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혹은 아니오의 정직성/ 마 5:33~37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터지고 있습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교회 개척 자금을 마련한다는 구실로 거액의 채권을 위조해서 시장에 유통시키다가 구속을 당하는 기가 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 경찰청장이 학력을 날조했다가 3일 만에 옷을 벗는 웃지 못할 일이 우리 눈 앞에 벌어졌습니다. 대학 입시에 내신성적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자 학교마다 내신성적을 부풀려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느 학교의 내신성적은 88%가 전부 엉터리라는 기사까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에는 다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우려를 금치 못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낍니다.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가, 다음 세대를 키우는 교육가들이, 그리고 이 사회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이 사람들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인격으로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서글픈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나라의 미래를 과연 내다 볼 수 있는지, 우리에게 장래가 있는지 의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 가까운 몇 분들과 조용히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분이 자기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아들은 믿음도 좋고 똑똑합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청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직장 생활을 한 지 이삼 년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를 찾아와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더랍니다. 그 아버지는 제가 알기로는 상당한 애국자입니다. 하도 의아해서 아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이 나라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 한 마디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탄식과 좌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눈에 나라의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면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교회가 이 책임을 벗을 수 있습니까? 교회 지도자가 이 책임을 벗고 손을 털 수 있습니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교회, 우리 모두가 이 나라에는 천만인이 넘는다고 지금까지 떠벌리며 자랑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목사를 믿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여론조사에서 다 드러난 이야기이지만 목사의 정직도는 승려보다도 못하고 매스컴의 아나운서보다도 뒤떨어진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래 가지고 이 나라가 정직해질까요? 투명해질까요? 한국 교회가 내어 놓는 수치나 통계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교회가 이렇게 어두우니 나라가 어떻게 앞이 보이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설교를 해야 하는 저 자신도 쥐구멍이 있으면 차라리 들어가서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을 놓고, 내 힘으로 도무지 바꿀 수도 없는 이 암담한 현실을 놓고 차라리 어딘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만큼 우리 나라가 도덕적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 긍정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 초대 시절, 지금부터 칠팔 십년 전, 아니 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 하면 세상이 그래도 정직하다고 믿어주었습니다. 왕 도둑놈 같은 양심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 믿으면 정직한 사람이 된다고 천하가 다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다릅니다. 어쩌다가 유별나게 정직한 사람이 보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손해를 보고 욕을 먹어도 절대 거짓말은 못하겠습니다.' 하고 버티는 사람이 어쩌다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놀랍니다. 또 마음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수근수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저런 사람들이 있네." 스스로 놀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사회의 빛이라고 해야 될 교회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데서는 안 믿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이 사회의 모든 불신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보다도 교회의 지도자가 더 나은 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맞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요? 얼마나 하나님 앞에 두려운지요? 부끄러운지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정직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서 얼굴을 돌리실지 모릅니다. 촛대를 옮기실 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 사람에게 짓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리면, 촛대만 덩그러니 화려하게 서 있지 불꽃이 꺼져 버린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이 손을 대지 않아도 한국 교회는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듣기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설교하기가 매우 힘든 말씀입니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르고 우리의 부끄러운 곳을 노출시키는 말씀이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 말씀 듣고 순종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직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새로워져서 우리의 입술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사회가 앞이 보이는 사회가 될 수 있고 젊은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뛸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5편 6절 7절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 이하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 거짓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자는 사탄의 자손이요, 사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마치 자기 무기인 양 자기의 전공인 양 사용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짓말하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가 없습니다.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거짓말을 예사로 합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거짓이 난무하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하고 제사 지낼 때는 굉장히 정직하고 거룩한 백성인 것처럼 보였지만 성전 밖으로 나오면 지능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기 위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맹세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맹세에 대한 말씀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맹세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맹세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꼭 중요하고 심각한 어떤 문제를 놓고 약속을 할 때 사람들이 이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 서로가 의심이 가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맹세를 해서 서로의 마음을 안심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서로가 신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를 놓고 내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 하는 것을 다투어야 되는 어려운 분쟁이 생길 때에는 맹세를 통해서 그 분쟁을 잠재우고 서로를 신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맹세는, 맹세하는 사람이 정직하다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 약속을 꼭 지킨다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서 맹세함으로서 사람들에게 확인을 시켜주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음에 의심 반 또 우려 반 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저녁에 데리고 나가서 하늘에 있는 별을 가리키시면서 "아브라함아, 하늘을 보아라.