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믿음처럼(행 20;17-35)
모세 믿음은 1. 거절하고 2. 바라보고 3. 참고 4. 정하고 5. 건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 믿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겸손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19)
바울은 정말 교만하던 사람입니다. 사울이었습니다.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바울 즉 가장 작은 자라고 이름까지 바뀌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는 교만할 수 있는 요소가 있지만 겸손한 사람이 되었음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4-9)
그렇게 좋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믿음의 다른 말은 겸손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덕목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이 대답하였습니다.
"세 가지가 있다. 첫 째는 겸손이다. 둘 째는 겸손이다. 셋째도 겸손이다" 우리는 겸손하여야 합니다.
겸손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겸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교만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
겸손으로 옷입으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입어야 할 옷은 겸손의 옷입니다. 예수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겸손 덩어리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 번 변신을 하셨습니다. 제1단계 하나님이 사람으로. 제2단계 사람이 종으로. 제3단계 종이 사형수로 변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꼭 하나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거미줄에 대하여 이런 재미 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지옥에서 다른 죄인들과 함께 고통으로 신음하는 한 사나이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는 이전에 살인, 강도, 방화등 온갖 나쁜 짓만을 일삼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세히 살벼 보시니까 그도 살아 생전에 꼭 한번 좋은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길바닥에 기어가는 거미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그 거미를 밟아 죽이려다가 문득 가련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거미를 죽이지 않고 살려 준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문득 이 생각이 나셨습니다. 지금 그 죄인은 살려 달라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가련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어떻게 든지 살려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려 줄가를 궁리하셨습니다. 때마침 천국의 아침 이슬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은빛 거미줄 위로 거미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거미를 보시는 순간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옳다" 하나님은 슬그머니 거미를 잡아 지옥 밑바닥으로 던졌습니다. 천국부터 지옥까지 거미줄이 연결되었습니다. 그 죄인은 지옥에서 뜨거운 불과 괴로움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천국으로부터 거미줄이 내려 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거미줄을 타고 천국으로 올라 가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 사이는 워낙 거리가 멀어서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신없이 거미줄을 기어 오르던 그 죄인은 한참을 오르다가 밑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혼자 오르고 있는 줄 알았던 그 거미줄에 수 십명이 줄줄이 타고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가는 거미줄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매달려 있으면 곧 끊어지겠다. 만일 거미줄이 끊어지면 나도 같이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겠다.....안 된다. 안 된다..." 조바심하면서 걱정하던 그는 밑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놈들아! 어서 썩 내려가지 못하겠느냐? 이 거미줄은 내 것이란 말이야. 누구의 허락을 받고 올라 오는 것이냐?"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 거미줄을 뚝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시 어두운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영영 나올 수 없는 지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거미줄이 끊어직 안 끊어지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만 살겠다는 것은 교만이요, 이기요, 오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싫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2. 섬김
바울은 자기 믿음은 주를 섬기는 믿음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19)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나는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우리나라를 섬기러 왔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이 곳에 와서는 하룻밤에 1,000만원 하는 호텔방에서 최고의 대접만 받고 떠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자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사람입니다.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의 충실한 종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기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인 동시에 모든 이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평생에 많은 사람을 보아 왔는 데 맡은 일에 헌신하는 사람치고 악인은 없었다" 영국의 왕 죠지 6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쓸 때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현재와 지난 생애에서 얼마나 남에게 봉사하였느냐 얼마나 헌신하였느냐를 보면 된다"
영국에서 큰 백화점을 경영하고 있는 골든 셀프리지(Golden Selfridge)가 leader와 Boss 차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1.두목은 사람을 몰고 가는 사람이고 지도자는 인도해 가는 사람
2.두목은 권력을 서서 휘드르는 사람이고 지도자는 선한 뜻을 전달하는 사람
3.두목은 위협적인 사람이고 지도자는 감동적인 사람
4.두목은 나는 내가 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지도자는 제가 우리가 하는 사람
5.두목은 책망하는 사람이고 지도자는 교정시켜 주는 사람
6.두목은 가라라고 명령하는 사람이고 지도자는 갑시다라고 말하는 사람 예수님은 이 땅에 두목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지도자로 섬기는 이로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나는 예수 잘 믿는 한 가난한 소년이 의사가 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겠는 데 돈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방학이면 병원에 가서 열심히 남을 섬겨 주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방학이라고 신나게 놀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를 잘 본 의사가 그의 진로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는 솔직히 의사가 되고 싶은 데 공부할 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성실하게 남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을 보아 온 병원측에서 그의 등록금을 대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이는 어느 곳에 가든지 환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3. 전도
바울의 생애는 전도하는 생애였습니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았고 항성이 아니라 유성처럼 떠돌아 다니며 오직 영혼만 찾았던 생애였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20)
믿음의 다른 말은 전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섬기고 대속물로 죽으시고 마지막에서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내가 잘 알고 있는 순복음 신학교 학장이신 김 문수 목사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입니다. 교회에서 자기 아들을 비롯한 고등학생들 몇 명이 모여 성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화장실에 간다고 나간 아들이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신매매단에 붙들어 섬으로 끌려 갔을 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섬마다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하염없이 찾아 다녔습니다. 어떤 이는 불량배들에 끌려 갔을 지 모른다고 하니까 혹시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매맞고 미친 사람이 되어 거리에서 헤메고 있지 않나 하는 아픈 마음에 이 거리 저 거리를 공연히 다녀 보았습니다.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거냥 지나친 적이 없었습니다. 혹시 아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눈물입니다. 말하다가도 울고 눈시울을 적십니다. 차라리 죽은 시체라고 발견되면 땅에 묻고 나면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예언자가 이북으로 끌려 갔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교회를 잘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들을 돌려 보낼 것이다'라는 생각에 수원에 가장 큰 교회를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문을 잠그지 않고 자는 아버지의 심정은 눈물로 맺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들의 남편 때문 에, 당신들의 자녀들 때문에, 당신들의 이웃 때문에 문을 잠그지 않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한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도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다른 말은 전도입니다.
