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로? 아니면 다시스로?/욘1:3-17
우리 가운데 요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다가 바다에 빠져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대머리가 되어서 나온 이야기를 들으면 그 극적인 요소 때문에 모두 좋아하게 됩니다. 저도 주일학교 때부터 몹시 좋아하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니느웨로 가라. 그 성이 악하다. 잘못하면 내가 그들을 심판할 지도 모르니 가서 회개하라고 외쳐라.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면 내가 그 성을 용서하리라. 좀 힘들겠지만 가라. 아마 그 이야기를 들은 요나는 며칠 밤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가족을 두고 고향을 떠나 이방 나라에 가서, 그것도 좋은 말도 아니고 회개하라고 외치기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거나 꿈 속에 나타나셔서 내일 캄보디아로 떠나라. 거기서 복음을 전해라.고 말씀하신다면 금방 예. 알겠습니다. 하고 행동에 옮길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쉬워도 참 어려운 것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요나는 드디어 봇짐을 싸서 짊어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가기 싫으면 아무데도 가지 말고 가만히 있지 왜 떠납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3절을 보면 두 번이나 똑 같은 말씀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그 당시에 유대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나라에만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고 그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지 다른 나라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요나가 집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계속 독촉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다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시스로 도망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니느웨는 지금의 이라크, 중동 아시아 쪽에 있습니다. 반면 다시스는 그 위치를 정확하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스페인에 있는 어느 항구 도시로 보고 있습니다. 중앙 아시아와 스페인은 완전히 동과 서, 끝과 끝입니다. 반대방향으로 도망가기로 작정하고 욥바로 내려와서 거기서 배를 타고 드디어 줄행랑을 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만 벗어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의 독촉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참 바보스럽죠?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배를 타자마자 너무 피곤한 나머지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조용한 곳에 자리잡고 누웠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하느라고 잠을 못 잤기 때문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배가 심하게 요동합니다. 하늘이 캄캄해집니다. 예사로운 바람이 아닙니다. 점점 무서운 풍랑이 배를 휘몰아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어려웠던지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선원들이 배에서 짐을 던집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풍랑은 잦아들지 않습니다. 그럴 때 선장의 뇌리에 섬광처럼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뱃사람으로만 수 십년을 살아왔지만 이런 풍랑은 처음 봤다. 분명히 우리 배 안에 고약한 놈이 탄 것 같다. 천벌을 받을 나쁜 놈이 타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어.' 그래서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다 모아놓고 제비를 뽑았는데 누구한테 걸렸습니까? 요나였습니다. 여러분, 풍랑을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자연법칙에 의해서 태풍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한 의도를 담고 있는 태풍이 있습니다. 호우도 마찬가지고 번개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자연 현상일 수 있지만 그 중에 어떤 것은 하나님의 강한 의도를 수반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나에게 풍랑이 바로 그랬습니다. 선장의 마음 속에 제비를 뽑아서 누군지 한번 찾아보자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었습니다. 요나가 자기에게 제비가 떨어지자마자 드디어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히브리 백성인데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말씀이 싫어서 도망하다가 오늘 이 꼴이 됐습니다. 비로소 요나가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비록 도망갈 때는 형편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어려운 문제를 만나자 하나님의 깨우침이 오지 않습니까? '이것은 나 때문이구나.'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진짜 신앙인과 그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체 하지만 진짜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선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나 하나 죽으면 당신들도 살고 풍랑도 조용해 집니다.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배를 육지에 대 보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그걸 용납하시겠습니까? 결국 견디지 못한 선원들이 눈물을 머금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요나가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가 날 때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가 와서 그를 집어 삼켰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놀랍게도 그 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서 삼일을 있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2장에 보면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자기를 물고기 뱃속에다 집어 넣을 정도로 징계하시는 것을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가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자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해서 육지에다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란 근처나 쿠웨이트 바다 근처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대머리가 되어서 니느웨 성에 들어가 대 부흥을 일으키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또 동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걸 누가 믿어?' 하고 생각하실 분들이 틀림없이 계실 것입니다. '좀 과학적인 이야기를 해라.' 하는 생각이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우리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지 아십니까? 하나님도 굉장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 없이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았다면 지구가 지금 남아있겠습니까? 얼마나 과학적이신지요? 천문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이 온 우주가 그 법칙대로 조금도 착오 없이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이 기록한 말씀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나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면서 못 믿겠다고 합니다. 