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느냐? 못 세지? 내가 너의 후손을 이처럼 많게 하겠다."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사람이 보기에는 구름 잡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잘 믿지 못할까 싶어 맹세를 하시려고 하는데 자기보다 높은 자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걸어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니 내 말대로 그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 하나님이 맹세하는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맹세를 들었어요. 이렇게 맹세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몇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맹세할 때에는 꼭 여호와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리고 여호와의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할 때는 반드시 지켜라. 안 지키면 내가 그 대신 책임을 묻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맹세할 때는 망령되이 맹세하면 안 되고 헛되이 맹세하면 안되고 일상 생활에서 함부로 습관적으로 맹세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맹세할 때는 하나님 외의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나라 사람들은 중요한 일에 맹세를 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의 사건을 가상으로 만드시고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며칠간 집을 비우기 위해서 이웃 사람에게 자기 가축을 부탁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여행을 가려면 가축을 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여행을 떠났는데 그분이 여행을 떠난 후에 그만 이상하게 그 가축 중의 양 몇 마리가 죽어 버렸습니다. 남의 양을 맡았던 그 이웃 사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이 죽어버렸습니다. 자기가 죽인 것도 아닙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참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이웃 간에 큰 분쟁이 생길 수 있고 좋았던 우정이 한 순간에 깨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건을 가정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을 맡았던 이웃이 정말로 그 양을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면 주인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내가 맹세합니다. 나는 절대로 양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맹세를 듣는 주인은 반드시 그 말을 그대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상청구를 하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만큼 맹세라는 것은 좋게 이용할 때에는 서로 신뢰할 수 있고 서로 약속을 지키게 하는데 순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맹세를 이제 악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맹세를 하면 사람들이 믿어준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자기의 어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혹은 약간 거짓말이 섞여 있는 것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 맹세를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세를 함부로 하는데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게 좀 겁이 났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되고 안 지키면 하나님이 그 값을 찾는다고 하시니 그것이 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피하고 맹세하려다 보니 하나님보다 높지는 못하지만 하나님보다 조금 낮고 그러나 상당히 커 보이는 것을 전부 끌어내어 맹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어떤 사람은 '내가 하늘을 걸고 맹세하노니'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땅을 걸고 맹세하노니' 또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을 걸고 내가 맹세한다. 나는 반드시 약속 지킨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내 머리를 걸고 맹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고 머리로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거짓말이 다분히 섞인 맹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정직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것 저것 아무것이나 끌어다가 맹세를 하는 버릇들이 많았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사회가 믿을 수 없는 사회요, 타락한 사회였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21세기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시대지만 자기를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맹세 비슷한 것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거래를 하다가 필요 없는 말을 합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 말을 왜 합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한 수 더 떠서 "저는 사랑의교회 집사입니다." 하기도 합니다. 옷 로비 사건이 한참 세상을 떠들썩할 때 보니까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판 맹세입니다. 자기가 거짓말 안 한다는 것, 자기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어떻게 하든지 과장해서 보이려고 하는 속 마음이 그 속에 있습니다.
지금도 생각 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이십년 전쯤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고속도로가 활짝 열려 있었지 않습니까? 제가 타고 다니는 작은 차라도 고속 도로에 올라가면 걸리는 것도 없고 차도 별로 없었으니 부산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부산에서 차를 몰고 올라오는 길이었습니다. 추풍령을 지나서 터널을 이제 통과하고는 내리막길에 들어섰습니다. 앞에 차 몇 대가 가지만 그런 것 신경 쓸 것이 없으니 신나지 않습니까? 차가 막 속도를 냅니다. 게다가 페달을 좀더 깊이 밟으면 차가 속도감 있게 나갑니다. 그때 또 스트레스 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 코너를 돌아 서는데 순경이 척 하고 나옵니다. 함정 수사를 한 것입니다. 요즘은 전부 수입이 없어서 그런지 전부 다 신출내기 빼빼한 조그마한 어린애들이 교통정리를 하지만 그 당시는 교통정리하는 순경들은 뚱뚱하고 대단했습니다. 아마 괜찮았던가 봅니다. 내 차를 세웁니다. 도망도 못 갑니다. 그 때는 차도 몇 대 안 다니기 때문에 도망갔다가는 큰일납니다. 차를 댔더니 다가와서는 "면허증 좀 봅시다. 과속을 하셨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과속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왜 내 앞에 가는 차는 하나도 안 잡고 뒤따라오는 똥차를 잡느냐 그 말입니다. 똥차는 돈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잡는 것도 화가 나고 숨어 있다가 튀어 나오는 것도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나자 벌금 내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무슨 말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저 사실 저는 교회 목사인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교회 목사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저도 모르게 '나는 교회 목사인데 어떻게 과속을 했겠는가? 그러니 봐 달라. 믿어달라.'하는 의미가 내 말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맹세입니다. 