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적극성
고린도전서 13:1~13
오늘은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므로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가 이날 서게 되었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사도베드로를 꼽을 수 있는데 성격적으로 다혈질적이었던 베드로는 겁도 많았고 실수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까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겁이 많던 베드로가 그렇게 담대할 수가 없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충만 하니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루에 3,000명이나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더구나 초대교회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니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람의 소극적인 면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적극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인내합니다. 사랑은 기다리는 일에 지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평 없이 기다립니다.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없이 말썽을 부리는 한 문제아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쫓아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노라 평생에 번 돈을 다 썼습니다. 이웃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느 분이 그 아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 같았으면 잊어 버렸을 꺼예요" 그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형씨 아이 같으면 나도 잊어버렸을 거지만 그 애는 내 아들이잖소?" 그렇습니다. 사랑은 기다리게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인생의 가는 길에는 사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슬픔과 고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질병과 이별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어둡고 위험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사랑은 이 사람의 음침한 골짜기가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사들에게 둘러 쌍인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시몬 베드로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가지고 있던 칼을 들고 맞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 칼을 치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열두 명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힘은 힘으로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힘 대신에 사랑이라는 다른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언제나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때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왜 동조나 히틀러를 죽이지 않으시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북한의 김일성이 그렇게 악을 행하고 죽었으면 그것으로 끝내시지 왜 그 아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세계에서 이름난 독재자로 국민들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시나? 우리는 이런 불의를 볼 때 왜 하나님께서는 행동개시를 안 하시나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은 조급한 인간들의 생각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실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 직장의 동료 직우을 생각합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우리 가슴속에 사랑이 있으면 우리의 삶을 어렵게 하는 사람에게도 너그러움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아버지가 한번은 그의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참고 저 돌대가리한테 똑같은 것을 스무 번도 더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때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아니, 왜요? 제가 열아홉번만 이야기했더라면 제 수고가 모두 헛될뻔 했는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리던 세계적인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붓 한번 안 놀리고 몇 시간을 캔버스 앞에 물끄러미 서 있곤 했다고 합니다. 그의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제게 있어서 가장 오래 멈추고 서 있을 때가 가장 만족한 붓 놀림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래 기다리고 참는데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온유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점심때가 되어 제자들은 동네에 점심준비 하러 가고 예수님 혼자 우물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낮인데 보통 경우로는 물을 길러 사람이 나다니는 시간이 아닌데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물을 좀 줄 수 없느냐? 고 말씀했습니다.
유대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보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동네에서도 평판이 아주 좋지 않은 손가락질 받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보시지 않은 곳에서 이 일에 대하여 이야기가 무성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을 건네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하신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보통 생각으로는 있을 수도 없는 행동을 나무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 사마리아 사람으로 유대인에게서 대우받고 있다고 느끼게끔 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신 모습이십니다. 온유는 친절로 나타납니다. 친절은 행동으로 보이는 사랑으로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였던 윌리엄 텐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항상 내 인생에 있어서 지금 이 시간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 줄 수 있는 친절이 있거나 동료 누구에게나 좋은 일을 해 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해야지 뒤로 미루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을 테니까요" 중요한 말입니다.
요사이 미국에서는 연봉 1,000만불이상 받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옛날에는 연봉 100만불 받는 사람이 몇 사람 없었습니다. 그런데 찰스 슈와브란 사람이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강철 왕이라 불리는 앤드류 카네기가 그에게 연봉 100만불을 준 것은 찰스 슈와브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철강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카네기가 슈와브에게 100만불의 연봉을 준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갈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슈와브에게 경제적인 이득만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은 만족까지도 안겨 주었습니다.
슈와브가 70이 넘었을 때였습니다. 어떤 좋지 않은 사람이 그에게 귀찮은 소송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법정에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슈와브는 재판에서 쉽게 이겼습니다. 자리를 뜨기 전에 몇 마디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재판관에게 요청을 하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의 한말의 내용이 대략 이러 했습니다.
"여기 이 법정에서 나는 노인으로서 내가 처한 곤경의 십중팔구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젊은이 여러분, 나와 같은 곤경에 처하고 싶지 않으시면 냉정하고 차게 나가십시오. 누구에게든 아무에게든 큰 소리로 '안돼요'라고 얼른 말하십시오. 이것만 지키면 평생을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찰스 슈와브는 온유한 성품에 미소를 지으며 잠시 쉬었다가 한마디 더 붙여 말했습니다. "그런데 단 그렇게 하려면 친구도 없고, 고독하고, 아무 즐거움도 없을 것은 각오해야 합니다."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랑은 완전한 답을 기다립니다.
