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에게서는 다메섹도상과 같은 결정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소명의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지도자들과 마지막 대공세를 펼쳤을 때, 성전 이방인의 뜰에 가서 환전상과 짐승을 파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 채찍을 엎었을 때, 무슨 근거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역으로 질문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지도자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신적기원을 가졌다고 말하는 순간 세례요한의 세례 때 공식으로 이스라엘 무대에 등장한 예수님의 신적기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세례가 만일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민중들로부터 몰매를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로부터 공적으로 공증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에 데뷔할 때 공증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적 증명을 받았습니다. 그다음에 바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이 보낸 마지막 아들이라는 자기소개를 합니다. 포도원의 소작인에게 중간소작인이 있습니다. 마지막 하층 최말단 소작인에게 중간소작인이 소작료를 받으러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일종의 큰 지주의 마름이 작은 마름에게, 임차를 한 사람에게 삯을 받아서 지주에게 갖다 주는 식이죠. 마지막 말단 소작인들이 중간에 소작료를 받으러 온 중간 임차인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혹시 내 아들을 보내면 공경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들도 돌로 쳐 죽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안에서 예수님이 그동안 파송된 예언자들과는 격이 완전히 다른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언어와 행동거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의식이 없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도발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도발적이고 거침없는 언어 행동거지는 도대체 어떤 확신에서 나왔는가?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이 확신과 예수님의 죄 문제 해결이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5 절에서 모든 사람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자기 죄를 자복합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3장 14절에 보면, 현장에서 사람들이 요단강에 깊이 잠수하면서 죄를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갈릴리 나사렛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려고 하는 순간 말립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고 소리칩니다. 이 장면이 바로, 세례운동이 죄를 자복하는 죄인들의 통과의례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자복하겠다고 나서니까 요한이 말립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3장 1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이 장면이 무엇일까? 세례는 죄인들이 받는 겁니다. 죄를 자복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장사진을 쳤던 사람들은 세리와 군병들입니다. 세리와 군병들은 한 짝입니다. 세금을 받으러 갈 때 군인이 항상 따라갔습니다. 세리와 군병은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의 물건을 차압하는 집단과 폭력구사대, 경찰과 같은 겁니다. 세리와 군병은 둘 다 로마제국 헤롯 왕국의 토지약탈 농작물약탈 육상과 교통의 통행세약탈, 이런 약탈체제의 첨병들이고 지탱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리와 군병들이 많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죄를 자복하면서, 세리와 군병들이 쓰러져서 물에 잠기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 와서 죄를 자복하겠다고 하니까 세례요한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때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이 무엇일까? 세례요한이 감히 세례를 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던 그 나사렛 예수가 와서, 이미 나사렛 예수가 활동을 꽤 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본문을 보면 나사렛 예수가 세례를 받기 전에 상당히 활동을 한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로 돌아가서 활동을 꽤 하기 전에 제자들이 이미 많이 세례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서가 굉장히 헷갈립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기 전에도 이미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세례를 받은 겁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가 알기에는 세례 받고 나서 영을 받아 제자를 모은 걸로 아는데, 도대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이 제자들, 요한의 제자들보다 예수의 제자가 세례를 더 많이 준다했고, 3장에는 예수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서 요한의 제자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갈릴리 사역이 번지기도 전입니다. 