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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위해 삽시다(행 20:17-24 )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4.

사명 위해 삽시다.

사도행전 20:17~24

 

오늘을 포함해서 제가 갈보리교회 담임목사로서 주일 설교할 시간이 세번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제가 갈보리교회 뿐만 아니라 평생 목회하면서 말씀한 내용을 요약해서 세시간 동안에 말씀을 드리려고 생각합니다.

 

조금전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청해놓고 자기가 그렇게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 당한 일을 말씀하면서 "지금 내가 심령의 메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성령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각도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과 내가 주 예수께로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을 여기지 않겠습니다." 라는 아주 비장한 각오를 피력한 장면입니다.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 이것은 바울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다 이 세상에 올 때 그냥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는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즉 '사명적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무의미하게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부름을 맡은 사람입니다. 큰 심부름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작은 심부름을 하는 사람도 있고, 특별한 심부름을 하는 사람도 있고, 각자 맡은 심부름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 심부름은 다 하나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어느 심부름은 중요하고 어느 심부름은 덜 중요하다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사명'이라는 말은 '심부름 사(使)자에 목숨명(命)자' 붙입니다. '심부름하는 생명'이다. 그리고 영어로 '사명'이라는 말을 쓸 때는 몇 가지 말을 쓰는데, 'calling' 이라는 말을 씁니다. '부른다'는 뜻입니다. 혹은 'vocation' 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도 라틴말 'vocare' 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로 '부른다'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혹은 'mission'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보낸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성전에 청년 이사야가 나가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는 순간 자기 입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것을 깨닫고 '바로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이렇게 더러운 입이 거룩한 하나님을 뵈었으니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스랍중의 하나가 핀 숯불을 가지고 내려와서 입술을 지지면서 '네 입술이 다 정해졌다' 말하자면 죄 사하는 표징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누가 갈꼬? 누구를 보낼꼬?" 그때 청년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주세요."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르십니다. '누구를 보낼까? 누가 나를 위해서 갈까?' 그럴 때 우리는 대답하여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이것을 소위 'calling' 과 'response' 라는 말을 쓰는데 하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response' 하나님께 응답을 하게되면 하나님이 이 응답에 대해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이것을 영어로 말하면 'ability'라는 말을 쓰는데 'response' 라는 말과 'ability'라는 말을 붙여놓으면 'responsibility' 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책임집니까? 주인이 책임을 집니다. 손님은 책임이 없습니다. 영국속담에 "주인 한 사람의 눈이 종 열 사람의 눈보다 밝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의 눈의 시력은 1.5이고 종의 시력은 0.2 입니까? 아닙니다. 주인도 1.5이고 종도 1.5입니다. 주인은 책임을 가지고 보는 것이고 종은 책임 없이 보니까 볼 줄 모릅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사는게 필요합니다. 어떤 못난 사람은 자기 책임을 조상에게 돌립니다. '나는 조상 잘못 만나서 이 모양 이 꼴로 산다' 세상에 그렇게 못난 사람은 없습니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 절대로 조상이 책임지는 것 아니고 남이 책임지는 것 아닙니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 가족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 직장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 교회는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 나라는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제 나흘후면 이 나라를 책임지고 일볼 대통령을 선거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나섰습니다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슨 당이냐 어떤 이해관계냐를 초월해서 누가 과연 이민족 이 국가를 책임지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봐서 찍어야 합니다. 당리 당략에 의해서 하다가는 언제나 과거의 이런 불상스러운 일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과거 대통령에게 얼마나 실망을 많이 했습니까? 앞으론 이런 실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이 나라 이 민족을 책임질 수 있는 대통령을 택한다고 하면 이 나라와 이 민족이 번영일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 민족은 우수한 민족입니다. 대통령 잘 뽑아 정말 나라를 바로 정치하게 되면 세계에 일류 민족이 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정치를 이렇게 엉망으로 해놓아도 이만큼 살아나가는 것은 이 백성이 이렇게 똑똑하고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정말 후회스럽지 않은 훌륭한, 책임질 수 있는 대통령을 선택했으면 합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적극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많지마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적극적인 사람, 다른 하나는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느냐 적극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을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또 성경에 보아도,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랬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소위 'self-suggestion' 이라고 하는데 자기암시라고 합니다.

