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9일 장로교의 뿌리 칼빈 강독 세미나 프로토콜
1. 묵상 말씀 : 호 12:1-6
[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이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2]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2. 칼빈 신학을 접할 때 이미 발표된 여러가지의 논문들이 있지만 또 다른 문제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방법으로의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칼빈이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 칼빈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었던 사람들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들) 에 대한 연구는 도전해 볼 만한 분야일 것이다.
예를 들면 부처에게 교회의 직제, 제도 등을 영향 받았는데 그 당시의 교회의 직제가 아직도 유용하게 활동되고 있다는 점, 또는 대의 정치체제의 근간이 되었던점 등등
-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 : 어거스틴, 안셀름, 요한 둔스 스코투스, 윌이엄 옥캄,
존 위클리프, 존 후스, 사모나롤라 등등 이 있다.
- 위대한 종교개혁가들 : 마틴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블링거, 존 낙스,
- 교육과 성장 과정의 사람들
마르슈 대학 : 마튀렝 꼬르디에(Mathurin Cordier) 교수 < 칼빈은 그에게서 라틴어를 배운다. 그 라틴어가 그 방대하고 동시에 깊은 칼빈의 신학을 세우는데 초석이 되었다.
몽테규 대학 : 죤 멕닐 (John McNeil) 교수 <몽테규 대학은 중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교육하는 카톨릭 대학으로 마르슈 보다는 유명한 학교였으나 칼빈이 입학할 당시에 명성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도 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에라스무스는 이 학교에 대하여 '똑똑한 학생들을 데려다가 바보로 만드는 학교' 라고 학교에 대한 조소를 털어 놓았다. 이 몽테규 대학은 에라스무스, 칼빈, 로욜라 같은 사람을 배출했다.
칼빈은 이 곳에서 요한 메조 ( Johan Mejor) 를 만났다. 그에게서 초기 중세 신학을 전수 받고 어거스틴의 사상 세계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교수는 스페인 출신 안토니오 코로넬 (Antonio Coronel) 이었다. 그를 통하여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 , 플라톤의 철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칼빈은 깊은 철학적 배경과 함께 교부 신학적 학문의 기본 줄기를 바로 이곳에서 혹독한 영적 훈련과 함께 얻게 된다. 칼빈은 이 대학에서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옥캄 (William of Ockham), 비엘 (Gabriel Biel) 등 후기 스콜라 주의 신학과 철학을 배웠고 또한 그와 더불어 스콜라적 토론술을 익혔다.
* 칼빈의 몽테규에서의 생활에 있어서 분명 혹독한 훈련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훈련들을 통해 그의 학문적인 능력과 업적이 함께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곳 파리에서 칼빈은 그의 전 생애 동안 계속 되었던 친구들 니콜라스 콥 (Nicollas Cop) 가족 등을 사귈 수 있었다.
1527년 ,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몽테규 대학을 졸업하며 그는 상위 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또한 그로부터 몇 개월 후, 1578년 사제 훈련을 위한 다음 단계로서 신학 연구 자격시험에 통과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18세의 아들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법률가로서 경력을 쌓는 것은 좋은 수입이 보장된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뜻이었다.
1528년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 (University of Orleans) 에 진학한다. 이 대학의 특징은 학문적 명성이 뛰어난 법률가들이 있었다. 여기서 칼빈은 피에르 드 레스트왈르 (Pierre de I'Estoile) 로부터 법학을 배웠고 로트바일(Rottweil) 출신 독일계 희랍철학자 멜키오 볼마르(Melchior Volmar) 라는 인문주의자를 만난다.
칼빈은 볼마르에게 희랍어를 배웠고 루터의 사상을 접하는 기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이곳에서 볼마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546년 칼빈은 그가 쓴 고린도후서에 대한 주석을 이 스승에게 헌정하였다.
1530년 볼마르는 부르쥬 (University of Bourges) 대학으로 가는데, 칼빈도 그를 따라 그 곳에서 법률학 자격증을 획득하고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칼빈은 법률가로서도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다.
1532년 23세의 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 에 관한 주석을 써서 처음으로 학계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 칼빈은 마르슈 대학을 통해 라틴어와 인문학의 기초를, 몽테규에서 엄격한 경건훈련과 깊이 있는 철학과 신학 수업을, 오를레앙 대학과 부르쥬 대학에서 법학과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초기 종교 개혁사상의 기초를 다지게 됨을 볼 수 있다. 칼빈의 깊이 있는 사상은 이러한 학문적 사상적 배경들을 통해서 탄생됨을 알 수 있다.
*** 교회의 개혁을 외치고 부흥을 외친다면, 학업 기간 동안 충실하게 학업에 정진하는 모습이 필요함을 느꼈다.
3. 칼빈이 회심을 한것인가, 결단을 한 것인가
<< 개혁으로 가는 길 1532-1535>>>
특별히 이 기간에 1534년 5월 4일, 칼빈은 그가 받고 있던 교회가 주는 성직록을 포기하였다. 칼빈은 25세가 됨으로 규정에 따라 성직록 수입과 관련된 직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그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였다. 교회 봉록의 포기는 로마교회와의 단절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평가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칼빈을 종교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동기들에 대해서 봉록포기 선언만을 가지고 설명하게에는 불충분하다.