그 중에 어떤 이들은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 알고 싶어서 대형 백과사전 브리태니커를 출판하는 회사에다가 '정말로 고래가 사람을 삼킬 수 있습니까? 고래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삼킬 수 있는 겁니까?' 하고 질문을 하면 그 회사에서 한동안은 그들에게 성실하게 자료를 보내준 일이 있다고 합니다. 브리태니커 사전을 출판하는 회사에서 보낸 자료 중의 하나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백과 사전 회사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자료에 의하면 고래의 종류 가운데 스펌 고래가 있답니다. 아주 덩치가 큰 것인데, 그 스펌 고래의 생김새와 버릇을 연구해 보니 사람을 통째로 삼켰다가 토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 사람이 통째로 뱃속을 들어가면 그 뱃속에는 어느 정도의 공기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위 속에서 그 공기를 마시고 이삼일을 견딘다고 합니다. 온도는 섭씨 42도 정도라고 하니까 찜통 더위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사느냐 하는 문제가 달렸는데 그깟 찜통 더위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강력한 소화액도 살아있는 생물체에는 해를 못 끼친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일까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1892년, 지금부터 한 백 십년 전 2월 포크랜드 근해에 포경선 하나가 고래를 잡기 위해서 출항을 했습니다. 배 이름은 동방의 별이었습니다. 대양으로 나가서 한참 놀다가 스펌 고래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고래가 출몰하자 배에서 보트 두 대가 내려졌습니다. 각 보트에는 창 사수들이 타고 있습니다. 첫번 보트에서 쏜 창이 고래를 명중시켰습니다. 고래가 상처를 입자마자 막 뒤틀면서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두 번째 보트가 그만 뒤집혀서 거기에 탔던 버틀러라는 청년이 행방불명 되어 버렸습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고래는 쭉 뻗었습니다. 그 고래를 끌어다가 육지에 올려 놓고 하루 종일 껍질을 벗겼습니다. 그 다음에 배를 쪼개고 위를 갈라서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전부 끌어내다가 보니 버틀러라는 청년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의식은 없었지만 숨은 쉬고 있는 것입니다. 급히 끌어내서 병원에 싣고 가 치료를 했는데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그 포경선을 타고 또 고래잡이를 나갔다고 합니다.
제가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백과사전 회사에서 증거를 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성경의 이야기라고 하면 자기가 더 과학적이고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행여나 계실까 해서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거짓말 하시지 않습니다.
'이천 팔백 여년 전에 있었던 요나의 이야기가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이 말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명령하시는 것인가?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우리가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될 시간입니다.
제가 볼 때 요나가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거역하면 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순종할 때 우리에게 복이 되지 그것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명령 받는 것을 일컬어서 흔히 소명 혹은 콜링(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도 요나와 같은 소명이 있습니까? 흔히들 소명 이야기를 하면 자기와 관계 없는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신 차리고 들으십시오.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보냄을 받았습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니느웨로 가게 되어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소명자입니까? 똑같이 우리 모두가 소명자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해야 할 일을 명령 받은 사람이요 순종해야 될 의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 여러분들이 명심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소명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어느 정도 이중적인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조금 이해하기 쉽게 하나는 일차적인 소명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이차적인 소명이라고 이름을 붙여 봅시다.
그럼 일차적인 소명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냈습니다. 자기의 선택 받은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구원 자체가 소명입니다. 무엇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천당 가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까? 그것은 몇 십년 살다 보면 자연히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리 구원해서 세상에 살게 하신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한 그 구원 안에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이 소명입니다. 이 가운데 구원 받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구원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왜 내가 소명자라는 것은 모르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먼저 구원한 이유가 우리의 구원 안에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이름이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 성도, 증인, 예수의 제자'라는 아주 아름다운 이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자체를 생각해 보십시오. 증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소명자로서의 신분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제자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서 한평생 사셨습니까?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제자란 말입니다. 그렇다면은 예수의 제자라는 그 이름 자체가 소명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소명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는 더 이상 필요 없어서 내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시한 것이든 가치 있는 것이든 남이 선호하는 것이든 남이 싫어하는 것이든 관계 없이 우리가 삶을 통해서 경험하는 모든 생활의 전체는 거룩한 제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드리는 거룩한 제사가 내 삶이라고 하면 내 삶 자체가 벌써 소명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하십시다. 구원이 소명입니다. 이름이 소명이고 삶이 소명입니다. 이것을 한데 묶어서 일차적인 소명이라고 그럽니다. 여기에 예외가 있습니까? 이런 일차적인 소명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 이 명령을 받는 '너희' 속에 내가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그 '증인'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될 의무를 갖고 있는 사람 속에 내가 포함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중요한 사실을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차적인 소명 때문에 이차적인 소명이 따라옵니다.