 

자기암시가 가령 '된다. 할 수 있다' 하면 되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암시가 '안 된다, 못한다, 끝났다, 망했다' 하면 안되고, 못하고, 끝나고, 망한다고 합니다. 자기 암시가 중요합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4장 13절에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상황이 다른 것 아닙니다. 조건이 다른 것 아닙니다. 모든게 똑 같은 상황, 똑 같은 조건인데 믿음을 가진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과 적극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의 삶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를 위해서 공헌한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다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뭐냐 "도전과 응전의 역학관계이다" 우리에게 도전이 오는데 적극적인 반응을 하느냐, 소극적으로 반응을 하는냐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하면 승리하고, 소극적으로 하면 실패한다' 그 말입니다. 상황이 다른 것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지요. 이스라엘 민족을 보게되면 애굽을 떠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 나가는 과정이 꼭 쉽지마는 않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 12지파에서 한사람씩 젊은 사람 열두 명을 뽑아 '약속의 땅을 미리 좀 들어가 보아라. 내가 40일간의 기한을 주니까 미리 몰래 밀사로, 스파이로 들어가서 상황을 잘 살펴보고 거기가 좋은지 나쁜지 보고 올 때는 그냥 오지말고 견본을 가지고 와라.' 그래서 이 사명을 받든 사람들은 몰래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40일 동안 여기저기 다 보고 나올 때에 여러분 아시는 대로 포도도 자기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석류도 따 가지고 나오고 그래서 기대에 찬 많은 사람들이 궁금한 생각으로 거기 갔던 사람들의 보고를 듣기 위해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보고를 하는데 "여러분, 거기에 들어가 보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런 광야하고는 상상도 못할 땅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아름다운 포도가 열리고 이런 아름다운 석류가 열리는 땅 아닙니까?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좋기는 하지마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땅은 못됩니다. 가보니까 성곽이 높고 견고하고, 산골짜기가 깊고 험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을 보니까 키가 장대한데 거인입니다. 아마 그들이 보면 우리를 메뚜기로 볼 겁니다.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이런 보고를 한사람이 열두 사람 중에 열 사람이 보고했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을 때 국민들이 얼마나 기가 막혀 했겠습니까? "야, 우리는 약속의 땅이라고 하여 좋은 희망을 가지고 왔는데, 먼저 들어가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땅은 못 들어 갈 땅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어떻게 하나? 저 모세 사기꾼이구나 새 지도자 뽑아서 돌아가자" 또 어떤 사람은 "이제 이만큼 와서 갈 수도 없고, 돌아 갈 수도 없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나…"라는 생각에 털썩 주저앉아서 밤새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미처 보고하지 않았던 사람이 두 사람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안타까워서 옷을 찢으면서 보고했습니다. "여러분, 잠시만 들으세요. 조금 전에 보고한 분들은 그저 본 그대로 느낀 대로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지 약속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거기 성곽이 높고 견고한 것도 사실입니다. 거기 아낙자손이 키가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들을 지키던 신이 이미 떠난 지 오랩니다. 저희는 우리의 밥입니다. 겁내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앞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갑시다." 자 그래서 많은 사람들 대다수의 의견이 맞다고 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약속의 땅의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듣고 "그렇다. 우리는 저분들의 보고를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하고 따르던 사람들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마는 약속의 땅에 다 들어갔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은 그 열두 사람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 기억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사람도 기억합니까? 누구 기억하는 분계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이 사람들의 이름이 똑같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도 안 합니다. 왜, 역사를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 아무런 공헌을 한 것이 없고 오히려 낙심만 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전진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은 실패하고 후퇴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한국사람에게 나쁜 일 많이 했지요? 하여간 한국사람들이 가령 제일 치욕스런 말을 할 때 '내 성을 간다' 그러잖아요. 일본 시대 때 우리 성을 갈았습니다. 저도 지금 '박'씨를 되찾았습니다마는 일본시대때 제 성이 '아라이' 였습니다. 일본사람이 바꿨습니다. 성을 갈았습니다. 말을 빼앗아 갔습니다. 좋은 건 다 가지고 갔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조선 총독부가 있던 중앙청자리에 거기 '조선역사편찬회'라는 소위 어용기관이 있었는데 여기서 하는 일은 다른 거 아니고 한국국민 조선사람들의 의식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느끼지 않게 부정적으로 해서 한국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아, 우리 한국 사람들은 무능하다. 한국 사람들은 게으르다. 한국 사람들은 더럽다. 한국 사람들은 형편없다. 