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권능을 행하실 수 없는 이유
마가복음 6:1-6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 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2안 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 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 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예수께서 저희 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 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 며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 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 더라
미국 LA에 풀러라는 신학교가 있습니다. 가르치시는 교수님 가운 데 세계적인 신학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피터 와그너 박사가 여름철에 우리 교회 에서도 오늘 단기선교 보고를 하게 되지만은 신학생들이고 단기 선교를 떠났습니다. 그 멕시코하고 국경이 맞닿아있는 어떤 마을을 하나를 선 택해서 여름철 전도 활동을 하게 되 었습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은 미국이고 길 건너는 멕시코 예요. 그래서 전도가 이제 시작되 었습니다. 미국 쪽 길을 따라서 가 게마다 집집마다 들어가서 전도지를 주면서 전도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 세요. 사람들이 전도지를 친절하게 받고 어떤 사람은 격려도 해 주고 그래서 이렇게 전도가 잘 되어가는 것을 보고 팀 단원들이 아주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격려를 받았습니다. 힘이 생겼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이제 미국 쪽 길을 전도한 다음에 길을 건너갔어요. 멕시코 쪽에서 전 도지를 나눠주기 시작하는데 아무도 전도지를 안 받는 거예요. 아주 싸 늘하게 사람들이 눈초리를 보내고 그리고 가라고 소리를 막 지르는 것 입니다. 근데 본래 멕시코 사람들 이 그렇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받아 들일 텐데 그 멕시칸 사람들이 안 그렇습니다. 본래 아주 친절한 사 람들이에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인데 전혀 기대치 안았던 반응이 나오니까 신 학생들은 아주 충격을 받았습니다. 배척을 받으니까 아주. 힘도 없어지 고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전도팀이 모여서 기도를 하는 것입 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새벽에 기 도회 때 생겨진 어떤 아이디어를 갖 고 그들은 전도하기 전에 먼저 기도 행진 prayer walk 이라고 해서 전 도하기 전에 기도 행진을 하는 거예 요. 멕시칸 쪽의 길을 쭉 걸어가면 서 그들이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걷습니다. 하나님, 이 멕시코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악한 영들이 이 전도를 훼방하고 있다면 그 악한 영들을 예수 이름으로 묶어 주시고 저들의 마음에 이 복음을 받 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주시옵소서. 자유를 주시옵소서. 마음속으로 기 도하면서 기도 행진을 했어요. 그 다음에 전도지를 주니까 잘 받아 들 여요. 사람들이. 그런 얘기가 피터 와그너 박사가 한 것을 제가 들은 일이 있습니다. 자, 길 하나를 차이 에 두고 미국 사람들과 멕시코 사람 들이 보여 주었던 복음에 대한 극단 적인 대조적 반응. 한 쪽에서 복음 을 환영하고 한쪽에서는 복음을 철 저하게 배척하고 내담하게 대했던 이 두개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비슷한 반응을 경험하 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 작됩니다. 마가복음 6장 1절을 보 시면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거기가 어딥니까? 가버나움입니다. 이 갈릴 리 지역에 중심이 되는 도시가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을 주심으로 활동을 많이 하셨습니 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 성지순례 를 가신다면 갈릴리 호수 빼놓을 수 없죠? 그리고 이 가버나움 마을을 반드시 들리게 되는데 이 가버나움 마을에 가면 그 앞에 간판이 하나 붙어있어요. 지금도 마을 입구에 간 판이 하나 서 있습니다. Town of Jesus 예수님의 마을 예수님의 타운 이런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 은 이 가버나움에서 아주 놀라운 일 들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기적이 나 타났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벌떡 일어났죠? 열 두 해를 혈우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자, 이때 야이로의 딸, 그 딸의 아버지 야이로의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회당장, 어떤 회당이었을까요? 