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적 인생관은
사도행전 20:17-24
이 땅위에는 60억이 넘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크게 나누면 두 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과 사명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차이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명(使命)이 무엇입니까? 심부름 받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런 인생관을 우리는 사명적 인생관이라고 합니다. 오늘 사명적 인생관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영어로 MISSION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말 MISSIO에서 유래된 것인데 '보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명감이 있을 때 이 사명감이 우리를 위대하게, 성실하게, 용감하게, 부지런하게, 진지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사명감을 느낄 때 또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말하는 것이 달라지고, 움직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심부름에는 심부름을 보낸이가 있고, 심부름을 받은 사람이 있고, 심부름의 목적과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21세기의 한국에 심부름꾼으로 보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 한국에 보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Kal Hilthey)는 "인간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 언제 입니까? 결혼한 날입니까? 첫아이를 낳은 날입니까? 고시에 합격한 날입니까? 천만금을 모은 날입니까?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은 내 사명을 자각한 날입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위하여 평생을 바친 리빙스턴(Livingstone)은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집념이 있고 열의가 있습니다. 이것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요지부동한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세상을 훌륭하게 산 사람들을 보세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훌륭한 일을 하게 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생의 어느 시기에 어떤 결정적 기회에 인생의 확고한 사명을 자각했습니다.
물론 사명을 깨닫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훌륭한 책을 읽다가 사명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다가 사명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는 역사의 결정적 사건을 보고 사명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는 생활의 절실한 체험을 겪고 사명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에이브라함 링컨은 뉴 오리엔스의 노예매매 시장에서 노예들이 백인에게 매매되는 처참한 비극을 보는 순간 이렇게 외쳤습니다. "언제가 때가 오면 내가 저놈의 나쁜 제도를 힘껏 때려부수겠다" 이 충격과 의분과 결심이 에이브라함 링컨으로 하여금 후일에 노예 해방의 대 사역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사명에 눈이 뜨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사명을 깨닫는 것은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사명감은 위대한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자각해야 합니다.
사명감 없이 사는 사람은 목표가 없이 여행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이 사명감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그것을 실현하려고 주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타락하기 쉽고,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방안에 등불이 꺼지면 그 방안을 캄캄해집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사명감의 등불이 꺼지면 우리의 삶은 낮은 차원으로 전락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고난을 뚫고 나아가는 용기, 가난에 도전하는 의지,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씩씩한 기상, 한번세운 목표를 끝까지 추구하는 지구력,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굳은 정신, 7전 8기하는 끈기 이 모두가 마음속에 사명감이 확고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슴속에 사명감의 샘물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시인 쉴러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거나 비열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품은 뜻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인생에서 꼭 이루고자 하는 뜻을 품습니다.
그러면 사명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어떤 자세로 삽니까?
첫째, 높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서원이란 마음속에 어떤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꼭 이루어 놓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이 소원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높으냐 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의 그릇과 그릇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뜻을 세우되 큰 뜻을 세우고 옳은 뜻을 세워야 합니다. 세상에는 뜻을 세우되 나쁜 뜻을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뜻이 간절하면 반드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생깁니다. 한문에는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력이 한 목표에 집중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되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뜻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작심삼일로는 절대로 인생의 큰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만이 바다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쉬임 없이 걷는 사람만이 목적지에 도달 할 수가 있습니다. 한 목표에 집중된 힘만이 큰일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집중력처럼 무서운게 없습니다. 태양광선을 집중시켜 보세요. 물이 끓고 나무가 탑니다.