한국 사람들은 홑바지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 좋게, 일본 사람은 훌륭하게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어릴때만 하더라도 소풍을 가면, 산천이 좋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도 '야, 외국 같다. 외국 같다' 이런 맘이 들었습니다. 내 나라의 좋은 걸보고도 좋다고 하지 않고 외국 같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이것이 일본 사람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말하자면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즉 호남과 영남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역사적으로 있잖아요. 그건 누가 시킨것이냐면 일본사람들이 시켰습니다. 호남에 가서는 '너, 영남사람들이 호남사람들을 사람으로 보는 줄 아느냐. 정신차려' 영남에 가서는 '호남사람들이 너희에게 한이 맺혀서 원수 갚으려고 그래' 그래서 딱 원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호남과 영남을 갈라놓았습니다. 이거 정친 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호남과 영남이 갈라질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거다 일본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들에게는 아예 자손이 망하라고 "야, 이 망할 자식, 망할 자식, 야, 이 빌어먹을 자식, 빌어먹을 자식" 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어느 엄마가 자기 자식이 망하기를, 빌어먹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입버릇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그래도 망하지 않고, 빌어먹지 않았는데 아이들 코를 풀 때는 본능적으로 "야, 흥해라, 흥해라"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흥해야지 망하면 되겠습니까? 말 한마디를 해도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야지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인 사고를 아주 강조했던 노만 빈센트필 박사가 그런 말을 했어요. "만사는 마음 가지기에 달려있다" 상황이 다른 거 아닙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반응하느냐, 소극적으로 반응하느냐, 내 마음이 어떠냐가 중요합니다. 아마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거예요. 미국에 애리조나에 가면 세계적인 관광지 그랜드캐년이 있잖아요. 대협곡 지각의 변동으로 땅이 뚝 꺼져서 뭐 100m 이상 꺼져서 별천지가 이루어 졌는데 얼마나 긴지 450~500km가 되어서 거기를 한번 다 구경하려면 경비행기를 타던지 헬리콥터를 타고야 볼 수 있는데 거기 서서 보는 사람들이 다 입이 벌어져서 좀 과장되게 말씀하시는 목사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하여간 그랜드캐년에 가면 입이 짝짝 벌어지는데 그 벌어진 입을 닫는 데만 30분 걸린다'고 그러더군요. 미국의 세사람이 구경을 갔습니다. 한 분은 목사, 또 한 분은 그림잘 그리는 화가, 그리고 다른 한사람은 소치는 카우보이가 갔는데 목사가 보더니 '아, 하나님의 솜씨 놀랍구나' 하면서 감탄을 하더랍니다. 옆에서 보던 화가의 말이 '아, 이거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구나' 그러면서 감동을 하더랍니다. 옆에서 보던 카우보이의 말이 '야, 여기서 소를 놓치면 못 잡겠다' 그러더랍니다. 똑같은 그랜트캐년을 보는데 어떤 사람은 감동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림이라고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소를 놓치면 못 잡겠다 하고 함께 보는 그랜드캐년이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범사에 적극적으로 보시지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 본받아 우리 앞에 어떤 난관이 봉착한다고 할지라도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산이 막힌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넘어가던지 넘지 못하겠으면 돌아가던지 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겠으면 터널을 뚫고 나아가서 금광을 발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사명 따라 살면 확신과 열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믿는 이를 안다" 그랬습니다. "나는 확신한다" 그랬습니다. 모든 일에 성공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과 확신이 없는 말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물건 하나를 팔아도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 바로 팔 수 있고 열의가 생깁니다. 가령 보세요. 서울에 소공동에 가면 오래 양복을 하는 집들이 있지 않습니까? 수십여년 대를 이어서 하는 집들인데 간판만 다를 뿐 내용은 거의 비슷하거든요. 어느 한집을 들어갔습니다. 주인이 장부책을 뒤적뒤적 보다가 손님이 들어오니까 돋보기로 척 보더니 도둑놈처럼 생기지 않았으니까 '물건 보다가 사려면 사고 말려면 말겠지'하고 계속해서 자기 장부만 봅니다. 손님 입장에서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냥 나오기가 어색하니까 이것저것 옷감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옷감이 있어서 "이건 뭡니까" 물어봤더니 "네, 그건 새로 들어온 옷감입니다." "어떤 옷감인데요?" "내가 입어 봤어야 알죠" 그런 옷감을 사 가지고 가는 손님이 있을까요? 그러고 나오는데 잘 가라는 인사도 없었습니다. 다른 가게에 들어가니까 들어가자마자 주인이 "선생님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무엇을 좀 도와드릴까요" 그래서 "양복지 구경을 좀 왔는데요" "아, 그러세요. 요즘 새로 들어온 옷감이 많은데 이리로 오세요." 그래서 안내를 받아 가는데 아까 본 옷감이 여기도 있어서 "이것은 뭡니까?" 했더니 "아, 선생님 보시는 눈이 다릅니다. 이게 우리 양복지로 말하면 환상의 옷감입니다. 이태리하고 기술제휴를 해서 이 옷감을 만들려고 그렇게 애쓰다가 이제야 성공해서 어제 마침 도착했는데, 어쩌면 선생님께서는 딱 시간 맞춰서 오셨습니까" 하더니 양복점 옷감을 쫙펴서 보여주면서 몸에 걸쳐주더니 "보세요. 선생님 품위가 달라집니다." "내가 입어봤어야 알죠. 사겠으면 사고 말겠으면 마세요" 그러는 옷감을 누가 사겠습니까? 옷감 하나를 팔아도 확신이 있고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전하는 것도 그렇지 않아요. "예수 믿는게 어때요" 하면 "뭐 그렇고 그렇지요" 그렇고 그런 예수를 누가 믿습니까? "야, 예수 믿으니까 나는 목사도 아니고 훈련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언제나 기쁨이 있고 그렇습니다. 당신도 믿어보면 나정도는 될꺼야" 그래야지. 그렇고 그런 예수를 누가 믿겠습니까?