가버 나움 회당, 회당장의 초청을 받고 예수님이 그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 로 그 딸을 위해서 걸어가시던 그때 에 많은 무리들이 에워싸고 있었습 니다. 자, 예수가 지나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예수님 을 touch 하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소문의 중심이 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의 hero, 가 버나움의 star였습니다. 많은 사람들 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 리고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 습니다. 자, 거기를 떠나 가버나움을 떠나 말이예요. 그런데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나셨어요. 상상에 속하지만, 추측에 속하지만, 아마 예수님이 쉬 고 싶었는지 몰라요. 고향 언제나 우리에게 안식을 주지 않습니까? 그 래서 홈커밍을 위해서 갑자기 고향 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가버나움에 서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후 에 주님은 그 일들은 고향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던 주님은 고향으로 가시고 싶 어했어요. 고향이 어디예요? 예수 님의 고향이? 나사렛, 태어나기는 어디서 태어나셨어요? 베들레헴. 그러나 베들레헴 예수 이렇게 부르 지 않습니다. 뭐라고 부릅니까? 나 사렛 예수. 예수님의 아버지가 호 적 때문에 잠시 베들레헴에 내려가 서 그때 출생을 했지만 예수님이 자 라나신 곳은 나사렛이었습니다. 나 사렛과 가버나움. 거리가 먼 거리가 아니예요. 제가 차를 타고 가보니 까 이 가버나움에서 나사렛까지 한 20분이면 와요. 그러니까 수지 분당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예요. 가 버나움에서 환영을 받으시고 기적을 행하셨던 주님 이제 나사렛 고향으 로 오십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 나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 니라. 그 당시 유태인 랍비들은 길 을 행진 할 때 혼자 걷지 않아요. 항상 제자들은 데리고 걷습니다. 예 수님도 이제 공적 생애를 시작하시 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랍비가 되신 예수님. 그의 메시아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였을까요? 어쨌던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 나사렛에 오 셨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십시다. 자,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환영 받으 셨나요? 배척 받으셨나요?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배척을 받으셨 어요. 이상하게 가버나움에서 그 놀라운 환영을 받으시고 사람들의 관심의 촛점이 되신 예수님이 고향 에 와서는 싸늘한 냉대를 접하십니 다. 그래서 이때 예수님이 남기신 유명한 격언, 명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뭐예요?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선지자는 고향에 서 환영받지 못한다. 그게 아마 사 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고향 이 수원인데 요 너머로 가지 않습니 다. 잘. 거기 가면 나를 잘 몰라줘 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 지 못한다. 이런 말을 남겼어요. 근 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님이 나사렛 땅에서는 기적을 행하 지 않으셨어요. 가버나움에서 기적 을 행하시고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 시고 주의 권능과 은혜를 베풀어주 시던 주님이 나사렛 땅에서는 아무 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오늘 본문에 6장 5절에 보시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얼마 나 비극입니까? 그러니까 나사렛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손해 본 것이지 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 고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고 주님의 영광을 목격하지도 못했고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할 기회 를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이 오셨음 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통해서 나타 나야 할 은혜와 사랑과 기적의 기회 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럴까 요? 이건 비극이죠. 오늘 비슷한 비극이 우리집 나에게 일어나고 있 는 것은 아닐까요? 종종 들어보십 시오. 내 이웃들이 은혜를 받았데요. 삶이 변했어요. 예수 믿고 하나님 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합니다. 