여기는 우리가 모르는 예수님이 갈릴리에 가서 폭풍 같은 사역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상당수 제자들을 확보했고, 제자들이 세례를 많이 주었다는 말이 요한복음 4장 1-3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갈릴리에서 유대로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자마자 세례운동을 벌여서 제자들을 데리고 또 갈릴리로 간 겁니다. 3장 23절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애논은 사해 근처에 있는 요단입니다. 지금은 요르단에 있는 마케루스 페트라, 지금 요르단에 있는 마케루스 궁전에서 요한이 체포되어 목이 잘립니다. 사해 건너편에 있는 마케루스입니다. 세례요한이 마케루스라는 요새에 갇혀 목이 잘렸다는 건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6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 지금 세례요한은 요단강 이편, 동편에 와 있습니다. 동편 애논 근처에서 사역을 합니다. 애논은 요단강 동편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 서편에서 사역을 합니다. 요단강 저편이니까 동편에서 보면 서편입니다.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경합을 했죠?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요한이 완전히 꼬리를 내립니다. 예수님이 세례운동을 더 크게 벌이면서 확장해가면서 사람들을 거대한 자석처럼 끌어 들입니다.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면서 자기를 은닉시킵니다. 이런 자기 은닉의 과정에서 요한은 체포가 됐습니다. 요한이 체포되면서 예수님이 드디어 활동을 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인상적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첫째 죄를 자복하는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이 볼 때 예수는 자복할 죄가 없는, 세리와 군병과 함께 물에 빠져서는 안 될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예수가 불결한 사람들이 죄를 씻기 위해서 깊이 잠수하는 요단강에 와서 물에 빠지겠다고 고집을 피우니까, 아니다, 내가 당신 앞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손사래를 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기어코 하나님의 모든 의를 위해서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이 가능해요?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세례 받으러 오는 장면에서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 그가 어떻게 알지 못하다고 해요?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 정도 알면 상당히 많이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럼 꽤 많이 아는데 왜 갑자기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이렇게 말을 해요?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점점 깊이 알아가는 가운데, 즉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때 예수님을 알았던 그 지식에 비하면 옛날에 알고 있었던 건 전혀 아는 게 아니다, 라고 할 만큼 큰 비약적 인지능력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요한이 이렇게 전광석화 같이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건 이튿날이니까, 세례 받는 날을 첫날 기준으로 봅시다. 첫날 세례를 받았다고 치고,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이건 이미 요한이 세례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이미 예수에게 세례 주던 그 장면을 해석하는 겁니다. 요한이 세례를 준 어떤 날을 비추어볼 때 그 이튿날입니다.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죄를 고백한 게 분명히 맞습니다. 죄를 고백하지 않고는 세례를 분명히 못 받으니까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죄고백은 세상 죄를 자기가 뒤집어쓰기로 결심한 죄 고백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너무 중요합니다. 세상 죄를 뒤집어쓰기로 결단한 죄 고백을 세례요한은 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 세례를 받는 그 장면에서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고백한 이유, 증언한 이유는 예수님의 이스라엘 죄책 전가, 이스라엘 죄를 자기가 책임질 것으로 고백한 그 모습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증언한 겁니다. 즉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은 세상이 하나님께 저질렀던 모든 범죄의 결과가 초래한 그 모든 짐과 고역 책벌 징벌을 자기가 대신 지겠다는 뜻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의 비유는 레위기 16장에서 가장 근접한 비유가 나옵니다. 