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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떡과 생선을 먹은후 / 요 21:12-19

by 【고동엽】 2021. 12. 18.

떡과 생선을 먹은후


요한복음 21:12-19


설교방송 (설교본문)


저는 부활절이 되면, 교회에서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부활절 계란을 먹으면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바닷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숯불에 구운 생선을 주시며 식사하셨던 것처럼, 온 교회가 떡을 떼며, 숯불에 구운 생선을 먹으면서 부활절을 지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언제부터 삶은 계란을 먹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상징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활절 계란'(Easter Egg)은 고대 바벨론의 다산의 여신이었던 아스타르 숭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A starte 혹은 Ishtar→Easter ; 이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우상 Ashtaroth '아스다롯'과 동일한 우상신 임). 바벨론 고대 신화에 따르면, 하늘에서 큰 달걀(an egg of wondrous size)이 유프라테스강에 떨어졌는데, 그 달걀에서 큰 女神 A starte(혹은 Ishtar)가 부화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바벨론 사람들은 달걀을 거룩한 상징으로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 먹기도 했습니다.






이런 풍습이 로마천주교회에 들어오면서 달걀이 기독교의 부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마치 닭이 계란에서 나온 것 같이 비유하여 계란을 먹게 된 겁니다. 결국, 계란을 먹으면서 A starte(혹은 Ishtar, Ashtaroth)우상을 섬겼던 고대 바벨론의 전통이 기독교의 부활 전통이 된 셈입니다.






지금처럼 우리가, 달걀을 먹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디베랴바닷가의 식사를 나누는 부활절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떡과 생선을 먹느냐? 계란을 먹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떡과 생선’을 먹었던 그 제자들에게, 그 때 거기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때 일어났던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떡과 생선을 먹을 때 일어났던 2가지 중요한 사건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식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을 고백하는 자리였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 중에 감히 “당신이 누구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일곱 제자들을 아침식사에‘초대한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디베랴바닷가에서 '떡과 생선’을 먹을 때 있었던, 첫 번째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 요한이, 디베랴바닷가의 아침식사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식사에 초대받았던 일곱 명의 제자들 : 시몬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데의 아들들, 그리고 또 다른 두 제자들 모두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일곱 명 제자들의 그 분명한 믿음이, 이 식사의 첫 번째 의미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떡과 생선’은 아니지만, 이교도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부활절 계란’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 계란을 먹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활절 계란’을 먹으면서, 스스로 한 번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베랴바닷가에서 ‘떡과 생선’으로 아침을 먹던,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혹 여러분 중에,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하거나 믿지 못하는 분은 없습니까? 혹 그런 분이 계시더라도 조금도 落心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그렇게 의심 많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을 한결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제자들의 그 자리에 직접 찾아가서 만나주시고 믿음을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식 후 첫 날, ‘요한’과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두 사람이 급하게 뛰어갔지만, 젊은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합니다. 요한은 몸을 구푸려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무덤 안에 들어가지는 않고 주춤거립니다. 곧 뒤따라 온 베드로는, 급한 성미 그대로 곧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도 무덤 안에 흩어진 수의를 보았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 무덤 입구에서 주춤거리고 있던 요한도, 조심스럽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 들어가 자세히 빈 무덤을 살핀 요한은, 베드로와는 달리 그 즉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요한은 ‘빈 무덤’을 보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첫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보다 더 먼저, ‘빈 무덤’을 발견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그‘빈 무덤’을 보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녀는 빈 무덤을 보고서는 무덤 밖에 서서 통곡하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하고 물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마리아에게 직접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셔도, 예수님을 동산지기 줄 알고 예수를 믿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마리아는 말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비로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요한은, 빈 무덤 외에 아무런 다른 증거 없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믿었습니다. 그 外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을 때 믿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보는 것으로도 충분치 못했습니다. 못 자국난 예수님의 손과 창 자국난 예수님의 허리를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는, 특별히 못 자국난 손과 창 자국난 허리를 만져보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마를 가리켜, 그저 ‘의심 많은 제자’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도마를 제자들 중에 특별히 의심많은 제자였다고 그렇게 否定的인 視覺으로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서를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도마가 의심 많은 제자’였다는 관점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체험이 아니라는 겁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이 할머니 무릎에서 잠자는 어린아이처럼 조용하게 생기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생 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알아갔던 야곱과 같이 그 믿음이 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언제 믿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그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믿음이 없어서 방황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눈물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형편을 잘 아시고, 기질을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는 겁니다. 나의 軟弱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 주님께서 나의 형편과 연약한 기질과 아픔들을 채워주시기 위해 나에게 직접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여러 모양으로 弟子들을 찾아가시고 만나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보여주셨던, 바로 그 주님을, 만나는 시간과 사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 식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보다 더 깊은 全人格的인 사랑을 고백하는 자리였습니다.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떼어주시는 떡과 구워주시는 생선으로 배불리 아침식사를 마쳤습니다. 아마, 그 때의 아침식사 분위기는 수다 떨면서,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먹은 식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한 그들의 식사가 얼마나 감격적이었고, 흐뭇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송구한 마음 가득한 적막이 흐를 듯한 조용한 식사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 가까이에 다가 앉으셔서, 예수님께서 직접 떼어서 주시는 떡과 집어다 주시는 생선을 받아먹을 때, 감히 “당신이 누구십니까?” 물을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깊은 사랑이 넘쳤고,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각오와 용기가 생기는 식사였습니다.