혹시 이런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나에게 는 주님이 이런 기적을 왜 행하지 않으셨을까? 우리 집에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까? 우리 집에는 응답 의 표적도 없고 하나님의 살아계시 는 능력이 나타나는 표지가 우리집 에는 왜 일어나지 않을까? 나에게 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기적 이 하나님의 구원이 왜 나타나지 않 을까? 이런 생각해 보셨어요? 그 렇다면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아 봐 야 합니다.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 은 이유를 주목해 보셔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로 나사렛 땅의 사람들이 첫째는 호기심 그 이상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호 기심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리를 찾는 일에 있어서 구 도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구도의 수준이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첫번째 원인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2절 을 한번 읽어보세요.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늘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자, 2절 여기까 지만 읽으면 나사렛 고향 마을 사 람들이 예수님께 관심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죠? 그리고 상당히 놀랬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함께 자 랐던 저 예수 우리가 잘 아는 예수 인데 딱 보니까 놀랍단 말이죠. 도 대체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고 하는데 그 권능의 출처 가 권능의 source 가 어디에 있을 까? 그들의 마음속에서 의문이 생겼 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진지한 호 기심일 수가 있습니다. 진지한 호 기심. 여러분, 호기심은 좋은 것입 니다. 나쁜 것이 아니죠. 호기심 때 문에 과학이 발달하고 호기심 때문 에 예술이 발달하고 호기심 때문에 문화가 발달합니다. 호기심은 우리 에게 생산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 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있어 서 호기심은 불행한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불행한 사 실은 나사렛 땅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 생겼던 호기심. 그 호기심을 생산적 결론으로 유도하지 못했던 case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살아있는 사람, 호기심이 있기 마련 이죠. 건강한 사람 호기심이 있습 니다. 자라나고 있는 사람 호기심 이 있습니다. 예컨대 여러분 틴 에 이져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틴 에이져가 되면 이성에 눈을 뜨기 시 작합니다. 호기심이 생겨요. 이성이 어떤 종류의 인간일까? 이성에 대 한 호기심, 성에 대한 호기심 이건 자연스러운 것이죠? 우리가 생물발 달학적으로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 는 호기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호 기심을 잘 발전을 시켜서 건강한 데 이트를 하고 또 건강한 짝을 만나 건강한 결혼을 하고 건강한 가정을 형성합니다. 어떤 사람은사랑 때문 에 시를 짓다가 시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사랑 때문에 노래를 하다가 위대한 음악가가 되기도 합니다. 호기심은 우리에게 생산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틴 에이져는 성에 대한 호기심이 극 도로 부자연스럽게 발전된 나머지 포르노 중독환자가 될 수도 있습니 다. 음란한 잡지, 음란한 비디오, 이 런 것들을 주목하고 탐닉하다가 성 에 도착적인 환자가 되어서 일생을 그르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호기심이 잘못 유도된 파괴적 결과라고 할 수 가 있습니다.
또 사람이 살다보면 돈에 대한 호기심도 생깁니다. 자라다 보면 아..이 돈이라는 것이 굉장히 파워가 있구나. 돈이 필요하구나 그래서 아..돈을 벌자. 돈을 벌기 위해서 열 심히 일하자 땀 흘려서 일하기 시작 합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좋 은 사업가가 됩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서 돈을 잘 관리합니다. 이건 좋은 결과예요. 생산적 결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돈, 돈이 최고 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 을 모으자. 남의 집을 넘어갑니다. 두드려 팹니다. 돈을 뺏습니다. 강도 가 됩니다. 불행한 결과예요. 