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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2:1-9 /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복. / 김동호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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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복.
시 122:1-9.

제가 개인적으로 복된 삶을 위하여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만남’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공적이고 복된 삶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만남’입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 좋은 예술 작품과의 만남 등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만남은 그런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경우 제 아내와의 만남, 임택진 목사님과의 만남, 주선애 교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제가 자주 설교에서 이야기하는 친구와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저는 책을 그렇게 다독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인생은 몇 권의 책과의 만남 때문에 풍성해 졌고 균형이 잡혀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은 책은 많이 읽는데 책과의 만남은 없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진정한 만남이 없어서 늘 사람에 대하여 외로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이 그와 같은 사람들은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정작 책이 주는 삶의 유익을 그렇게 깊이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만남 중의 최고의 만남은 당연히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그냥 교회만 평생 왔다 갔다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하나님일 뿐 입니다. 그저 아는 하나님일 뿐 입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2인칭이 아니라 언제나 3인칭입니다.

모든 만남이 다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처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삶에 아주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냥, 그냥 만나는 만남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냥, 그냥 만나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을 스스로 거부하고 차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날부터 우리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데,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 이상의 복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과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설교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다 하나님 만남의 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만남에 대한 간절한 소원과 기도를 가지고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제가 중히 여기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과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경과 교회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성경과 교회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법은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지는 경험이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마치 씨앗과 같습니다. 그 씨앗을 믿음으로 삶에 심어 정성껏 농사짓듯 가꾸어 결국 그 열매를 따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말씀의 맛을 알게 됩니다. 말씀 따로 생활 따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말씀의 맛을 알 수 없고, 말씀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말씀과의 만남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복을 받으실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 없이도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그것은 이론에 가깝고 실제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좋은 교회를 만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만남의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좋은 교회와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그 교회와의 만남은 청량리 중앙교회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청량리 중앙교회와의 만남을 제 평생의 축복으로 확신합니다. 제가 만일 청량리 중앙교회를 만나지 않았었다면, 청량리 중앙교회에서와 같은 교회생활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만남의 또 다른 언어는 사랑입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와의 만남을 청량리 중앙교회를 사랑함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정말 교회가 좋았습니다. 저는 정말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는 산 비탈길 중턱에 있었습니다. 비만 좀 심하게 오면 교회로 올라가는 길이 패이곤 하였습니다. 비만 좀 심하게 오면 어린 학생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비가 심하게 와 교회 길이 패였겠다고 생각이 들면 새벽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채비를 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한 후 가마니에 흙을 퍼 담아 그 길을 다 메우고 학교엘 가곤 하였었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 마당은 평평한 마당이 아니라 2층으로 턱이 져 있던 마당이었습니다. 그 때 교회 마당은 약 600평정도 되었습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교회 마당은 평평해 졌습니다.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비가 올 때마다 우리들이 새벽에 교회엘 가서 흙을 퍼 담아 길을 메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좋았습니다. 교회가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청량리 중앙 교회는 우리 교회가 아니라 내 교회였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학교가 좋은 아이는 대개 공부를 잘 합니다.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는 대개 공부를 못합니다. 학생이 학교를 좋아하고 사랑하면 당연히 공부도 좋아하고 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자기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다릅니다.

제가 하나님 만남의 복을 받게 된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는 교회를 좋아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다닌 것이 아니라 내 교회, 즉 자기 교회를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성전 즉 요즘의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122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던 시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전 즉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은 ‘교회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석해도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네 번째 생일을 맞는 날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그 동안 주일 장년 출석 3,000명 정도의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지난 주간 대구에서 저희 교단 총회가 열렸습니다. 큰 호텔 컨벤션 센터를 빌려서 총회를 하였는데 컨벤션 센터에 1,500명 정도의 총대들이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정말 어마, 어마 하였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우리 교회 주일 장년 출석 교인이 저것의 두 배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 그 때 3,000명이라는 크기가 실감이 났습니다.

