하나님께서 사라지지 않는 불을 주십니다. 이 불이 내 속에 타야 합니다. 이 불이 탈 때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형제들아 어찌할꼬” 할 때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했습니까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기도를 회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했습니까 이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열정으로 타올랐던 한시적인 불이 꺼진 이유가 뭡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차지도 아니하고 덮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은 회개할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하면 열심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모세가 보았던 자리는 보잘 것 없는 땅이었습니다. 돌작밭입니다. 나무 한그루 살 수 없는 사막입니다. 더군다나 가시나무가 불타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곳을 가리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삶의 현장을 거룩한 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가정도 직장도, 일터도 거룩한 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거룩한 땅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한 곳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40년동안 헤맸던 그 자리, 그 광야, 가시떨기 나무 있는 곳, 그는 거기에서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이켜 그곳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사라지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입니다.

모세가 이 은혜를 받은 이후에 가나안 복지 귀한 성을 향하여 광야 길을 40년이나 줄기차게 전진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했으나 모세는 한번도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쳐 죽이려고 몇번씩이나 달려들었으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향하는 소망의 불은 느보산에서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으면서도 가나안 땅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 믿음의 불이 타기를 바랍니다. 내 이웃을 사랑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불, 그리고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의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전날 볼 수 없었던 사라지지 않는 불, 연기도 없고 가시도 없는 불로 내 가정의 식구와, 이웃들과, 형제들에게 나타날 때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이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