똑같은 호기심이 아주 불행한 결과로 사람 을 인도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 미국의 문학가중에 호레시요 엘가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름이 여러분에게 친숙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유명한 동화책. 성냥 팔이 소녀. 아십니까? 초등학교때 공부를 잘하신 분들은 생각이 나실 겁니다. 성냥파는 소녀. 아주 아름다 운 이야기이죠. 성냥을 파는 소녀. 가난한 소녀. 가난하지만 꿈은 있었 습니다. 꿈은 돈보다 귀한 것입니다. 소녀는 이 꿈을 잘 관리하고 키워서 불행한 삶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을 찾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 죠. 성냥파는 소녀. 그러나 이 아름 다운 이야기를 만들었던 엘가라는 작가의 인생은 그가 기록한 그 작품 처럼 아름답지는 못했습니다.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의 삶은 비극이었 습니다. 엘가라는 사람은 본래 하바 드대학 출신입니다. 신학공부한 사 람입니다. 하바드에서 신학을 공부 했어요. 그리고 목사일을 했습니다. 아주 짤막하게 목사일을 했어요. 그 런데 목사일을 하다보니까 목회를 하다보니까 이건 적성에 맞지 않는 다. 그래서 목회를 때려치웁니다. 그 리고 다시 사업에 뛰어 듭니다.그리 고 글도 쓰고 ..돈을 벌기 시작했습 니다. 돈을 벌다보니까 더벌자. 그래 서 계속해서 돈에 대한 열망을 키워 가며 사업, 사업, 사업에 매달려서.. 돈은 계속 들어옵니다.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하자, 돈은 이 사람을 부패시키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방탕한 삶을 시작합니다. 결혼했지만 결혼은 곧 파경에 도달 합니다. 그는 깊은 방탕속에 도박에 도 손을 대고 나중에는 자기 삶의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정신분열자 환 자가 되어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 다. 돈에 대한 호기심. 그의 인생을 망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 인생 은 여러가지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섹스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돈에 대한 호기심. 권력에 대한 호 기심. 우리는 많은 호기심을 갖습니 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에 대한 호 기심. 어떨까요? 예수. 알고싶다. 하 나님. 어떤 분일까? 정말 예수안에 살아가는 삶. 어떤 삶일까? 진리에 대한 호기심 있어요? 자, 나사렛 땅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요. 예수님. 근데 우리가 알던 예수인데 좀 달라졌다. 예수가 누굴 까? 그들은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 러나 그들은 호기심을 예수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연결시키지 못했습니 다.
그들은 그들이 가졌던 예수에 대 한 호기심을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나사렛땅의 비 극이예요. 오늘 여기 앉아 있는 분 들. 어떤 종교에 대한 호기심. 예수 에 대한 호기심. 기독교에 대한 호 기심. 이 호기심이라는 면에서 우리 모두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 러나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을 넘어 서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도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신앙 의 구도의 수준은 아직도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도 있 을 거예요.
한번 나가보지. 오늘은 비오는데 관두자 그래서 오늘 이런 수준의 사 람들은 다 집에 계실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 정도는 넘어선 사람들 이라고 믿습니다. 호기심이 있으시 니까 나오셨을 거예요. 호기심이 있 으니까.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이라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가운데 많이 있어요. 예수. 알고 도 싶고, 또 체험하고도 싶고, 그리 고 하나님도 경험하고 싶고, 그러나 이 호기심을 구체적인 탐구의 단계 로 연결시키지 못해요. 예수님을 공 부해 보셨어요? 공부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그래서 왔다갔다..그리고 별 다른 일이 내 삶속에 발생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어느날 왔다갔다하는 것을 관두고 아예 어둠속으로 떠나 가 버리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 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 회 출입한 과거는 있었지만 경험한 일 있었지만 하나님 능력 몰라요. 하나님의 구원 체험한 일이 없습니 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나사렛땅 의 비극은 현재의 거리에서 재현됩 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호기심 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 사렛땅의 비극. 왜 일어났을까요?