이차적인 소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먹고 살기 위해, 그저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하는 많은 일들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 신분이 소명자이기 때문에 내가 손을 대는 모든 일들이 소명의 성격을 띱니다. 내가 돈을 벌고 있습니까? 돈 버는 그 자체가 소명입니다. 내가 자녀를 키우고 있습니까? 자녀를 키우는 그 자체가 소명입니다. 나의 전공이나 기술을 살려서 일생동안 어떤 전문 영역을 개척합니까? 그 자체가 소명입니다. 소명이 아닌 생활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젊음도 소명에 해당되고 나의 시간도 소명에 해당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명예가 있다면 명예도 소명에 들어가고 나에게 물질을 주셨으면 물질이 소명입니다. 이것이 이차적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중세기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은 전부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결혼하지 아니하고 모든 영화와 물욕과 쾌락을 다 멀리하고 고행하면서 일평생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수도원에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겠습니까? '소명자는 수도원에 있다. 수도원에 못 가는 나는 소명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적당히 세상을 살면서 그저 예수만 믿다가 구원만 받으면 된다.' 전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중세기를 살았습니다. 절대다수의 평신도가 이런 흐리멍텅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으니 그 시대가 암흑으로 덮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세를 흔히 암흑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드디어 종교개혁자 루터가 나왔습니다. 그는 교회의 바벨론 감금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그 당시의 잘못된 것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성직자들이 고행을 하면서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나, 저 들녘에 나가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의 노동이나, 가정에서 자녀를 키우고 가정의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하는 부인들의 가사일이나 하나님 앞에는 똑같이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거룩하고 소명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믿음을 가지고 측정할 것이지 수도원에 사느냐 수도원 밖에 사느냐를 가지고 측정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제야 성경의 의미를 바로 찾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나는 소명 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마음에서 뿌리째 뽑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믿음이 어려서 그럴 수도 있고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 한편을 들으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는 소명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 소명을 가볍게 여기고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을 간다고 합시다.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소명이 다 뭐야.' 하면서 예수를 안 믿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전도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어쩌다가 돈을 벌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소명자답게 쓰겠다는 생각 한번 가지지 못하고, 시간 남아 돌면 내가 즐기기에 바쁘거나 처자식 행복하게 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 우리 가정에 주신 소명이 무엇인가 생각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니느웨로 가는 생활입니까? 다시스로 가는 생활입니까? 다시스로 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의 인생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는지 아십니까? 풍랑이 기다립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만약에 풍랑이 없습니까? 구십까지 살았는데도 아무 일이 없습니까? 그러면 내가 한 가지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닌 것이지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 사랑하는 자녀가 그렇게 다시스로 도망가는데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식이 가출해서 엉뚱한 곳으로 도망가는데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평생 하나님이 가만히 계십니까? 가만히 계시는 이유는 자기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 한 분이 계십니다. 보이스 목사님이신데 그분이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은혜스러운 말씀을 하신 것이 있어서 제가 읽어 드립니다. 다시스로 도망가면 무엇이 기다립니까? 풍랑이 기다립니다. 이제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번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움직여서 그만 두어라 더 이상 가지 마라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처음부터 우리의 길에 큰 장애물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고 매일매일 산다 해도 선지자를 보내서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그만 두고 그냥 하루종일 기도 없이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갑자기 무슨 재난을 보내고 그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일에 무관심하게 산다고 해서 당장 우리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내리막 길을 가도록 허용하시면서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십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계속 불순종하면 더 거친 방법을 동원하십니다. 우리가 슬그머니 불순종하듯이 하나님께서도 부드럽게 시작하시지만 결국은 폭풍을 보내십니다.