장년 출석 3,000명 교회는 쉽지 않은 사이즈입니다. 한국에 큰 교회들이 많다고 하여도 장년 출석 3,000명 교회는 생각처럼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 교회는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3,000명 교회라고 다 똑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더 단단하고 힘이 있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 사이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입니다. 30년이 된 3,000명 교회와 20년이 된 3,000명 교회와 10년 된 3,000명 교회가 다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눈치를 채셨겠습니만, 평균적으로 보면 30년 된 교회가 가장 단단하고 힘이 있습니다. 4년 만에 3,000명이 모인 교회와 30년 동안 3,000명이 된 교회는 다릅니다. 3,000명이라고 다 똑같은 3,000명이 아닙니다. 좋은 예라고 생각은 안 합니다만,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자면 교회 건축에 대한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교회마다 좀 차이가 있겠습니만, 대체적으로 볼 때 30년 된 3,000명 교회는 교회를 건축하겠다고 할 때 보통 200억 원 정도 또는 그 이상의 건축을 합니다.

4년 만에 3,000명이 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지난 해 구입하여 리모델링한 청어람 교육관 50억 원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액수는 그 자리에서 채워지고도 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조금 당황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3,000명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이제 4년이 채 안 된 교회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출석 3,000명은 다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나 손님이 있지만 우리 교회는 유난히 많습니다. 손님까지는 아니지만 아직도 마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여차하면 떠날 생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다니던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에 대한 실망을 가지고 오신 분들이 좀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를 떠날 생각까지는 안 하더라도 가급적 이번에는 교회에 깊이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교회 생활을 하시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닻을 주지 않고 배를 띄우고 있는 것과 같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당신들 생각에는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나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혼이 무서워 결혼을 안 하는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진정한 결혼이 주는 참 사랑과 그 사랑의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라면 떠나시는 한이 있어도,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찾는 한이 있어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좋아하고 섬길 교회를 찾아야만 합니다. 형통한 삶을 살려면 사랑할 예루살렘이 있어야만 합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 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넷 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 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라” (23-25절)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고 3년 동안 저는 교인들 중에 열매를 구하지 않는 심정으로 목회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로 한 말이 ‘나가 놀아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가서 노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어차피 그 기간 중에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중에 교회의 열매를 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같이 그것을 마치 할례 받지 못한 열매와 같아서 성급히 그 열매를 따서 먹으려고 하면 교회에 이런 저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년이 지났을 때 쓸만한 열매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직한 열매들이었습니다. 이제 4년이 지나 5년 째 농사를 짓게 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교회와 교인들이 충분히 배불리 먹을 만한 열매가 있어야 하는 때입니다. 그와 같은 열매가 많이 있어야 하는 때입니다. 손님 같은 교인이 아닌,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의 주인 같은 교인들이 많아져야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교회를 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는 교회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시편 122편 9절의 말씀을 유의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께 우리의 복을 기도해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삶을 살려면 우리가 복을 받아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 이하에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 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 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면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 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 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3:10-12)

말라기 3장에 보면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에 양식을 위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 집의 살림을 하는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마치 자기 집과 같이 생각하여 그 살림을 맡으려고 하는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축복입니다.

보통 축복의 약속이 아니라 하늘의 문을 열어 놓고 쏟아 부으시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맹세와 하나님의 서약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testament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testament로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약속은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하나님의 맹세와 서약으로 믿는 사람에게 그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 될 것입니다. 한 점 보탤 것도 없이, 한 점 뺄 것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복은 교회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하여 예배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십니다. 교회를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복 주어 그 복으로 교회를 복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식이고 계획입니다.

아직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시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손님처럼 다니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사람들 중에는 不可近 不可遠을 삶의 지혜로 삼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혜가 되는 부분과 영역이 물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삶의 지혜로 생각하고 적용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무사안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와 같이 나약한 정신을 가지고 인생의 승리를 낚아 챌 수는 없습니다.

그 원칙을 남편과 아내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친구와의 사이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물며 그 원칙을 하나님과 교회에 적용하고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언 14장 4절에 보면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가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상처 때문에 교회에 대하여 불가근 불가원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신다면 교회 때문에 상처 받는 일을 얻으시겠지만, 반대로 교회 때문에 얻는 축복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상처는 받지 않겠지만 교회 때문에 얻는 축복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높은 뜻 숭의교회를 위하여 복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그 복 주실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 복은 높은 뜻 숭의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받게 될 것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교회를 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를 위하여 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복을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시는 자에게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맹세코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증인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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