그 말을 해서 "아, 그렇습니까? 예. 가십시오." 하면 신이 날 텐데 절 쳐다보고 씩 웃더니 "목사십니까? 그러나 뭐 억울하시겠지만 우리 처지도 있으니까 좀 보태주고 가십시오. 목사님이니까 동정을 좀 하십시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제가 목사라고 밝힌 것은 정직하게 보이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 사람은 또 역이용해서 목사니까 자기를 동정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세상이 요지경인 것입니다. 제가 그때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 오릅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목사라는 것을 절대 안 밝힌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어쨌든 옛날이나 지금이나 맹세 비슷한 말들을 갖다 붙이고 부풀리는 밑바닥에는 항상 정직하지 못한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34절에 나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절대 맹세하지 말지니라." '이런 헛된 맹세, 거짓말 맹세를 절대로 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도 안 되고 하늘의 이름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인데 어디에 함부로 이름을 갖다 끌어대서 맹세하는가? 어떤 이름을 갖다 맹세를 해도 그 이름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용할 수는 없다. 하늘이고 땅이고 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속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어떤 이름으로도 맹세하지 말지니라.'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말을 할 때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라. 거기에서 보태고 빼는 것은 벌써 그 근본이 잘못됐다. 악에서 좇아 나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구린내가 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투명한 말을 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예수님의 교훈을 가지고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어떤 계시의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정직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맹세가 필요 없는 투명한 인격을 갖추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오늘의 메시지의 키입니다. 맹세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우리를 믿어줄 정도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정직하십니까? 옥 목사를 보고도 저는 질문합니다. '너는 정직한가?' 우리 모두가 각자를 놓고 얼마나 정직한지 물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요즘 많이 읽히고 있는 맥스 루카도가 참 재치 있는 말을 했기에 제가 그대로 인용합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우리 자신에게 대한 아주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상사의 호감을 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첨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윤활유라고 부르죠.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과장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극적효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분에 넘치는 집에서 삽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좀더 솔직해 집시다. 세상이 거짓되면 거짓될수록 정직하게 살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나 혼자 정직하려다가 자주 속아 버립니다. 나중에는 손해를 봅니다. 그러다가 보면 정직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은근히 적당하게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세상 사람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같은 칼라로 봅니다. 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결국 나도 모르게 내 안에 하나의 고정 관념이 생깁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안 믿는 것이 상책이라는 고정 관념이 내 마음에 꽉 자리를 잡아요. 그리고 어쩔 수 없어서 꼭 믿어 주어야 할 상황이 되면 속는 셈 치고 믿어주자는 선심성 신뢰로 땜질을 해 버립니다. 그러니 다 의심하고 의심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정직성, 투명한 인격을 가지고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한번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정직해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서울 대학의 박 모 교수가 삼만 명을 대상으로 해서 표본조사를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기에서 73%이상 되는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한국에서는 정직해 가지고는 살 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사람 가운데 10대와 20대가 다수를 이룬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렇게 투명하지 못한 세상에서 나 혼자 정직하다고 살 수 있을까요? 다니엘 웹스터라고 하는 사람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실만큼 강한 것이 없다. 그러나 한편 진실만큼 이상한 것도 없다." 이상합니다. 이러다 보니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서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오 기괴한 세상, 조심하라." 기괴하고 괴팍하고 이상한 세상을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여 정말 조심할 지어다. 솔직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안전한 것이 못 되느니라." 솔직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안전한 것이 못 되기 때문에 안전하게 살고 싶으면 적당히 거짓말 해야 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이런 말이 예수님의 교훈보다도 더 우리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나 세상이 거짓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거짓이 판을 치고 과장과 아첨과 술수, 온갖 헛된 말들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 따라 예면 예요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정직성을 우리가 유지하고 나가려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안전한 데가 없습니다.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오해를 받고 어떤 때는 따돌림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정직하지 못합니다.
이랜드 그룹의 사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사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절대 정직입니다. 차라리 절대가 없으면 좋겠는데 정직에다가 절대까지 붙여 놓았으니 요지부동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 동안 회사가 당한 고충을 여러분이 다 모릅니다. 심지어 그 회사에 다니는 믿음 좋은 젊은이들까지 나중에는 비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악한 세상, 거짓말을 안 하면, 도무지 거짓말로 둘러대지 아니하면 통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절대 정직 가지고 어떻게 기업을 운영합니까? 너무 이상론입니다. 도무지 배겨낼 재간이 없다며 떠나는 사람들을 한두 명 보았습니다. 이 절대 정직을 고수하려다가 그 동안 손해를 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무사찰을 당한 일이 한두 번입니까? 정직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의심받는 세상이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정직해야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거짓말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53장 9절에 보면 그는 범죄하거나 거짓말하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을 부풀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법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떤 맹세라도 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고난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처럼 정직해야 합니다.