중국 한나라때 이광(李廣)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산 속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그는 활을 꺼내서 전신의 힘을 다해서 호랑이를 쏘았는데 화살이 호랑이에게 명중했습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가 화살에 맞았는데도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광 장군은 가까이 가보니까 호랑이가 아니고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였습니다. 그는 바위를 호랑이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광 장군이 쏜 화살은 바위 깊숙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쏜 화살이 바위를 뚫을 만큼 힘이 강한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삼아 다시 화살을 꺼내서 그 바위를 쏘았습니다. 아무리 쏘아도 화살은 바위에 박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적 집중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화살을 쏘았을 때는 호랑이로 알고 결사적 정신으로 쏘았기 때문에 화살이 바위에 박혔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쏜 화살들은 결사적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무리 쏘아도 바위에 박힐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집중된 정신력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저마다 제 처지에 맞게 높은 뜻, 올바른 뜻을 세워야 합니다. 인생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분투 노력할 때 사는 보람이 있고, 삶의 충실 감이 있습니다.
둘째, 높은 뜻을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을 기르는 것, 실력 양성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목표를 세워 놓고 사명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없을 때는 한낱 허망한 공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상(理想)과 공상(空想)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상은 실현의 가능성이 있는 목표요, 공상은 실현의 가능성이 없는 목표입니다. 힘이 없으면 품었던 꿈이 물거품처럼 무너지고 맙니다. 실현의 가능성이 없는 꿈은 망상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세상에 힘이 귀합니다. 힘이 만사를 결정합니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일은 힘의 열매요, 힘의 산물입니다.
일과 힘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은 힘의 함수입니다. 힘이 크면 큰 일을 할 수가 있고, 힘이 작으면 작은 일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일은 힘의 나무에 달리는 열매입니다.
큰 일을 하려면 큰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을 기르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작은 힘으로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왜 아직 우주선을 만들지 못합니까? 아직은 우주선을 만들만한 과학력과 기술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이 나라의 부정부패를 없애지 못합니까? 그것을 없앨 만한 국민의 도덕력과 양심의 힘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힘을 길러야 합니다.
셋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고 힘을 기르는 까닭은 결국 보람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뜻과 힘의 목표는 일에 있습니다. 일은 나무의 열매와 같습니다. 나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지식의 열매는 행동이요, 사상의 목표는 실천이요, 뜻과 힘의 결론은 일에 있습니다. 뜻이 뜻만으로 머물고, 힘이 힘만으로 머믄다면 뜻과 힘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습니까? 뜻을 세우는 것도, 힘을 기르는 것도, 모두다 우리의 발전과 사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서 가치가 판단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 행동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근본목적은 보람된 일을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조용히 바라다보고 가만히 앉아 사색만 하는 소위 적정주의(Quietism)의 철학을 버려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실천과 행동 속에서 찾는 활동주의(Dynamism)의 철학을 우리 인생관으로 삼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앉아있는 종교가 아니라 일어나 힘써 일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중요한 문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문제의식이 분명할 때 그것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의식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의 해결이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책임의식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확고한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의 사명리라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지혜와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확고한 사명을 발견할 때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지고, 행동하는 원칙이 뚜렷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변하게 되는 것은 사명감의 자각입니다. 사명적 인생관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을 씩씩하게 살아갈 수가 있고, 보람있게 살아 갈 수가 있고, 의미 있게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명적 인생관은 어떤 것입니까? 사명적 인생관을 가질 때 차원이 높은 삶을 살아갑니다. 차원이 높은 삶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봉사의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주고받는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개인주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통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혼동하기 쉬운데 이것은 완전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내 욕심과 이익밖에 모르는 탐욕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익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남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집단이나 전체보다도 개인의 성격과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 보다 높은 차원의 삶입니다.
그리고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려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합리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건전한 생활원리입니다.
'그런데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나, 합리주의 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인생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을 생각을 떠나서 될수록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지 않고 상대방에게 자꾸만 주는 태도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봉사주의 인생관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와는 정반대인 이타주의의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주고받는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줄 때 받기를 원합니다. 또 받을 생각을 하고 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준 만큼 받지 못하면 원망과 섭섭한 마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봉사주의자는 주려고 하고 주는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받겠다는 생각을 떠나서 자꾸만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원과 수준이 높은 인생관입니다. 봉사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원해서 보수를 바라지 않는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강요당해서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봉사가 아닙니다. 가령 무슨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 벌로 봉사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봉사가 아닙니다. 일의 질이 다릅니다. 삯을 받고 일하는 것도 봉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삯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일도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 없이 일하는 자원봉사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당 관리를 위한 자원봉사대가 일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보는 사람이 은혜가 됩니다.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할 수 없지만 손이 미치는 곳에는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 예배당에 입당한지 일년이 지났지만 입당할 때보다 더 아름답게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원봉사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쏟아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자원과 자의에 의해서 일하는 것을 봉사라고 합니다.