세상 죄를 진다는 개념은 아사셀의 염소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 달력으로 7월 10일 대속제일,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성막 지성소에 들어가서 피를 일곱 번 뿌리고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치고 한 마리를 광야로 보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을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은 아사셀의 염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무인지경의 광야로, 산자에 땅에서 끊어진 광야로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본 겁니다. 세례요한의 개념으로는 매우 제사장적인 성전제의에 익숙한 단어를 쓴 거죠. 보라, 세상 죄를 아사셀의 염소처럼 지고 가서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죄를 혼자 뒤집어쓰기로 결심한 자의 서슬 퍼런 죄책전가가 저기 오도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자기 탓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한 어린 양이 저기 걸어온다, 이런 뜻입니다. 1장 35-36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페리파타이, 예수님의 거니심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거지를 보고, 이런 뜻입니다. 지난번에 할라크라는 동사를 썼나요? 할라크 동사는 동행한다, 걷는다는 뜻인데, 그게 헬라어로 페리파타, 페리파타오, 이리저리 걷다, 동행하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결국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지금 이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우리 시대의 중심죄악의 결과 모순을 내가 뒤집어쓰고, 그 죄책을 내가 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거죠. 일반적으로 그런 뜻이 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또 다시 예수님에게 이 역할을 맡기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또 한 번 한강에 내려와서 대한민국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라고 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들이 복제 예수가 돼서, 예수 복제인간이 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지상의 모든 과업들을 하나님께만 자꾸 맡기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께 맡긴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라 지금 우리처럼, 요단강의 물에 빠진 예수처럼 한강 물에 자기를 잠수시키는 또 다른 예수가 필요하다, 그게 예수께 맡긴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가치를 모방하는 것이 맡기는 거지, 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또 한 번 내려와서 육신을 입고 한국 사람처럼 와서 요단강물에 빠지듯이 한강에 빠져서 죄책을 지고 가 달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너무나 모르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의존하고 믿는다는 말은 모방한다, 추종한다, 그 발자취를 따른다는 말과 가장 같은데, 자칫 잘못하면 정신적 노예근성을 자극하는 말이 됩니다.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긴다? 참으로 그 말은 정신적 노예근성인데, 민주화투쟁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격변이 일어납니다. 세상에 기독교적 가치를 한참 드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려오십시오, 지금 이 땅의 민주화를 이뤄주시고 이 땅에 정의를 행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나님께 맡기는데 그건 관념적 노예근성의 함양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맡긴다는 말은 정확하게, 주님 제가 지금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주님이 하시듯이 할 테니까 저를 받아주십시오, 이게 맡기는 겁니다. 맡긴다는 말은 추종한다, 모방의 위험성을 감수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돌 봐주십시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살아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 맡긴 다는 뜻으로 관념적 노예적 의존상태를 조장하는 기독교적 용어가 남발된다면 전혀 실천할 기회가 없어지고, 모든 걸 관념적 형이상학적 우주 천공 저편에 계신 그분을 향해서 자꾸 내려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원시이전의 관념적 신앙시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그게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 하나님 당신이 내려오십시오,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아들인 예수가 정확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뚜벅뚜벅 시행했습니다. 그게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거거든요.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은 위험천만한 불확실한 그러나 옳고 선한 일에 투신하면서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존입니다. 