4. 사명
바울의 일생은 사명의 일생이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3-24)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이만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말씀도 드물 것입니다. 가슴이 찡하지 않습니까? 사명 감당에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한다고 하는 바울의 고백은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이터로 보내지 않고 일터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안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덴 동산 밖에서 창조하셔서 에덴 동산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이끌어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신 후에 다스리며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일감이 있는 일터였습니다.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가 아니었습니다. 휴게실이 있는 쉼터가 아니었습니다.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도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일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 모든 인간들에게 일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로스엔젤레스에 은혜 한인 교회 집회를 세 번 인도하였습니다. 세 번째 부흥회를 마치고 김 광신 목사님 내외와 우리 부부가 한 상에 둘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 목사님 사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보! 이제 부흥회를 마치고 당신과 강 목사님은 빅베어 산에 올라가 3박 4일 뜨레스 디아스에 참석하실 것이지요. 우리는 그 동안 집에 있어야 해요. 그러니 우리 둘이 팜 스프링 온천에 가서 2박 3일만 지내고 와도 될까요? 휴가 좀 주세요" 나는 이 말을 받아 얼른 말했습니다. "그것 참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남자끼리만 일하면 되니까 여자들은 온천에 다녀 오시지요" 그 때 김 목사님이 오른 손가락을 하늘로 가르키면서 한 마디 하셨습니다. "여보! 저 나라에 가면 영원한 휴가가 있는 데 왜 이 곳에서 놀려고 그래. 열심히 일하자구" 나는 좀 무한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좀 쉬고 싶고 놀러 가고 싶으면 김 목사님의 그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고 있어서 편히 쉬지를 못 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 나라에 가면 영원한 휴가가 있으니 이 곳에서는 열심히 일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 차 복희 장로님은 기도할 때마다 이런 기도를 거의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몸이 늙어서 없어지지 않게 하시고 일하다가 닳아서 없어지게 하옵소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우리를 이 땅에 파송하셨습니다. 칼 힐티는 <사명을 받은 날은 생일날보다 나은 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동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명 때문에 살다가 사명 때문에 죽겠다는 바울의 각오가 본문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사명이 사람입니다.
5. 깨끗
바울은 자기는 깨끗하게 살아 왔다고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26)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
바울은 깨끗하게 살았다고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3G로부터 깨끗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돈(Gold), 명예(Glory), 그리고 이성(Girl)으로부터 깨끗하여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테레사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가난하게 사십니까?" 테레사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거지의 가난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난을 배운다" 깨끗하게 사는 것이 능력입니다.
바울은 깨끗하게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믿음의 성분은 5가지였습니다.
1. 겸손, 2. 섬김, 3. 전도, 4. 사명 그리고 5. 깨끗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두 가지를 당당하게 할 수 있습니다.
1. 훈계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훈계할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면서 훈계하면 웃음거리 밖에 안 됩니다. "너나 잘 해라"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당당한 사람만이, 깨끗한 사람만이,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그렇게 훈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냥 훈계한 것이 아니라 눈물로 훈계하였습니다. 눈물의 훈계- 정말 생각하여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눈물로 훈계하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격다짐의 훈계를 들을 사람은 없습니다.
2. 모범 바울은 모든 면에 모범을 보였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35)
사람으로서 보범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가요? 내가 보범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가요? 바울은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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