봉사는 보수를 바라지 않습니다. 보수를 바라면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봉사는 봉사 그 자체가 보수요 기쁨입니다. 봉사는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행동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위대한 봉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봉사정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위대합니다. 봉사정신은 인물을 평가하는 척도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봉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야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내 이익과 탐욕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자는 봉사 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봉사하려면 위대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봉사를 하려면 여력이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의 여유, 돈의 여유, 지식의 여유, 능력의 여유, 힘의 여유,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남에게 많이 주는 사람입니다.
많이 주면 줄수록 위대해 집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6-28).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봉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남에게 봉사를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남을 봉사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제물로 바치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서 봉사주의의 위대한 정신을 발견합니다. 보통 사람은 남이 나에게 섬기고, 봉사하고, 대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반대의 원리와 입장을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남을 섬기고, 남을 대접하고, 남에게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봉사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남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최대의 겸손과 최고의 봉사를 의미합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처럼 너희도 이 민족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봉사를 최고의 차원, 최상의 원리로 보았습니다.
남에게 준다는 것은 한없이 축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나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까? 주는데 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는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 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주는 것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주는 사람은 교만을 일으키고 받는 자는 모욕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줄 때는 준다는 생각을 떠나서 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돈을 주건, 지식을 주건, 말씀을 주건, 주는 사람은 의식무의식 중에 우월감에 빠지고, 교만한 마음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주었다는 기억을 하지 않고 주어야 합니다. 주었으면 잊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는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프랑스 말에 nofless oflige란 말이 있습니다.
고귀한 신분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그 신분에 합당한 덕을 구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권에는 사명이 따르고, 신분에는 의무가 수반됩니다. 남보다 뛰어나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은 의무와 책임과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적은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지식이 적은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봉사해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을 못 가진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공헌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 없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헌신해야 합니다. 특권이 부여된 사람은 대중을 위하여 무엇인가 이바지해야 합니다.
미국 알링톤 국립 묘지의 푸른 언덕에서 묻혀 있는 젊은 대통령 J.F 케네디는 1961년 마사추세츠주 상원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훗날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야 합니다. 그때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 네 가지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당신은 용감했습니까? 둘째 당신은 총명했습니까? 셋째 당신은 성실했습니까? 넷째 당신은 헌신했습니까? 정말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용감하게 살아야 하고, 총명하게 살아야 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헌신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헌신은 봉사와 꼭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스스로 생각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바칠까?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직장을 위해서, 내 교회를 위해서, 내 민족을 위해서, 내 조국을 위해서 또 인류와 세계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봉사해야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70,80 살다가면서 과연 무엇을 남겨 놓고 갑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네게 이런 심부름을 시켰는데 세상에 무엇을 남겨 놓고 왔느냐 물으시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올 때는 빈손으로 왔지만 갈 때는 무엇인가 남겨 놓고 가야 합니다. 허송세월은 인간의 최대의 수치입니다. 무위도식은 인간으로서 가장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왔다가 가는 이 세상 무엇인가 보람있는 것, 가치 있는 것, 영광된 것, 의미 있는 것을 남겨놓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남에게 주는 생활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훈훈한 미소와 따뜻한 말을 정다운 표정을 주며 살아갑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무엇을 내놓으시겠습니까?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20:17-24
이 땅위에는 60억이 넘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크게 나누면 두 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과 사명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차이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명(使命)이 무엇입니까? 심부름 받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런 인생관을 우리는 사명적 인생관이라고 합니다. 오늘 사명적 인생관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영어로 MISSION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말 MISSIO에서 유래된 것인데 '보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명감이 있을 때 이 사명감이 우리를 위대하게, 성실하게, 용감하게, 부지런하게, 진지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사명감을 느낄 때 또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말하는 것이 달라지고, 움직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심부름에는 심부름을 보낸이가 있고, 심부름을 받은 사람이 있고, 심부름의 목적과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21세기의 한국에 심부름꾼으로 보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 한국에 보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Kal Hilthey)는 "인간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 언제 입니까? 결혼한 날입니까? 첫아이를 낳은 날입니까? 고시에 합격한 날입니까? 천만금을 모은 날입니까?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은 내 사명을 자각한 날입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위하여 평생을 바친 리빙스턴(Livingstone)은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집념이 있고 열의가 있습니다. 이것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요지부동한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세상을 훌륭하게 산 사람들을 보세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훌륭한 일을 하게 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생의 어느 시기에 어떤 결정적 기회에 인생의 확고한 사명을 자각했습니다.