이 의존이야 말로 기독교적 의존, 주체성을 확인하는 의존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어린 양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중심죄악이었던 빈부격차, 양극화, 권력을 가진 자가 힘없는 언약 백성지체들을 괴롭히고, 사회가 갈가리 찢기도록 방치한 죄,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우애가 가득 찬 공동체로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은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사람들, 서로 증오심으로 적대의 전선을 형성한 이런 언약공동체 파편화되고 구획화된 이 모습을 사랑과 우애로 가득 찬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은 열두제자 공동체를 만들어 실험했습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씩 용서하고, 먹을 것을 나누고, 서로 하나님이 되어 주는 무한 책임적인 돌봄의 공동체로 이스라엘을 촘촘하게 재구성해주시려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촘촘하게 언약적 돌봄과 상호 베풂과 인자함이 가득 찬 공동체로 재구성하기 위하여 예수님 스스로 끊임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대인 행세를 하지 않았습니다. 랍비행세를 하지 않고 먼저 겸손하게 발을 씻었고, 서로 허리를 굽혔고 간음하다 붙잡힌 범람하는 욕망을 가진 여인을 끌어안았고, 너무 지저분해서 정결케 될 가능성이 없는 쓰레기 같은 인생들을 재생 복구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잃은 자들을 다 찾아 모아서 한 몸이 된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촘촘히 재생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해, 언약공동체의 회복, 아브라함 후손 공동체의 회복, 열두지파 공동체의 회복, 이스라엘 잃은 양들의 회복, 이스라엘을 회복함, 이런 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 다시 말합니다. 로마제국으로부터 헤롯의 압제체제 로부터 물리적 항쟁을 통하여 일련의 백성을 끌어냄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태도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으로 바꾸어놓고, 한없는 너그러움을 먼저 경험하게 만들어서 서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빛나며 서로를 서포터하고 돌보는 형제자매 공동체로 재구성하는 거야말로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 거라 본 겁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압제와 헤롯 수탈체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하더라도 열두지파 공동체적 재구성으로 이스라엘이 사랑과 언약과 돌봄으로 촘촘하게, 옷 두벌 가진 자가 한 벌을 주고, 집 두 채 가진 자가 한 채를 주고, 떡 두덩이 가진 자가 한 덩이를 나누어주는 오병이어적 공동체의 축제가 벌어진다면 로마제국 헤롯 수탈체제가 이스라엘 언약공동체 내에 더 이상 악마적으로 역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꿈꾸는 건 그런 사회입니다. 실제로 로마항쟁 군을 결성해 싸워서 로마의 깃발을 빼앗아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마카베오 독립전쟁과 같은 환상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오순도순 살면서 사마리아와 유대가 서로 적개심으로 으르렁거리지 않고 서로 화해하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씨가 착했는가, 사마리아에 있는 미담들을 유대에다 막 유포시키면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통해서 유포시키면서, 사마리아 문둥이가 제일 감사를 잘한다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감사본성을 막 유포시키면서 사마리아와 유대의 평화를 원했고요.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이방여인을 품어 들여서 이방여인을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방인 백부장도 품어주시고, 로마제국의 앞잡이가 되어서 민족의 양심을 팔았다고 저주 받았다고 믿어지는 세리까지도 움켜쥐면서 이스라엘을 대동단결, 그래서 이스라엘이 생기가 돌고 평화가 돌고 이스라엘의 언약적 돌봄이 서로 일상이 되는 교양이 되고 사랑이 되는 세상을 꿈꿨어요. 이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돼요. 제가 생각할 때는 유한양행의 유일한 같은 기업인이 우리나라 대기업 총수였다며 대기업은 존경받을 겁니다. 우리나라 유일한 같은 사람, 거상 임상옥 같은 사람, 최인호가 썼나요? 연재소설로 실렸죠? 임상옥, 함경도 의주에서 거대한 상업을 했던 사람, 욕망을 항상 끊임없이 부인하면서 상도를 거의 성인의 경지까지 일으킨 사람, 깨끗한 고위공직자, 26평 빌라에 사는 대법원 판사 이야기, 성직자 이야기,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입니다. 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이 어린 양이거든요. 하나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죄를 범하지 않고 의를 행하다 보면 점점 순종의 화신으로 질적 전환을 해서, 저기 순종의 화신이 온다, 어린 양이라는 말은 순종의 화신, 하나님 뜻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부인의 화신이 온다, 이 세상을 예수님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닮은 선생님이 학교를 구원합니다. 예수님 닮은 목사님이 교회를 구원합니다. 예수님 닮은 관리가 정부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께 맡기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직접 내려와서 다시 팔레스타인 농부의 얼굴로 와서 재성육신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얼을 가득 채운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살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한 셈이 됩니다. 왜? 