두 번째로 편견을 극복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6장 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사람이 마 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 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 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 지라"
자, 나사렛 땅 사람들이 회당 에서 예수님 설교, 말씀듣고 어떤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처음에는 호기심이 있었어요. 그러나 이내 이 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3절에 이 사람이 즉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 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뭐라 그랬어 요?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왜 그랬을까요?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 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아들' 그러나 이 말 속에 는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편견이 있어요. 홀어미의 아들! 우리 한국 사회에도 전통적으로 홀어머니에게 서 자라난 가정에 대한 이런 편견이 있잖아요? '마리아의 아들' - 아니 이 말속에는 더 깊은 경멸이 그 바 탕에 깔려 있을지 몰라요. 어떤 것? 예를 들어서 마리아, 요셉 가까이 하면서 그 근처 이웃에 살던 사람들 은 이 집에서 일어난 스캔들을 아직 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뭐예요? 옛날에 마리아가 처녀때 애 뱃잖아? 그 작품이 예수잖아? 사생아? 이 편견이 아직도 나사렛 땅의 사람들 의 마음을 아마 지배하고 있었을거 예요. 마리아의 아들, 그리고 목수, 목수가 나쁜 직업은 아니지만 그러 나 특별하게 우리의 선망을 자아낼 만한 그런 직업도 아닌 목수, 아버 지 요셉 도와서 목공실의 목수, 그 목수 예수가 아니더냐? 그 편견, 그 마음속의 아직도 이 편견이 그들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 마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더 알아보 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게끔 저해하 고 있었던 요소라고 할 수가 있습니 다. 저는 이런 편견을 다른 말로 바 꿔서 '익숙함의 편견' 이라고 부르 고 싶어요. 여러분! 편견이라는 것 은 두 가지 때문에 일어납니다. 무 지해서 일어나고요, 모르기 때문에 편견이 생겨요, 아주 모르기 때문에 편견이 생길 수가 있고, 또 하나는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저는 익숙함의 편견이다. 나사렛땅 의 사람들에게 아 예수? 다 알아, 그 집안? 다 알아. 계속되는 얘기를 들어보세요. 3절에
"이 사람이 마리 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 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아, 예수의 남동 생, 여동생들 우리가 다 알아 지금 도 살잖아 우리 옆에 그런데 뭐 그 예수에게 뭐가 있냐 말이야 뭐 똑같 은 사람이지 이 편견 이 편견이 그 들로 하여금 예수를 알아보고, 예수 를 추적하고, 예수를 탐구하고 싶은 그런 구도의 열망을 저해하고 있었 던 요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늘 마음속에 안타까운, 부담이 되는 분이 계시다면 이런 분 들입니다. 어떤 분이냐 하면 교회는 열심히 나와요, 특별히 주일날 아침 예배는 열심히 나와요. 자, 그렇게 세월이 흘러갑니다. 십년이 지나갔 습니다. 이십년이 지나갔습니다. 삼 십년이 지나갔습니다. 이쯤되면 이 사람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 인이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 니까 교회에서 직분도 받습니다. 재 직도 됐어요.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어 보면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없어요. 신앙의 감동이 없어 요.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에 대한 마음속의 설레이는 고백과 간증이 없습니다. 예수님 전혀 모르 는 사람같아요. 교회 나온 지 이십 년, 삼십년 그 세월이 지나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임재도,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기적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예 요. 그래서 답답해서
"집사님 성경 공부 좀 하세요."
"다 해 봤어요, 옛 날에..."
"다 알아요. 뻔한 것 아니예 요"
