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소망 : “오 십자가여! 그대는 나의 유일한 소망이다”(P.157)
바르트는 신학이 고독, 의심, 시험에 의하여 위협받을 때 우리의 일은 참고 견디는 일이고 이 참고 견디는 일은 다른 해결책으로 대치 될 수 없으며 만약 다른 해결책이 있다면 이 어려움은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이 무가치해 지는 것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어두운 사태 직후에 따라 올 최선의 것에 대한 무관심”(p148)이라고 역설한다. 아마도 이 무관심을 바르트가 가장 경계하는 신학자의 포기를 가져올 것이다.
바르트는 우리에게 허락되고 명령 받은 바는 이 신학의 어려움들을 참고 견딤으로 갖게 될 적극적인 결과를 숙고하는 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참고 견디는 것이 마지막 해결책이 되게 하는 한 우리는 적극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방향에로 갈 수 밖에 없고 이 해결책은 다른 해결책에 의하여 능가될 수도 없고 대치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참고 감당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부과된 짐을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벗어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짐 지우지 아니하고 자신이 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견딘다고 하는 것은 등을 벽에다 대고 버티는 것으로 어떤 값을 지불해서라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바르트는 감당하고 참고 견디는 것은 느슨한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담대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곤경과 억압이 없이는 신학활동이 불가능하며, 이 곤경과 억압 속에서 용기를 발휘할 수 없는 한 신학은 있을 수 없다”(p149-150) 바르트는 이것이 “참고 견디라!”고 하는 말의 이중성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인간의 행적과 말이 보잘것없고 힘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소망이시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불이요, 모든 인간적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배후에는 그의 은혜가 숨겨져 있으며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력하고 흔들릴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옳게 소망하도록 허락받고, 소망할 수 있으며,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은 신학의 대상으로서 신학을 위협한다. 그러나 그가 위협을 가할 때 그는 또한 신학의 소망이다"(p154)
바르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No" 밑에 깊숙이 은폐된 하나님의 "Yes"가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담겨있다. 바르트의 말처럼 "Yes"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셨고 계시하신바 하나님의 세상과의 화해와 하나님의 인간과의 계약이며 골고다에서 정해진 심판의 비밀은 하나님의 버리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인간의 파멸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이다.
바르트는 십자가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는 신학이 이 사실을 확실히 포착할 때에, 이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으로서 또한 영광의 신학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계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대한 소망의 신학이요 궁극적으로 마지막 때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리고 신학과 신학적 행동을 위하여 계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대한 소망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바르트는 “신학자는 자신의 행동이 위협을 받을 때에도 그 속에 감추어진 주님에 대한 소망을 계속 지녀야 하며, 고독, 회의, 시험을 더욱 참고 견뎌야 하기 때문에 그는 “약간 대담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칼빈이 말한 대로 성령의 민첩성, 유쾌함, 영적 기쁨으로 참고 견디며 감당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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