예수님 얼로 가득 찬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럼 다시 예수님의 복제인간들이 세상 죄를 지고 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죄를 지고 가는 거거든요. 지금 대한민국의 죄는 탐욕과 배제의 양극화입니다.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무한히 탐욕을 긍정합니다. 경쟁에서 뒤쳐진 자들은 게으르지 않고도 끝까지 가난과 굴욕을 면치 못합니다. 이게 무섭습니다. 게을러서 응징을 받는 잠언서가 말하는 그런 가난이 우리는 없습니다. 애를 쓰지만 가난을 면치 못하는 분투하는 가난만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 납니다. 분투하는 가난, 우리 한국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게을러서 가난한 도덕적 파탄자로서의 가난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애를 쓰지만 가난한 겁니다. 얼마나 어린 아이들은 불쌍한지 모릅니다. 공부도 못한 어린 아이는 얼마나 자기 인생을 비참하게 생각한지 모릅니다. 인간이 이래선 안 됩니다. 그런 세상 죄를 지고 가려면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도 행복한 길을 열어주는 법을 만들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법을 만드는 것, 그런 정치를 하는 것, 그런 정치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가를 많이 길러야 합니다. 정치가 예술가 작가, 사회여론을 주도하고 사회민심 영도 청년의 의식을 끌어올리는 건 정치가이고, 작가 예술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물론 목사님도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비친 가장 큰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의 문제, 언약공동체 파괴적 분열양상, 그걸 끌어안고 아브라함의 잃은 양들을 기어코 찾아내야겠다는 그 마음, 다시 말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 마음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에요. 이게 중요합니다. 신문을 읽을 때 비참한 사람을 중심으로 신문을 읽는 거예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보면 그 소설후기에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는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년째 신문을 스크랩해서 그 걸 소설 마지막에 썼다는 겁니다. 둘째 형 이반이 이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쫙 펼치는 장광설이 나옵니다. 얼마나 이 세상이 더럽고 추악한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가를 묘사하는데 그게 전부 다 신문기사입니다. 신문을 읽을 때, 세상을 읽을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마음으로 신문을 읽으면 소명이 나오고 직업이 나옵니다. 북한과 우리 남한이 어떻게 하면 화해할 것인가? 이걸 고민하면 나옵니다. 이걸 계속 고민하면 북한과 남한의 화해를 주도 할 정치가로 쓰임 받거나 사상가로 쓰임 받거나 활동가로 쓰임 받습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희망이 없다고 소리치는 이때에 청년들의 미래 불안 안타까운 좌절감을 오랫동안 분석하고 공감하고 가슴 아파하면 그런 청년들에게 유익을 주는 인물, 청년들의 좌절감을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나오면 청년들의 목자가 되는 거거든요. 주부면 주부, 어린이면 어린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과 같은 존재가 나오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 즉 죄 사함의 권세가 임합니다. 죄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제가 다 말할 수 없지만 죄를 자복할 때 이런 죄를 자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느냐? 예수님의 의식의 지평에 떠올랐던 생각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공관복음서에 너무나 많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공관복음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억울한 사람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가난한 이웃들 병든 사람들, 예수님의 눈에는 귀신들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 한 드라크마 찾기 위해서 밤새도록 비질하는 아주머니 이야기, 또 12년 동안 혈루병에 걸린 이야기, 12년 만에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 이야기, 과부 한 명이 아들 키우다가 아들이 죽어가서 통곡하는 이야기, 예수님 의식의 지평에 떠올랐던 쇄도하는 슬픔,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밤새도록 민원을 넣어 재판관의 잠을 방해해 마침내 재판에서 이긴 불쌍한 민원인의 이야기, 이런 것들이 예수님에게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든 파편의 불행한 군상들의 죄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이런 죄도 내 잘못입니다, 이런 죄도 내가 짐 지겠습니다, 이런 죄도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들로써의 책임감, 무한 책임감으로 자기 영혼을 추궁하는 고백을 했을 때 그런 고백 장면을 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가? 세례요한이,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말했죠. 여러분 죄를 자꾸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순종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사태, 상황입니다. 