주일 날 와서 딱 설교 제목을 보면 뻔할 '뻔'자 다 알아요. 거기서 더 이상 나가려고 하지 않아요 이것 이 '익숙함의 편견'이예요. 지난 금 요일 날 목자 수련회를 가졌는데 대 전의 신학교 교수님이 와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분의 얘기를 제가 듣다가 한 가지 공감되는 대목이 특 별히 저에게 있었는데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그 분이 5년전 성경 을 가만히 공부하다가 깜짝 놀란 사 실을 깨달았다. 뭐냐하면 내가 교회 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교 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교회론, 교회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아름다 움을 발견했다. 내가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몰랐나? 이 분이 신학대학 교수예요. 교회에 대해서 밤낮 가르 치는 사람이예요. 목사가 될 사람들 을 가르치는 분이예요. 그러나 교회 를 새롭게 발견했다. 교회를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참 놀랐다는 거예 요. 내가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모 르고 있었다니... 밤낮 보는 성경, 가 르치는 성경, 그러나 그는 성경안에 서 다시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어 느 정도 그 분의 심정을 이해합니 다. 저도 어느 때 말씀을 이렇게 묵 상하고 연구하다가 깜짝 놀라는 순 간들이 있어요. 야! 여기 이런 보배 로운 진리가 있었구나! 성경을 아신 다구요? 그러나 대부분 이런 익숙함 의 편견앞에 주저앉은 사람, 그래서 신앙의 참된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다 이런 편견이 있습 니다. 아 그 성경 뻔할 뻔자 아니 야? 그 성경 다 안다고 생각해요 알 아요? 아십니까? 저는 아직도 이 성경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한 가를 깨닫고 있어요. 성경의 깊이, 진리의 깊이 들어갈수록 성경은 나 를 감격시키고, 감동시킵니다. 그런 데 조금 교회생활 역사 흘러갔다고 성경 다 알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 예요. 그것은 문자 그대로 착각일 수 있습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나 간 지금도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존경받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가 한 유명한 말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 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안 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어요 성경 안다고, 교회 안다고, 교회 생활 그런거지... 이런 명목상의 기독교인, 거듭나지 못하 고, 교회 역사만 오래된 사람들 이 런 사람일수록 교회 생활의 태도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꼬부라져 있어요. 다 안다고 착각해요. 진지한 구도가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의 깊 이,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에 들어가 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 없어요. 다 안다고 착각해요. 다 아세요? 정 말 아세요? 하나님의 깊이, 성령의 깊이, 말씀의 깊이, 하나님의 임재의 깊이에 들어가서 그의 영광과 그의 임재를 체험해 보셨습니까? 여러 분? 편견! 무서운 것입니다. 얼마나 편견이 인류 역사의 발달을 방해했 을까요? 제가 얼마 전에 어떤 분하 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는 분이예요.
종교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일반 대학에서. 거기는 불교 교수도 있고 이슬람 교수도 다 있어요, 외국에서 종교학을 공부하는 분인데요. 그런 데 기독교 지도교수가 있었는데 그 분이 떠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 기의 논문지도를 다른 종교 교수에 서 받게 되셨데요. 이 분이 가서 인 사를 하면서 자기는 기독교 중세의 역사에 대해 논문을 쓰고 싶은데 선 생님 잘 지도해 주세요. 이 분이 비 웃는 톤으로 이런 말을 하더래요. ' 자네 기독교인 아닌가?' '그렇습니 다.' '그럼 크리스챤으로서 정말 중 세 기독교의 역사를 편견없이 자네 가 쓸 수 있을까?' 이 말을 듣고 굉 장히 속이 상하더래요. 그래서 그 분이 이렇게 대답을 했대요. '교수 님 저도 질문 하나 있는데 교수님! 정말 교수님답게 편견없이 저를 지 도해 주시고 판단해 주실 수 있을까 요?' 이 편견, 편견에서 자유한 인 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인류의 역사는 편견의 역 사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편견을 극복하려면 진지한 구도정신이 필요 합니다.
사실에 접근하려는 노력.. 그런데 어떤 기독교인들을 보면 또 이런 진 지한 노력없이 너무 쉽게 받아들이 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저는 성 경공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떤 분이 그래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저는 다 믿거든요, 그냥. 공부 안해도 다 믿어요. 그냥' '하나 님이 그렇다는 것은 저는 그냥 다 받아들여요.' 글세 정말 그래서 안 해도 될른지 모르겠어요.