그런 식사가 끝났을 때, 예수님은 일 곱 중 하나인 시몬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동일한 질문을 또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거듭되는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가슴 아픈 답변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는, 여기서 저와 여러분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주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두시지는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企待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조건 없는 逆說的인 사랑의 고백입니다. 십자가 지시는 주님을 否認하고, 모른다고 맹세하면서 주님을 버렸던 베드로입니다. 詛呪까지 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알면서도, 그는 다른 여섯 제자들을 선동해서, 가장 앞장서서,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노라”고 하면서, 디베랴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 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사랑하신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주님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는 방랑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때로 쉬시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內面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잡숫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머무실 집도 없고, 늘 돌아 다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 스스로 먹는 자리를 마련하시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남들이 마련한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이 방면에서는 어지간히 소문난 분이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곳마다 거기 가면,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몇 날 몇 시, 어느 마을 어느 동리에 잔치가 있다 하면, 으레 거기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식탁에서 임하는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 어김없이 예수님이 앉아 계셨고, 바로 거기에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잔치에 참여한 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비난했습니다.‘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 했습니다(눅 7:34 ; 마 11:19). 이 말을, 표준새번역성경은, ‘먹보요, 술꾼’으로 번역했습니다. 어떻게 번역되었든지 간에, 이 말은 대단히 모욕적인 言辭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늘 참석하셨던 그 잔치 자리, 먹는 자리에 주로 누가 주인공들로 참석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6)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비난받으신 것처럼, 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살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죄인들이었던, 나병환자, 장애인, 이방인들, 사마리아인, 로마의 앞잡이인 세리들, 그리고 천한 여인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늘 함께 한 식탁에 앉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마 21:31).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는 버림받은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연약함과 허물과 죄악을 그대로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마리 양이라고 해서 소홀히 버림받는 법이 없습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이라고 해서 버림받은 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라고 해서 소홀히 여기는 법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는 버림받는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를 사랑하시듯, 죄인들과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듯,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같이,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 같이,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중, 그 어느 한 분도 주님이 포기한 사람 없습니다. 버림받은 사람 없습니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아 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변화되기를 기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바닷가에서 친히 베푸신 떡과 숯불에 구운 생선을 주시는 그 식탁에 초대된 베드로에 대한 企待는, 지금 現在의 베드로,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주님께만 있는 사람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의 변화입니다. 주님의 羊을 돌보는 자로의 변화입니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만, 그러나 나이를 먹어서는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殉敎하는 使徒로의 변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 삶과 성품과 인생의 목적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증거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그의 인생 전부가 다 바뀐 사람입니다. 그는 아예,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가 사는 삶의 의미는, 자기를 사랑하사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그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痕迹을 가진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고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사도 바울은 아무런 결점도 흠도 티도 없는 위대한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강함과 자신의 육신을 자랑할 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기의 弱點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쓴 편지 글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품을 지닌 연약한 자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주옥같은 사랑을 노래했지만, 그도 누구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못마땅한 자들에 대하여 비판하기를 서슴치 않는 자였습니다. 바울 자신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가르쳤지만,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이고, 이 멍청한 갈라디아 사람들아”하면서(갈 3:1) 모욕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마가가 저지른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문제로 의견이 갈리자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역자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기어이 갈라서고야 말 정도로 고집불통의 사람이었습니다(행 15:36-41).






분명, 사도 바울도 우리와 같이 약점이 많은 한 인간이었습니다. 타고난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모자라는 인품 때문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타고난 강한 성품 때문에, 그것이 약점이 되어 인간관계에 많은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바울을 만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바울처럼, 차라리 내 연약함을 자랑하며 사는 한이 있더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변화되어, 지금까지 한 없이 약한 인간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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