중풍병자가 누워 있었죠? 그게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은혜의 직립인간으로 뚜벅 뚜벅 걸어가는 게 하나님의 원래 창조의 목적입니다. 창조의 명령과 목적에 이바지 못하면 죄입니다. 네 죄가 사함 받았다는 말은 그 사람이 죄를 지어 중풍 병에 걸렸다는 말이 아니라 중풍이 걸려서 식물인간으로 사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 볼 때는, 레위기 26장 13절입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바로 서서 걷게 함, 은혜로 직립인간이 돼서 뚜벅뚜벅 걷게 함, 이것이 하나님 목적입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상태, 38년째 누워 있는 상태는 죄 가운데 누워 있는 겁니다. 죄 가운데 있다 할 때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제가 갈릴리에서 봤던 그 숱한 무리들 어린 자녀들 동생들 그들의 아픔을 내가 짐 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겁니다. 언제? 세례를 받을 때, 세례를 받을 때 죄를 이렇게 자복했습니다. 중풍병자의 마음으로 제 육신이 비틀어져 있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이스라엘 갈릴리에서 봤던 모든 일그러진 군상들의 속마음을 가지고 기도했을 겁니다. 아마 예수님은 세리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했을 겁니다. 주님, 불결해진 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세리의 마음으로 죄를 자복했을 겁니다. 그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안 박혔는데, 십자가에 못이 박힌 이후에 죄사함이 온다고 바울서신은 말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히지도 않았는데 죄 사함의 효력을 발휘했을까? 이것이 마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중요합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입증하기 위하여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히기 전에도 예수님 말 자체가 죄를 용서하는 힘이 있네요. 이게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무엇입니까? 이런 겁니다. 제가 제 동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 동생이 7천만 원 빚을 졌습니다. 제가 말로 이렇게 합니다. 동생아 너의 7천만 원을 내가 갚아주게, 하면서 빚증서를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그 동생 가정에 있던 엄청난 채무의 짐이 저한테 온 겁니다. 짐을 져 주는 것은 채무의 짐을 대신 져 줄때만 자유로운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말을 통하여 그 사람의 죄를 용서했다는 말은 그 죄짐을 누가 졌다는 말입니까? 그런 본문이 바로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 13-17절, 찾지 마세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기억해야만 사상이 됩니다. 찬송가도 기억해 불러야 합니다. 모든 영감과 사상을 일으킨 말씀은 기억된 말씀입니다. 오늘 동원형제 기도 참 은혜롭게 했는데, 머리 장식품 아니에요. 머리는 암송용이거든요. 제가 되면 여러분도 됩니다. 김회권 머리가 되면 명구 머리도 되 고 동원이 머리도 됩니다. 좀 암송합시다. 얼마나 성경이 짧아요? 기독교인들이 정말 이렇게 짧은 성경도 못 외워서 30년째 애쓰는데, 찾는데 5분씩 걸리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봐요. 어쨌든 세상 죄입니다. 마태복음 8장 4절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중요합니다. 여기 물리학 화학 공부한 사람 있죠? 열병은 에너지 덩어리죠? 에너지는 질량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에너지 보존의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배웠습니다. 에너지와 질량은 어디로 떠나가지 않습니다. 우주 안에 갇혀 있습니다. 물량과 에너지양이 다 같습니다. 절대로 증감이 없어요. 그런데 열병이 어디로 갔느냐? '떠나가고' 질문해야 합니다. 어디로 열병이 떠나갔을까요? 17절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이사야 53장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이 죄짐을 짊어졌다는 것은 무기력과 병을 짊어졌다는 말도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죄책감도 짊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니까 채무를 짊어지면 채무자가 채무에서 편하게 되지, 짊어지니까 그 여인은 힘이 났죠. 예수님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죄책감,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돌 든 군중이 여인에게 정조준 됐던 돌이 언제부터 예수님 머리로 정조준 됐습니까? 그 여인을 향해서 돌을 쳐들었던 군중이 뭐라고 하니까 예수님 쪽으로 왔어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니까 노인들로부터 젊은이까지 돌을 놨죠? 그 때 그 분노는 누구에게 전이됩니까?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향한 돌파매질은 누구에게 갑니까? 예수에게, 예수님이 삭개오 집에 갔죠? 죄인의 집에 들어갔죠? 수군거리면서 삭개오를 향했던 적개심과 분노는 누구에게로 이전됩니까? 예수가 삭개오의 죄짐을 졌죠? 예수가 중풍병자의 죄짐을 졌죠? 예수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졌죠? 어제는 제가 꿈에 리처드 백스터의 <참 목자>라는 책을 선명 하게 봤는데, 제 서재에서 리차드 벡스터의 <참 목자>가 딱 떠올랐는데, 이걸 며칠 동안 찾았더니 못 찾았네, 딱 떠보니 꿈이에요. 그 책을 찾아야 하는데 못 찾아서 난리입니다. 