이런 얘기가 생각나는데 어떤 신 학생이 신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면서 이상하게 답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 더래요. 너무 고민스러운 나머지 백 지는 낼 수가 없고 시험지 맨 아래 에다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하나 님은 모든 정답을 아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정답을 동의합니다.' 그랬 더니 얼마 후에 교수님 채점지가 다 시 돌아왔는데 이렇게 씌어 있더래 요. '하나님=100점, 학생이름 쓰고 너는 빵점.' 하나님은 다 진리를 갖 고 계시지만 하나님앞에 접근하려는 노력 필요한 거예요. 무지를 넘어서 서, 편견을 넘어서서 내가 진리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 얼마나 해 보 셨어요? 왜 나사렛 땅에 축복이 없 었을까요? 나사렛 땅에 왜 하나님의 기적이 없었을까요? 편견을 극복하 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나사렛땅의 비극의 원 인 가운데 하나는 믿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5절에 보세요. 거기서는 아 무 권능도 행하실 수가 없었다. 따 라서 소수의 병자들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다. 6절에 저희의 믿지 않음 을 이상하게 여기셨더라
저희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여 러분, 나사렛 주민들이 왜 믿지 않 았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단순하다 고 생각합니다. 나사렛 마을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 문에 그들은 다수에 편승한 것입니 다. 뭐.예수 믿지 않고도 잘만살더라 많더라. 이 다수의 유혹. 다수의 삶. 다수가 선택한 life style.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살고싶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러나 다수 가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앞에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다수가 잘 못 될 수 있어요. 1942년 이 지구상 에 살던 다수의 사람들은 지구가 평 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콜 롬버스라는 사람은 홀로 지구가 둥 글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이론 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배를 타고 항해에 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이 틀렸습니다. 콜롬버스가 옳았습 니다. 1610년 갈릴레오는 지구는 움 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 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는 움 직인다. 지동설. 그러나 대부분의 사 람들은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 각한 갈릴레오를 그 당시 캐톨릭에 서는 천주교에서는 종교 재판에 걸 었습니다. 그를 위협했습니다. 가족 들을 위협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을 지도 모른 다..거기에 싸인했어요. 그러나 법정 에서 나오면서 그는 유명한 말을 남 깁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단 말이야
다수가 틀렸습니다. 아주 재미 난 역사적 글이 하나 남아있는데 1842년에 말이죠. 미국 펜실베니아 에 사는 의사들과 의학자들이 모여 서 위대한 결정을 하나 했습니다. 그 결정이 뭐냐면 뜨거운 물에 목욕 을 하면 안된다. 그것은 류마티스와 폐렴의 원인이 될수 있다. 의사 선 생님들이 이상한 결정을 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진리 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펜실베니 아주 일대 그리고 상당히 많은 미국 땅 사람들이 무려 3년간 뜨거운 물 에 목욕을 안한 역사가 있어요. 이 것은 수년후에 그 이론은 뒤집어집 니다. 다수가 틀렸습니다.
1903년 그 유명한 라이트형제는 기계도 하늘을 날아갈 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친구들은, 동네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망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화라고 생각했습니 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계는 하늘 을 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라이트형제는 기계도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 다. 오늘날 기계는 하늘을 날 수 없 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계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다수가 틀릴 수가 있어요. 다수의 길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이 위 대한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좌우할 수가 있다는 심각성 을 아셨던 우리 예수님은 산상수훈 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 는 문은 그 길이 넓고 그리로 들어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 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작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
여러분은 다수를 선택하십니까? 아니면 진리의 소수를 선택하십니 까?
똑같은 오늘의 본문이 누가복음 에도 나오는데 예수님이 누가복음에 보면 나사렛회당에 방문하셔서 나사 렛 사람들이 배척함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계속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마가복음에 없는 설교를 하세요. 근 데 그 설교 듣고 얘기 두가지를 하 십니다. 근데 그 설교 두가지를 듣 고 나사렛사람들이 화가 나서 예수 님을 끌고 낭떠러지 끝까지 가서 밀 어버리려고 했어요. 나사렛사람들을 분노시킨 설교의 내용이 뭔지 아세 요? 하나는 엘리야 시대에 많은 과 부가 있었다.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은혜받은 과부는 한 과부밖에 없었 다. 사르멧과부 이 과부 하나만 은 혜를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선지자가 그의 집에 찾아왔어요. 기 름 한병을 달라고 했어요. 자기 먹 고살기도 바쁜데 달라고 했어요. 그 러나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기 위해 서 이 여인은 내어놓았습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뭐라고 말을 하냐면 하나님의 말씀 에 이 통에 가루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 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 을 것입니다. 이때에 이 선지자를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 습니다. 이 말씀을 말씀하신 하나님 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은혜를 주셨 습니다. 믿음이 이 여인을 고통의 시대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안에서 살게 되는 삶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과부 가 있었지만 이 한 여인만 은혜를 받았느니라
한 여자..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난 거예요. 또 얘길 하셨어요. 엘리사 시대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 었다. 많은 나환자가 있었다. 그러나 은혜받은 사람은 한사람만이다. 고 침받은 사람은 한사람. 선지자가 이 렇게 말합니다. 요단강에 일곱번 들 어가 씻으시오. 처음에는 우스꽝스 러운 미신이라고 믿고 싶지만 하나 님이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이 진리 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앞에 신뢰를 걸고 요 단강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리 고는 깨끗함을 얻었어요. 이 많은 사람가운데 이 한사람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길. 그러 나 그 길이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 다. 여러분. 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배척해도 많은 사람이 예수를 거절 해도 나는 예수를 선택하고 하나님 의 은혜가운데 살아가길 원하십니 까? 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딱딱 한 나사렛 사람들의 땅처럼 하나님 의 은혜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고있을까 요. 하나님.나에게 찾아오시는 하나 님을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기 때 문이 아닐까요?
