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18:18∼22
피조물 가운데 사람처럼 다양성을 가진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생긴 모습도 다 다르고 신체구조도 다 다릅니다.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다릅니다.
그 가운데서 취미 이야길 해보겠습니다. 바둑, 장기, 낚시, 축구 탁구, 배구, 등산, 골프, 여행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취미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해도 그 도가 지나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바둑에 심취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하루종일 새벽 1시까지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 예배 1부 기도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까만 머리는 까만 알, 흰머리는 흰 알, 의자는 바둑판의 까만 줄로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라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자 바둑 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그는 아멘 대신 "아다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락이나 취미나 여가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상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가슴속에 오래 담고 있으면 안됩니다.
사랑, 동정, 그리움, 아끼는 마음, 이런 것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 둬도 좋지만 미움, 아픔, 원한, 이런 것들은 오래도록 담고 있을 것들이 아닙니다.
본문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날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주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였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교훈은 사람이 지은 죄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용서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다 네 번을 더해 일곱 번 용서할까요?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490번도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는 것도 완전히 다 용서해 버리는 것인데,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없던 일로 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용서는 "없던 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490번을 반복해 "나는 너를 결코 잊을 수가 없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라며 "내 눈에 흙", "내 눈에 흙"을 되뇌어 보십시오. 한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할거야, 없던 일이야"를 490번 반복해 보십시오. 상한 감정과 원한이 눈처럼 녹아져 버릴 것입니다.
1. 용서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가운데 `하말`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가엾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아끼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습니다.
`카파르`라는 단어의 뜻은 덮다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가운데 `아폴뤼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놓아주다, 가게하다, 풀어주다, 보내버리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리조마이`라는 단어의 뜻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락하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용서의 성격이고 내용인 것입니다.
덮어주는 것, 풀어버리는 것, 이유도 까닭은 따지지 않고 허락해 주는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내가 널 용서는 하지만 따질건 따지고 캘 건 캐고 밝힐 건 밝히고 나서 용서해 주겠다"라고 한다면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하는데는 이유도, 조건도, 과거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왜 용서해야 합니까?
본문 23∼35절을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빚을 갚기로 한 기한이 지나자 주인이 종을 불러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자 그는 땅에 엎드려 조금만 참아 달라며 하소연했습니다. 주인은 종의 정상을 참작해 연기가 아니라 탕감을 해 주었습니다.
상상도 못한 은혜를 입은 종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100데나리온을 꿔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친구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이 나쁜 놈, 돈을 꿔갔으면 제 때에 갚아야지 떼먹기로 작정했느냐"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파출소에 신고해 그 사람을 유치장에 가둬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주인에게 전후사정을 알렸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32절 이하를 보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저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어늘 저에게 폭행을 하고 옥에 가두었단 말이냐"라고 했고, 34절을 보면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고 했습니다.
1만 달란트는 현시세로 3조원이고, 100데나리온은 200만원정도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이 사람은 500만원을 받으려다가 3조원을 손해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계산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운 죄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용서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1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3을 보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
죽을 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시체였고 진노의 자식이어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네가 용서받을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는 일에는 이유도 까닭도 구실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호프대학에서 71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과거의 상처나 원한을 기억하도록 했더니,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화를 낼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미시간 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1,3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누군가를 용서한 사람이 한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캐서린 그리핀은"친구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친구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보다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교제하며 사는 사람들이 치명적 병을 이길 가능성이 높고, 더 강하고 탄력적인 면역체계를 갖게 되고 정신건강이 향상되고 사회적 유대가 약한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입니다.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멜른 대학교에서 276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친구와 사귀고 사이좋게 지나는 사람은 감기에 걸릴 확률도 4분의 1이라고 합니다. 276명 콧구멍 속에 감기 바이러스를 떨어트린 후 5일 동안 격리한 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소 친구나 친지들과 사이좋게 지낸 사람들은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뭡니까?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돕는 것이 친구입니다.
마태복음 6:12에서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의 교훈대로 용서해야 합니다. 즉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용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용서해야 내가 받은 용서가 유효하고, 용서해야 내 심령이 편하고, 용서해야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평안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용서와 사랑과 화해는 점점 사라져가고 증오와 갈등과 다툼이 점차 거세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까지 그러면 안됩니다.
심리학에서는 계슈탈트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볼 때 어느 정도 거리에서 바라보느냐 어떤 조명아래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예뻐 보이기도 하고 미워 보이기도 한다는 법칙입니다. 여성의 경우 달빛아래서 보아야 예뻐 보입니다. 단점이 희미한 빛으로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0미터 정도 거리에선 바라보면 0.3정도의 시력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나쁜 점이 가려져 예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위대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법칙입니다. 용서하면 원수가 친구로 변합니다. 적이 동지로 변합니다. 추녀가 미녀로 변합니다.
칼릴지브란이 쓴 "예언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책 속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서 있지는 말라
본문 35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중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중심이란 진실한 마음. 거짓 없는 마음,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 앙심을 품고 한을 품으면 나 자신의 정신 건강과 신앙에 손해가 됩니다. 실상 그 사람은 상관이 없습니다.
용서라는 낱말의 뜻은 말씀드린 대로 이유 없이 허락해주고 무조건 덮어주고 혐의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습니다.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캐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용서합시다. 원한이나 혐의를 가슴에 담아두지 맙시다.
일본에서 노인 3,136명을 추적조사 했습니다.
에히메 대학 의학부가 마쓰야마시 부근의 농촌을 중심으로 60∼84세 노인 3,136명을 4년 반 동안 추적조사 한 결과 보고에 따르면, 남자는 부인이 있는 경우보다 없는 경우가 사망률이 79프로나 높았고, 여자의 경우는 남편이 있는 경우가 없는 경우보다 사망률이 55프로 더 높았습니다.
뭘 말합니까? 서로 돕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아야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괴롭히고 아내가 남편을 괴롭히면 빨리 죽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받는 사람들이 됩시다
용서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사회를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합시다.
용서하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찬송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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