평안하던 가정에 갑자기 병이 들어옵니다. 자동차 사고가 납니다. 사업이 위기를 만납니다. 남편이 가출을 해서 다른 여자에게 눈을 팝니다. 부인이 갑자기 우울증에 걸립니다. 살고 싶은 의욕이 없습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허하고 만사가 귀찮습니다. 여러분, 이런 증세들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자녀는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요나가 풍랑을 보고 깨달았던 것처럼 '내 탓이야. 내가 지금까지 소명자로서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고 순전히 나 자신 하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다 쓸어 넣고 말았어.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이렇게 되면 참 좋은데, 만약 이런 깨달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한동안 굉장히 고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대적하신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가는 길을 막으신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요나가 풍랑을 못 이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못 이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고 궤도 수정을 해야 합니다. 풍랑이 오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와서 철저하게 거듭나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한가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명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진 구별된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됩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이상하게 사람들이 전부 다 얼어 버립니다. 얼굴이 굳어집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못 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제가 볼 때 이것은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소명자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아멘, 정말 감사해요. 하나님.' 이런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자기의 일을 시키셨다면 할렐루야 찬양해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이처럼 특별히 보시고 영광스러운 자기 일을 맡기실까?' 이것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니라.'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입니다. 그렇다면 그분 이상의 존재가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1장 36절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할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 얼어붙을 일입니까? 너무 흥분해 춤을 출 일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예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 존재나 땅에 있는 존재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존재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서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요. 하며 경배 드려야 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분이 우리를 불러서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도망칠 일입니까? 흥분하고 너무 감사해서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될 일입니까?
이 놀라운 영광의 하나님, 최고의 권위, 최고의 능력, 최고의 거룩, 최고의 비전을 가지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구원하시고는 자기 무릎 앞에 우리를 앉혀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너도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지 않니. 너무나 거짓 되고 음란하고 더러운 이 세상, 내가 이대로 방치할 수가 없어서 이 세상 사람 가운데 할 수 있는 대로 얼마를 구원하려고 한다. 새 하늘과 새 땅, 죽음도 없고 아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영원한 하늘의 나라, 그 나라를 내가 지금 새로 준비하고 있는데, 네가 그 일을 도와줘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너를 먼저 구원한 거야. 내 일 좀 해줘. 나를 위해 뛰어 줘야 되겠어. 공짜로 하라는 것 아니야. 네가 열심히 하면 내 나라에서 1등 공신으로 대우를 톡톡히 해줄 테니까 한번 열심히 해봐.' 이렇게 말씀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여러분, 이 음성을 들으십니까? 제 귀에는 들리는데 여러분 안 들리십니까? 들릴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무릎을 꿇고 '하나님, 한 평생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들립니다. 안 들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비전을 우리와 나누시고 자기 일 좀 해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먼저 불렀다고 하십니다. 앞으로 우리가 3,40년 세상을 더 산다고 합시다. 5,60년 더 산다고 합시다. 그 동안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지 뻔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머리를 주셨고, 사회적인 명성을 주셨고, 좋은 재능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고, 행복한 가정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건강한 몸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황송하면서도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이렇게 대단하게 보시고 자기 일을 맡기시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부를 때마다 가슴이 찡하는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쉬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쉽니까? 가슴이 찡하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육체가 그의 영광 보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를 보십시오. 110조원이라고 하는 공적 자금을 구조 조정 하느라고 다 털어 넣었지만, 모두가 그것을 들고 가서 제 호주머니 챙기기에 바쁘고, 전부 제 할 일 다 하다가 구조조정은 안 되고 돈은 돈대로 다 날려서, 우리에게 세금만 한 짐 더 뒤집어 씌우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리라 그 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여러분 그 날이 옵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한 평생 소명자로서 헌신하고 자기의 삶을 주께 드린 자들이 환호하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기뻐 춤을 추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여러분이 서야 될 자리가 어딥니까? 다시스로 도망가던 생활을 하던 사람이 설 땅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서 '아프리카 가라.' '미안하지만 중동에 가서 회교권에 있는 사람에게 전도해라.'고 말씀하시면 달려 가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특별히 초청을 하시면 달려 가십시오. 그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이런 특별한 소명을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침이고 저녁이고 자주 내 마음에 이런 음성을 주시면 순종하십시오. '내가 너를 왜 그 회사에 보낸 줄 아느냐? 그 회사 사장을 위해서 평생을 살라고 보낸 줄 아느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니? 돈 몇 푼 벌어서 먹고 살려고 그 회사에 다니느냐? 그런 어설픈 짓 하지 말라. 너는 그 정도로 허무한 인생이 아니야. 너는 내 아들이야. 너는 내 꿈을 나누는 너무나 소중한 파트너야. 정신차려라. 내가 그 회사 너를 왜 보낸 줄 아느냐? 곰곰이 생각해 봐라. 너를 통해서 그 주변에 있는 영혼들이 구원 받도록 내가 보낸 것이다. 내가 너에게 월급 많이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 호주머니에 집어 넣으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서 얼마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라고 주는 거야.' 맞습니까? '세상에 많은 여자 중에서 그래도 너는 인물이 반반하지 않니? 그 인물을 누가 준 지 아니? 내가 준 거야. 자랑하고 꼬리치고 다니라고 준 줄 아느냐? 너의 그런 아름다운 미,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면 너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미를 준 거야.'