물론 사명을 깨닫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훌륭한 책을 읽다가 사명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다가 사명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는 역사의 결정적 사건을 보고 사명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는 생활의 절실한 체험을 겪고 사명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에이브라함 링컨은 뉴 오리엔스의 노예매매 시장에서 노예들이 백인에게 매매되는 처참한 비극을 보는 순간 이렇게 외쳤습니다. "언제가 때가 오면 내가 저놈의 나쁜 제도를 힘껏 때려부수겠다" 이 충격과 의분과 결심이 에이브라함 링컨으로 하여금 후일에 노예 해방의 대 사역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사명에 눈이 뜨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사명을 깨닫는 것은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사명감은 위대한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자각해야 합니다.
사명감 없이 사는 사람은 목표가 없이 여행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이 사명감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그것을 실현하려고 주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타락하기 쉽고,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방안에 등불이 꺼지면 그 방안을 캄캄해집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사명감의 등불이 꺼지면 우리의 삶은 낮은 차원으로 전락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고난을 뚫고 나아가는 용기, 가난에 도전하는 의지,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씩씩한 기상, 한번세운 목표를 끝까지 추구하는 지구력,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굳은 정신, 7전 8기하는 끈기 이 모두가 마음속에 사명감이 확고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슴속에 사명감의 샘물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시인 쉴러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거나 비열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품은 뜻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인생에서 꼭 이루고자 하는 뜻을 품습니다.
그러면 사명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어떤 자세로 삽니까?
첫째, 높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서원이란 마음속에 어떤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꼭 이루어 놓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이 소원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높으냐 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의 그릇과 그릇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뜻을 세우되 큰 뜻을 세우고 옳은 뜻을 세워야 합니다. 세상에는 뜻을 세우되 나쁜 뜻을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뜻이 간절하면 반드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생깁니다. 한문에는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력이 한 목표에 집중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되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뜻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작심삼일로는 절대로 인생의 큰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만이 바다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쉬임 없이 걷는 사람만이 목적지에 도달 할 수가 있습니다. 한 목표에 집중된 힘만이 큰일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집중력처럼 무서운게 없습니다. 태양광선을 집중시켜 보세요. 물이 끓고 나무가 탑니다.
중국 한나라때 이광(李廣)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산 속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그는 활을 꺼내서 전신의 힘을 다해서 호랑이를 쏘았는데 화살이 호랑이에게 명중했습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가 화살에 맞았는데도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광 장군은 가까이 가보니까 호랑이가 아니고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였습니다. 그는 바위를 호랑이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광 장군이 쏜 화살은 바위 깊숙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쏜 화살이 바위를 뚫을 만큼 힘이 강한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삼아 다시 화살을 꺼내서 그 바위를 쏘았습니다. 아무리 쏘아도 화살은 바위에 박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적 집중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화살을 쏘았을 때는 호랑이로 알고 결사적 정신으로 쏘았기 때문에 화살이 바위에 박혔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쏜 화살들은 결사적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무리 쏘아도 바위에 박힐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집중된 정신력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저마다 제 처지에 맞게 높은 뜻, 올바른 뜻을 세워야 합니다. 인생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분투 노력할 때 사는 보람이 있고, 삶의 충실 감이 있습니다.
