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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3일 신학세미나 프로토콜
[기독교강요선] 1권 1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있다. 칼빈은 “우리의 빈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히 풍성함을 명백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3)고 하고,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때 자기 자신의 불행을 자각하고 의식하게 된다”(3)고 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칼빈은 타락한 존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만 사람이 자기 모습을 본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의 관계에서만 생긴다. 단순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은 아니다. 그것은 종교이다.
2장 인간에게서 흐려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주어져 있다고 본다. 칼빈은 종교의 종자,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은 루터가 이미 말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신성에 대한 감성이 있으나 타락해서 우상을 만든다. 이것을 칼빈이 수용했다. 칼빈은 하나님 지식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얘기한다. 전적 타락도 루터가 이미 말했다. 칼빈은 루터를 수용했으나 현재 한국에서는 오해되어 있다. 칼빈은 전적 타락을 얘기하면서도 하나님 존재에 대한 관념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여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3장 세상에서 흐려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
3장은 2장의 연속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에 당신을 시현하시는데, 인간은 이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를 했다고 믿는다.
4장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교회는 성서 위에 있지 않고 그 아래에 있다는 칼빈의 주장은 이미 루터가 한 얘기이다. 말씀이 선포 되어 모인 무리가 교회이다. 따라서 말씀이 먼저고 교회가 나중이다. 따라서 성서가 교회의 결정을 통해 정경이 되었다는 것은 의미 없는 주장이다. 성서의 해석자는 성령이다.
9장 섭리
하나님은 이신론의 하나님이 아니라, 섭리의 하나님이다. 섭리로써 하나님은 천지를 질서 있게 지배하며, 그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그것이 다만 우리의 하나님 지식이 부족해서 우리에게는 우연으로 보보보뿐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시간에 매여 있지 않으며, 하나님이 모든 것의 결재자이며 통치자이다. 섭리 신앙은 인간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섭리에서 예정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창조 이전에 예정했다(칼 바르트의 수용).
<논쟁점>
1-3장에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칼빈은 늘 역설을 깔고 있다. 그는 이율배반적인 인지구조를 가지고 있다. 칼빈에게서 두 가지 상반되는 주장이 공존하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이율배반적 복합, 다시 말해 타원의 두 중심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라틴 문화의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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