케이블TV 채널 42번은 기독교 방송입니다. 며칠 전에 그 방송을 최근에 인수 받은 감 사장이라고 하는 장로님을 제가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독교 방송은 지난 몇 년 동안 너무나 엉망이었습니다. 교회들이 헌금해서 시작을 했는데 경영자가 털이 난 양심을 가지고 경영을 했는지, 돈이 어디로 나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3,4백억원의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세상에 참 기가 막힌 사람들 다 있습니다. 장로라는 사람들, 집사라는 사람들이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자기 월급이 얼마인지 나중에 따져 보았더니 기절 초풍할 정도로 월급을 많이 받고 다녔습니다. 그러니 살아남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350억 정도의 빚더미에 앉게 되어서 오늘 문 닫는다, 내일 문 닫는다 하면서 지난 1년을 버텨 온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 감 장로님이 맡았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장로님, 뻔히 아시면서 왜 맡으셨습니까? 무슨 수익 사업도 아니고 돈 버는 것도 아닌데 막대한 빚을 짊어지고 왜 그 회사를 맡으셨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의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분은 비즈니스 맨입니다. 돈을 쌓아 놓은 재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삼십 몇 번 가면 불교 텔레비전이 있고 그 옆에 카톨릭 텔레비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텔레비전은 다른 텔레비전에 비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뒤집니다. 다른 종교 텔레비전은 다 잘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텔레비전만 엉망입니다. 그러다가 문 닫는다고 하면 누가 세상 사람 앞에 웃음 거리가 됩니까? 주님의 이름이 욕을 당합니다. 아내와 둘이서 기도할 때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욕을 먹으면 어떻게 하나? 요즘에는 매스컴 시대인데 이 매스컴을 통해 복음이 더 힘있게 증거 되야 되는데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나?' 그러다가 '하나님이 나에게 그 동안 돈 조금 벌게 하신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럴 때 쓰라고 하나님이 돈을 주셨구나.' 하고는 그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소명자가 생각하는 생각의 방향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내가 왜 지금 돈을 벌고 있으며 내가 왜 이렇게 성공 했는가? 내가 성공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가 깊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부 여러분, 여성 여러분, 여러분이 하는 일들이 다 허드레 일 비슷하고 표도 안 나고 유명하지도 못하고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일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시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돈 스티븐이라고 하는 사람이 87년도에 미국에 있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 인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봤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라는 질문에 20%가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80%는 똑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아는 가까운 사람이 예수 믿고 그를 통해서 간증을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여러 가지 감동 받은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80%가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옆에 있는 이웃에게 감동을 주고 간증을 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유명한 선교사입니까? 아닙니다. 유명한 목사입니까? 아닙니다. 평범한 우리 주부들입니다. 평범한 직장 생활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를 100년이지만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선교사가 하는 역할은 1% 밖에 안됩니다. 선교사가 와서 한 것은 기독교라는 나무를 심어 준 1%의 역할입니다. 나머지는 누가 했습니까? 세상적으로 보잘 것 없고 가난하고 못 배우고 쓸모가 없어 보이는 하찮은 사람들이 99%를 한 것입니다. 그들이 다니면서 전도 했습니다. 감동을 주었습니다. 가정을 복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구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소명과 관계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소명자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대각성 전도집회다. 119운동이다. 새생명 운동이다.' 하는 요란한 캐치 프레이즈를 걸고 우리가 지금까지 준비해 왔고 앞으로 2주가 남았는데, 이 일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명령을 안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자기가 이 명령을 안 받았다고 하면 당신은 신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물에 빠진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데 선원이 어떻게 게으름을 피우며 앉아 있겠습니까? 환자가 죽어간다고 야단인데 의사가 어떻게 뒷짐을 지고 먼 산만 쳐다 보고 있겠습니까? 불 속에서 어린 아이가 비명을 지르는데 소방관이 어떻게 머뭇거리겠습니까? 복음을 듣지 못해서 지옥을 향해 달려 가고 그 속에서 고통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어떻게 예수의 제자 된 사람들이 시온성에 편안히 앉아서 자기만 할렐루야 하고 즐기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우리 모두 소명자로서 남은 생을 흥분에 들떠서 정말로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살다가 그 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 날이 오면 우리 두 손 들고 할렐루야 부르며 춤을 추는 아름다운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영광에서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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