둘째, 높은 뜻을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을 기르는 것, 실력 양성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목표를 세워 놓고 사명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없을 때는 한낱 허망한 공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상(理想)과 공상(空想)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상은 실현의 가능성이 있는 목표요, 공상은 실현의 가능성이 없는 목표입니다. 힘이 없으면 품었던 꿈이 물거품처럼 무너지고 맙니다. 실현의 가능성이 없는 꿈은 망상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세상에 힘이 귀합니다. 힘이 만사를 결정합니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일은 힘의 열매요, 힘의 산물입니다.
일과 힘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은 힘의 함수입니다. 힘이 크면 큰 일을 할 수가 있고, 힘이 작으면 작은 일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일은 힘의 나무에 달리는 열매입니다.
큰 일을 하려면 큰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을 기르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작은 힘으로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왜 아직 우주선을 만들지 못합니까? 아직은 우주선을 만들만한 과학력과 기술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이 나라의 부정부패를 없애지 못합니까? 그것을 없앨 만한 국민의 도덕력과 양심의 힘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힘을 길러야 합니다.
셋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고 힘을 기르는 까닭은 결국 보람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뜻과 힘의 목표는 일에 있습니다. 일은 나무의 열매와 같습니다. 나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지식의 열매는 행동이요, 사상의 목표는 실천이요, 뜻과 힘의 결론은 일에 있습니다. 뜻이 뜻만으로 머물고, 힘이 힘만으로 머믄다면 뜻과 힘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습니까? 뜻을 세우는 것도, 힘을 기르는 것도, 모두다 우리의 발전과 사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서 가치가 판단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 행동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근본목적은 보람된 일을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조용히 바라다보고 가만히 앉아 사색만 하는 소위 적정주의(Quietism)의 철학을 버려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실천과 행동 속에서 찾는 활동주의(Dynamism)의 철학을 우리 인생관으로 삼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앉아있는 종교가 아니라 일어나 힘써 일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중요한 문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문제의식이 분명할 때 그것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의식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의 해결이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책임의식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확고한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의 사명리라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지혜와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확고한 사명을 발견할 때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지고, 행동하는 원칙이 뚜렷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변하게 되는 것은 사명감의 자각입니다. 사명적 인생관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을 씩씩하게 살아갈 수가 있고, 보람있게 살아 갈 수가 있고, 의미 있게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명적 인생관은 어떤 것입니까? 사명적 인생관을 가질 때 차원이 높은 삶을 살아갑니다. 차원이 높은 삶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봉사의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주고받는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개인주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통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혼동하기 쉬운데 이것은 완전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내 욕심과 이익밖에 모르는 탐욕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익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남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집단이나 전체보다도 개인의 성격과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 보다 높은 차원의 삶입니다.
그리고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려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합리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건전한 생활원리입니다.
'그런데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나, 합리주의 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인생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을 생각을 떠나서 될수록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지 않고 상대방에게 자꾸만 주는 태도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봉사주의 인생관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와는 정반대인 이타주의의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주고받는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줄 때 받기를 원합니다. 또 받을 생각을 하고 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준 만큼 받지 못하면 원망과 섭섭한 마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봉사주의자는 주려고 하고 주는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받겠다는 생각을 떠나서 자꾸만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원과 수준이 높은 인생관입니다. 봉사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원해서 보수를 바라지 않는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강요당해서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봉사가 아닙니다. 가령 무슨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 벌로 봉사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봉사가 아닙니다. 일의 질이 다릅니다. 삯을 받고 일하는 것도 봉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삯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일도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 없이 일하는 자원봉사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당 관리를 위한 자원봉사대가 일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보는 사람이 은혜가 됩니다.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할 수 없지만 손이 미치는 곳에는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 예배당에 입당한지 일년이 지났지만 입당할 때보다 더 아름답게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원봉사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쏟아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자원과 자의에 의해서 일하는 것을 봉사라고 합니다.