 

확신과 열의, 바울이 얼마나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공부를 많이하더니 '미쳤구나' 그 미쳤다하는 말이 헬라말로 '엔데오스'라는 말인데 '신들렸다'는 말입니다. '엔데오스'에서 나온 영어 단어가 'enthusiasm'이라는 단어입니다. '열정' 없이 성공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인생을 성공하시기를 원합니까? 확신과 열의를 가지고 사십시다.

 

끝으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뭐랬어요. "내가 주 예수께로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목숨 내 놓고 일하세요. 이거 이상 더 최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이 죽는데는 할말이 없잖아요. 죽는데는 무서운게 없잖아요.

 

지금은 우리교회 안나오시고 지방에 가셨습니다마는 우리 교인 중에 한 분이 저 부산 서면에서 계시다가 올라오신 분이 계신데 그 자매님이 그러시더라구요. "목사님 제가 부산 서면에서 왔는데요. 서면에서 예수 믿은 지가 한 7년정도 되었고요. 갈보리교회 온지가 한 3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안한건 내가 목사님들 한번 대접을 못해서 한번 꼭 대접을 하고 싶은데 어느때 시간이 되시면 함께 일하시는 목사님들과 저희 집에 오세요." 해서 초대를 받고 우리 같이 일하는 목사님들하고 그 댁에를 갔습니다. 참 정성껏 준비를 했습니다. 밤새워서 준비를 하셨다고 합니다. 음식을 꽉 채워놨는데 보기만 하지 다 먹지를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흥분을 하셔서 제 바로 앞에 주인이 앉고 그 옆에 아들이 앉았는데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앉았다가 섰다가 너무 흥분을 해가지고 "목사님, 오늘 제가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남편이 서면에서 깡패 대장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회개하고 예수 믿고 나니까 천사가 되었습니다. 전에는요, 점심 드시라고 정성껏 차려놓으면, 드시다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쁘다하면, 밥상을 다 엎고, 대문에 던지는게 한 주일에 두세 번은 그랬습니다. 지금은 예수 믿고 나니까 아주 변해서 천사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입장으로 볼 때는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자랑스럽지는 못하잖아요. 그래서 얼굴이 빨개지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내가 전에 그랬지 지금도 그런가" "글쎄, 전에 그러던 분이 지금 그러지 않으니까 내가 간증하는거 아니예요" 하더군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남자는 남자 깡패 두목, 여자는 여자 깡패 두목, 두목끼리 결혼해서 사는 댁이었습니다. 저는 놀랬습니다. 부인을 보니까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남자를 보니까 난 깡패를 만나보지는 못해도 상상을 해보면 얼굴이 험상궂고, 덩치가 있어서 한번 밀면 나가떨어지고, 하여간 그럴 줄 알았는데 이분은 참 왜소해요. 저보다 작아요. 얼굴이 까무잡잡한 분이신 데 자세히 보니까 눈동자가 조금 독기가 있어 보여요. 그거 외에는 별로더라구요. 그래서 이상해서 물었어요. "선생님, 저는 깡패는 만나는 못 봤습니다마는 제가 생각하던 거하고는 너무나 차이가 나네요. 미안하지만 깡패면 싸움을 잘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님, 싸움을 잘하자면 힘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힘이 저보다도 없어 보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싸움을 잘하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목사님, 싸움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 그럼 기술이 있군요. 그 기술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기술도 아닙니다." "아니, 힘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그러면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목사님, 목숨 내놓으면 됩니다. 싸움을 할 때 저보다 큰놈을 보면 죽을 각오로 하면 그쪽에서 느낍니다. 아하, 이놈 목숨건놈 이구나. 아무리 힘있는 놈이라도 내 앞에 와서 무릎을 딱 꿇으면서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에 열번 부흥회 참여한 것보다 은혜 더 많이 받았습니다. "야, 목숨걸면 되는 거구나" 여러분 한번 살고 끝나는 인생,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을 원하세요. 승리를 원하세요. 목숨걸고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보세요. 하나님은 없는 것을 내어놓으라는 하나님 아니십니다. 있는 것 가지고 최선을 다하라. 하나를 가졌으면 하나를 가지고, 열을 가졌으면 열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마지막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큰 것을 너에게 맡기노라.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렇게 칭찬 받는 사명자들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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