이 기간 중요 관심사는 칼빈의 회심과 시기이다
1) 칼빈의 회심에 대한 두 가지 견해
대부분의 연구가들은 칼빈의 종교개혁에로의 길은 여러 해 동안의 숙성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칼빈이 유일하게 그의 회심에 대해 언급한 갑작스러운 회심 (subita conversione) 와 대립된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1557년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 기록하고 있는데, ' 갑작스런 회심'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나의 아버지는 이미 내가 신학을 공부하도록 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관련을 맺고 있던 법률학이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한다는 것을 보았을 때 이 희망을 빨리 실현하는 방향으로 그의 계획을 변경하였다 ....... 비록 내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섭리의 감추어진 고삐를 가지고 내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 시켰다. 내가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교황적인 미신 신앙에 집요하게 메달려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미 굳어진 나의 생각을 갑작스런 회심을 통하여 고분고분하도록 강요하셨다. ..... 순수한 가르침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회심하였던 것보다 초보자요 신입생에 불과하였던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데는 1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회심의 경험에 관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를 갑작스러운 회심을 통하여 그를 온순하게 강제로 길들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칼빈이 사용하는 온순하도록 강요를 받았다는 표현은 강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복음 앞에 그 복음을 듣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에 놓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리의 빛 앞에 놓여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단하고 순종하게 됨을 의미한다.
- 1533년 니콜라스 콥의 파리 대학 취임 연설문 사건
- 1534년 '마르꾸르의 미사 반대 벽보사건 ' 과 기독교 강요 초판 저술.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의 시발점은 아니다. 제네바와 스트라스 부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을 구체화시키고 정립한 인물이다.
마르꾸르의 미사 반대벽보사건도 칼빈 이전에 종교개혁 운동의 흐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뉘사텔 목사였던 마르꾸르가 1534년 10월 가톨릭 교회의 오류와 미사남용을 비판하는 벽보를 붙였는데 이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란시스 1 세를 자극했다. 그 결과 개혁자들에게 대한 체포와 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 되었다. 칼빈도 당시 가명을 쓰며 친구인 알골름 신부였던 뒤 띠레의 집 등에서 피신하여 프란시스 1 세를 설득하고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 강요의 출판을 서두르게 된다.
신앙의 기본 진리를 가르치려는 본래 적인 목적과 함께 박해 받는 개신교 신자들을 변호하기 위한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칼빈은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우선시 하는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에 반하여 그들의 교리의 오류를 지적하며 성경적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는 기독교교리를 설명하고자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고 1536년 3월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
이 기간의 후반기에 칼빈은 바젤에 머무름.
- 칼빈의 1 차 제네바 거주 1536-1538
콥의 연설문과 미사 반대 벽보사건으로 인해 피신하여 살았던 칼빈은 이제 바젤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스트라스부르로 향한다. 왜 스트라스부르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설명들이 존재하지만,. (쉼, 연구, 등등 ) 그 이유가 무엇이든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 거주하기 위해 출발하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영토분쟁(프란시스 1 세 와 독일황제 카알 5세의 전쟁) 으로 인해 스트라스부르로 가지 못하고 제네바로 우회하게 되고 그 여정이 칼빈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 온다.
칼빈이 제네바를 우회하여 제네바의 한 숙소에 머무르고 있을 때, 개혁자 화렐이 칼빈을 찾아와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에 함께 할 것을 요청했다. (화렐은 기독교 강요을 통해 칼빈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을 보인다) 화렐이 집요한 설득으로 칼빈은 결국 제네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비록 칼빈이 가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제네바는 칼빈의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그러나 칼빈의 제네바 사역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칼빈은 파렐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제네바에 남았지만 정작 시의회에 제대로 소개조차 되지 못했다. (프랑스 사람으로만 소개됨) 그리고 그에게는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이 주어졌다.
제네바시의 특징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시민의식이 강했고. 상업이 발달했던 지역으로 알려져있다. 따라서 다양한 사람들이 제네바시에 거주하거나 제네바시를 왕래하며 개혁자들의 개혁에 부정적인 영향들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교회의 치리권이 교회가 아닌 시의회에 있었다는 것이 개혁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제네바시는 칼빈의 도착하기 전부터 자체적 이미 많은 개혁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소기의 성과들이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교회의 치리권이 시의회가 가지게 되었다. (이오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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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개혁의 촛점이 무엇인가?
칼빈의 개혁이 사회개혁으로만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칼빈의 개혁의 초점은 신앙의 형식적인 개혁이 아니라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실천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 개혁의 중심에는 신앙고백에 대한 교육과 그 고백을 근거로 하는 실천적인 삶이 있다.
사회개혁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생활 그리고 교회의 개혁이 보다 분명한 목표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한 개혁의 정신이 곧 사회개혁과 연결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개혁의 중심이 무엇으로부터 출발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고민을 하게 한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칼빈이 왜 그렇게 강력하게 시의회와 시민들을 향하여 강력한 신앙고백을 요구했을까?
그것은 사회개혁의 시작과 완성은 결국 교회와 신앙의 회복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도 사회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 외침에서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사람만이 희망일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의 빛 아래 보면, 복음 밖에 있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법과 질서까지도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오직 복음의 빛 아래 희망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사회의 질서인가? 아니면 교회, 신앙의 회복이 우선인가?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가 더욱 분명해 진다.
칼빈이 왜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강조했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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