카터 대통령을 아시죠? 그는 1976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너무 거짓말을 하자 거기에 넌더리가 난 국민 앞에 이렇게 선거 공략을 내세웠습니다. "나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정직성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에게 표를 던져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정직한 도덕정치를 펴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아마 정직을 내세워서 대통령이 된 사람은 미국 역사에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안되지 않습니까? 정치판에 정직이 어디 통합니까? 결국 80년도에 레이건과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다가 결국은 카터가 패배를 했습니다. 패배를 시인하는 연설문에 이런 묘한 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여러분에게 약속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다시는 대통령의 자리에 설 수 없게 되었지만 괜찮다고 말하지는 못하겠군요." 하고는 쓸쓸히 웃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직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대로 지금까지 정치하려고 무척 애를 쓰다 보니 국민들의 인기를 잃어 버리고 이번에는 낙선을 했다는 말입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의 심정을 우리가 다 모르지 않습니까? 막 가슴이 찢어지고 어떤 때는 후회가 되고 괴롭고 슬프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 감정을 이 연설에서 그대로 표현하면 솔직하니까 좋기는 합니다. 그런데 또 그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감정을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 나는 괜찮습니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입니다.' 하는 말을 했어야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 또 거짓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한 마디였습니다. 그는 대통령을 두고 나온 후에 미국 사람들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가장 존경 받는 전임 대통령으로 헤비타트 운동,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 지어주는 일을 위해서 세계를 누비고 다니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되지 못하든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욕을 먹든지 간에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정직해야 됩니다. 카터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정직한 자를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가운데서 내가 진실을 말해야 할까 진실을 말하지 말아야 할까를 놓고 고민하는 딜레마에 빠진 형제 자매가 있으면 이 시간 꼭 이 질문을 하십시오. '거짓말하는 나를 하나님이 축복하실까? 거짓말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깔고 있는 나의 계획에 축복하실까? 거짓말하는 자를 좋아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로 남을 조정하는 내 직업을 하나님이 축복하실까?' 여러분이 꼭 질문하십시오. 우리는 가까이 보면 안됩니다. 멀리 보아야 합니다. 가까이 보면 몇 마디 거짓말하는 것이 돈을 모으는 수단일 수 있고 몇 마디 거짓말을 하면 성공도 할 수 있고 남보다도 앞지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멀리 보십시오. 거짓말을 축복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보여 주십니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실패가 되게 하시고 오늘의 안전이 내일의 벼랑 끝이 되게 하시는 사례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짓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가 그 재산이 자녀 손들을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게 폐인으로 만드는 집안을 한두 건 봅니까?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자를 축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아도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가 진실해야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증인들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해야 될 우리가 투명하지 못하고 정직을 의심 받는다고 합시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을 때에 우리의 전하는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통해 구원 받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투명하지 못한데 어떻게 세상 사람이 주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한 평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예배 드릴 때마다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전이요 이것이 우리의 뜨거운 가슴이요 우리의 소원이라고 한다면 이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 될 우리가 투명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해서 이 세상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해도 정직해야 합니다. 왕따를 당해도 정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도 정직해야 합니다. 가난해져도 정직해 져야 합니다. 출세를 못해도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 볼 때 우리를 축복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분의 말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진실을 말하십니까? 항상 그렇게 하십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내일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오늘의 물결이 내일의 파도를 이루고 명년의 홍수를 이룹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되십시오. 예수님처럼 진실을 말하고 오직 진실 만을 말하십시오."
우리가 모두 이 말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하여 바울은 에베소 4장 25절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참말을 하라."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던 기도가 바로 우리 기도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51편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의 깨끗하심을 가지고 내 마음을 씻어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더럽고 냄새 나고 거짓된 이 세상 우리가 이대로 두고 삽니까? 이 더러운 세상을 우리 후손에게 남겨 두어야 합니까? 우리 한국 교회가 천만의 성도를 가졌습니다. 국민의 사분의 일을 확보하고 있는 가장 큰 공동체요 조직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만이라도 생명 걸고 정직하기를 각오한다면, 그래서 청와대에 있는 사람은 청와대에 있는 대로 생명 걸고 정직하기를 원하고 장관을 장관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정직하기를 원하고 국회 의원은 국회 의원대로 구십 명 이상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직만을 말하기를 원하고 많은 기업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기에 기업이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정직하기를 각오한다면 이 나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나라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후손에게 정직하고 깨끗한 나라 물려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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