오늘 주신 말씀 9,12절을 보세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왜 일어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왜 불치의 병에 걸리는지, 왜 어려운 일을 당해야 하는지, 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야 하는지, 왜 파산지경에 이르는지, 왜 이 세상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지, 왜 의로운 사람이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왜 사람이 갑작스런 사골 죽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왜?'하고 묻게 됩니다.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확실하고 정확한 해답을 참아낼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이처럼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 많습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습니다. 짧은 것이 있으면 긴 것이 있습니다. 강한 것이 있으면 약한 것이 있습니다. 더운 날이 있으면 추운 날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으면 고통이 있습니다. 밝은 것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이란 것을 제거해 버린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비극일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해가 부족함을 체험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계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가운데서 힘을 얻습니다.
시편 147편 3~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사처를 싸매시는도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 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역시 그의 자녀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까지도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다 해결될 것이라는 축복된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이제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7절에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 하는 사실이 복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만 하더라도 요사이처럼 선명한 유리 거울이 아니고 구리판을 갈아서 만든 거울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어떤 때는 형태만 보이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거울로 보는 것 같다'는 말은 분명치 않고 희미한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분명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1분후에 추락사고를 당할 비행기에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기 때문에 평안하지요. 만일 그것을 안다면 불안해서 살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랑은 성장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을 보세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했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어린 아이 시절보다 축복된 시절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돈 벌어야 하는 것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면 부모에게 요구하면 됩니다. 부모에게 맡겼던 것 이상으로 당당하게 요구 할 권리가 있고 부모는 요구에 응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직 독립할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가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언제나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고 자라나지 못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요, 비극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자신에 신경을 무척 쓰지마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다른 아이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 같은 것을 느끼게 되면 시기심이 나타납니다.
어린아이는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생의 모든 축복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는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장성해서 어른이 되면,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릴만한 일에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면 자신의 개인적인 아픔을 두고 울고 도울 수 있지만 그 보다는 다른 사람의 아픔 때문에 우는 사랑의 눈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바라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일에도 봉사하고 일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매스컴에서는 가정의 달을 마지하여 가정의 참 모습을 여러 면으로 조명해 주는데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 사회도 많이 변했고 성숙한 단계에 이른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정에서 돌보고 키우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린아이를 구라파나 미국 그리고 캐나다에 입양을 시키는 경우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요 죄송한 일이지만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가정에서 내놓고 양자로 입양을 하고, 명량 하게 가정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우리 한국 가정에서부터 장애인 아이를 이양해서 자기가 낳은 자녀들에게 입양한 형제에게 형제의식을 불러주고 그렇게 정성을 다 해서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한국 국민이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일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래서 하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귀한 일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의 표시는 성숙한 사랑이 피우는 꽃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감사합니다'라고 기쁘게 말합니다.
그리고 ,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을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그에게 축복을 보낸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도 뭔가를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봉사에 대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립니다. 사랑은 성숙하게 자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 마지막 절에서 절정을 이루며 이제 까지 말한 사랑에 대해서 가장 온전한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여기 '항상 있을 것인데'라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람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너무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라도 오래지 않아 실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세상의 물질도 어느 날에다 없어지고, 육신의 힘도 점점 약해져 버리고, 아음다움도 사라져 버립니다. 아무리 화려했던 일생도 끝이 있기 마련이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던 인기도 시들 때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항상 있을 것,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영원히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것 세 가지를 말씀했는데 그것이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입니다.
믿음이 없는 인생은 어려운 행로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신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용기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이웃을 의심과 조소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삶의 의욕을 상실합니다. 삶의 의미 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삶의 회초리가 사정없이 후려쳐도 그 어떤 것에도 굳은 신념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칠 때 더 높은 힘에 매달리게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나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멀리서가 아니라 가까이 에서, 큰 일만 아니라 작은 일까지도 간섭하시고 도와주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소망 또한 항상 있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소망에 젖어서 단지 바라는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크고, 강하고, 튼튼한 것입니다. 소망은 생각하고 일하도록 사람에게 힘을 안겨줍니다. 사람들이 낙심할 때, 인생이 캄캄하게 느껴 질 때, 모든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때 상황을 어렵게만 보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에 '이제는 끝장이다'고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에게는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망스러운 환경에 직면하지만 소망은 폭풍우 속에서 햇살을 봅니다. 캄캄하게 구름이 덮인 하늘에서 별 하나를 찾아냅니다. 그 별이 바로 소망의 별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눈을 주셨습니다. 우리 앞날에 더 밝은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반짝이는 촛불처럼 소망은 우리의 길을 밝히고 도와주며 어두움이 짙을수록 소망은 더욱더 밝은 빛을 발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세 번째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가 아니라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뜻깊은 성령강림주일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해서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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