봉사는 보수를 바라지 않습니다. 보수를 바라면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봉사는 봉사 그 자체가 보수요 기쁨입니다. 봉사는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행동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위대한 봉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봉사정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위대합니다. 봉사정신은 인물을 평가하는 척도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봉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야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내 이익과 탐욕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자는 봉사 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봉사하려면 위대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봉사를 하려면 여력이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의 여유, 돈의 여유, 지식의 여유, 능력의 여유, 힘의 여유,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남에게 많이 주는 사람입니다.
많이 주면 줄수록 위대해 집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6-28).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봉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남에게 봉사를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남을 봉사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제물로 바치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서 봉사주의의 위대한 정신을 발견합니다. 보통 사람은 남이 나에게 섬기고, 봉사하고, 대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반대의 원리와 입장을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남을 섬기고, 남을 대접하고, 남에게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봉사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남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최대의 겸손과 최고의 봉사를 의미합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처럼 너희도 이 민족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봉사를 최고의 차원, 최상의 원리로 보았습니다.
남에게 준다는 것은 한없이 축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나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까? 주는데 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는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 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주는 것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주는 사람은 교만을 일으키고 받는 자는 모욕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줄 때는 준다는 생각을 떠나서 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돈을 주건, 지식을 주건, 말씀을 주건, 주는 사람은 의식무의식 중에 우월감에 빠지고, 교만한 마음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주었다는 기억을 하지 않고 주어야 합니다. 주었으면 잊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는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프랑스 말에 nofless oflige란 말이 있습니다.
고귀한 신분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그 신분에 합당한 덕을 구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권에는 사명이 따르고, 신분에는 의무가 수반됩니다. 남보다 뛰어나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은 의무와 책임과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적은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지식이 적은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봉사해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을 못 가진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공헌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 없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헌신해야 합니다. 특권이 부여된 사람은 대중을 위하여 무엇인가 이바지해야 합니다.
미국 알링톤 국립 묘지의 푸른 언덕에서 묻혀 있는 젊은 대통령 J.F 케네디는 1961년 마사추세츠주 상원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훗날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야 합니다. 그때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 네 가지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당신은 용감했습니까? 둘째 당신은 총명했습니까? 셋째 당신은 성실했습니까? 넷째 당신은 헌신했습니까? 정말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용감하게 살아야 하고, 총명하게 살아야 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헌신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헌신은 봉사와 꼭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스스로 생각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바칠까?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직장을 위해서, 내 교회를 위해서, 내 민족을 위해서, 내 조국을 위해서 또 인류와 세계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봉사해야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70,80 살다가면서 과연 무엇을 남겨 놓고 갑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네게 이런 심부름을 시켰는데 세상에 무엇을 남겨 놓고 왔느냐 물으시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올 때는 빈손으로 왔지만 갈 때는 무엇인가 남겨 놓고 가야 합니다. 허송세월은 인간의 최대의 수치입니다. 무위도식은 인간으로서 가장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왔다가 가는 이 세상 무엇인가 보람있는 것, 가치 있는 것, 영광된 것, 의미 있는 것을 남겨놓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남에게 주는 생활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훈훈한 미소와 따뜻한 말을 정다운 표정을 주며 살아갑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무엇을 내놓으시겠습니까?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까?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으로 얻는 구원(마 9:18-26) / 이수영 목사 (0) | 2021.12.14 |
---|---|
무엇을 바라고 믿는가?(골1:9-23 ) / 이수영 목사 (0) | 2021.12.14 |
사명 위해 삽시다(행 20:17-24 ) / 박조준 목사 (0) | 2021.12.14 |
사랑의 적극성(고전 13;1-13) / 박조준 목사 (0) | 2021.12.14 |
놀라운 선물(엡 2:8-9 ) / 이철신 목사 (0) | 2021.12.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