요한복음 1장 11절은 이렇게 말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만드신 땅. 자기가 선택한 땅. 자기땅에 오매 자기백성이 영접지 않았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유명한 성경구 절.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런 말씀 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라는 말이 우리말에 빠져있 어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 는 자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을 버리고 예수님을 모른척하고 예 수님을 거절하고 예수님을 등지고 있지만 그러나, 영접하는 자, 그 이 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오늘 세상이 나사렛 땅처럼 예수님을 도 외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소외시키 고 예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수많 은 불신앙의 세속사회의 형편속에서 도 그러나 예수 영접하는 자, 그리 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 녀가 될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것 입니다.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여 러분은 이 기적을 체험하는 소수 속 에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주변의 이웃들처럼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하 고 완악하고 딱딱한 나사렛땅이 되 어 살기를 원하십니까? 거기서는 기 적이 없었다. 거기서는 은혜가 없었 다. 거기서는 구원이 없었다. 여러분 의 마음은 나사렛 땅입니까? 아니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던 소수의 은혜속에 참여하시겠습니까?
기도하십시다.
내 마음을 살펴보세요. 내 마음 나사렛땅처럼 교회는 드나들고 호기 심은 있지만 호기심을 넘어서지 못 하고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 영접하지 못하고 그냥 교회만 왔다 가 가고 그래서 아직도 하나님의 구 원도 기적도 체험하지 못한 마음. 내마음. 여러분의 마음. 그런 마음 아니예요? 그래서 우리가 불렀던 찬 송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내 맘속에 주 영접하라 새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의심을 다 버 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맘 문 다 열 어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성경공부하고 말씀 을 들어보시고 말씀을 묵상해보시고 말씀속에 내게 다가오는 예수그리스 도 살아보세요. 내 힘. 내 노력. 발 버둥쳐도 인생은 여전히 곤고합니 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내 삶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거기 은혜가 있습니다. 거기 구원이 있습니다. 거기 축복이 있습니다. 의 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오. 주님 마음의 문을 열겠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주님. 내 맘속 에 오시옵소서. 지금까지 예수와 상 관없이 살았지만 마음을 열어보세 요. 이시간 주님앞에 기도해보세요. 예수님 제 마음속에 오시옵소서. 저 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미 예수님 을 받아들이신 분들. 그러나 내 마 음속에 받아들인 예수님을 학대하지 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삶의 주인되 어 다시 나를 다스려주시는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속에 거할 수 있도록 오 주님 나를 다스려주시옵 소서
'기타 준비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목적 : 세례 / 골 1:9-12 (0) | 2021.12.23 |
---|---|
겨자씨 한 알의 꿈/마가복음 4:30-32 (0) | 2021.12.18 |
그가 죄인 위해 오셨다면/마가복음 2:13-17 (0) | 2021.12.13 |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들/마가복음 1:21-28 (0) | 2021.12.11 |
과거를 치유하고 새 출발하라 / 요한복음 21:15-23 (0) | 2021.12.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