마가복음 5장 30절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믿음으로 내 옷에 손을 대어서 어떤 사람의 병이 낫는 그 순간에 내가 엄청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원기가 빠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너무 어지럽고 현기증이 느껴져서 능력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물리화학적 생화학적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죄짐을 졌다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가 있죠? 베드로 장모, 누가복음 19장 삭개오, 요한복음 8장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혈루병 걸린 여인, 오늘날 세상 죄를 지고 간다 할대 바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경제적 희생을 하면 됩니다. 시간을 희생하면 됩니다. 재능을 돈 받지 않고 희생하면 됩니다. 경제적 희생, 시간의 희생, 재능과 신체적 건강의 희생 등을 하면 우리는 누구의 죄짐을 져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수렴하는 죄짐을 지는 인생, 하나님의 어린 양의 인생을 살도록 초청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을 닮아가면 안 되겠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직장을 구해서 내 한 평생 먹고 사는 일생에 너무 몰두하면 안 되겠죠? 예수님 믿는 우리는, 영 받은 우리는 그러면 안 되겠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 죄를 짐 지는 어린 양이 돼야 겠죠? 어린양 괄호하고, perfect incarnation obedience, 완전한 순종의 화신, 완전한 순종의 화신이 걸어간다, 이 말은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재회복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공동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그 집요한 열심이 예수님의 프로파일을 구성했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의지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가 죄입니다. 어떤 사람의 죄는 의도적 불순종에 가깝고 어떤 사람의 죄는 무능력에 가깝습니다. 이런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을 건져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숙명론에 맡기면 안 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출현하면 대한민국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구원받을 수 있고 한 가정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한 가정도 축소판 세상입니다. 분명히 말 없이 가족구성원의 채무를 계속 감당해주는 어린 양이 있을 때, 거기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동생의 짐을 져주고 어떤 사람은 엄마의 짐을 져주고 어떤 사람은 누나의 짐을 져 주고 어떤 사람은 바로 쌍둥이 동생의 죄를 져주는 그런 짐을 서로 져줄때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일어난다 할 수 있죠. 이런 어린 양의 순종이 적분될 때 다 모일 때, 하나님의 어린 양이 다 모일때 하나님은 뭐라고 인정받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라는 말을 듣겠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 하신다는 그 하나의 명제를 성립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어린 양이 필요해요? 하나님은 어린 양을 통하여 당신이 세상을 사랑하심을 입증하는 이렇게 답답한 방법을 쓰십니다. 바로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실 수 있는데, 이렇게 매개적 방법으로 어린 양을 통하여만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 인간의 역할이 부각되고 두드러집니다. 여러분과 제가 가향교회가 하나님의 어린 양들의 다니시는 공동체가 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야 합니다. 성령의 선역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성령은 언제 역사할까? 이건 사도행전을 공부할 때 하겠지만 성령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자마다 받는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주요, 양으로 따르려고 순전하게 결심하는 사람일수록 그 결심을 완성시키는 성령이 하늘로부터 위에서 임합니다. 여기서는 그 진실성은 하나님이 판단하기 때문에 제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 예수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하늘로부터 임하여 하나님 어린 양의 삶을 가능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양의 구원의 완성을 예수님께만 다시 그대로 재현하도록 부탁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우리가 작은 복제예수가 됨으로 그 일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참 어린 양이 많이 필요합니다. 잃어버린 어린 양, 피 흘리는 맹수들, 저 욕망의 탐욕과 배제의 논리로 바벨탑을 쌓는 많은 죄인들이 창궐할 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어린 양들이 걸어다니는 세상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님 요단강에서 자백했던 죄는 무엇이며, 그가 요단강에서 쏟아냈던 탄식은 무엇인지, 그가 갈릴리에서 봤던 그 많은 참상과 그 많은 군상들의 아우성은 요단강물에 깊이 잠수한 예수와 함께 하나님께 고백되었습니다. 하나님, 불행한 자 중심으로 신문을 읽게 하시고, 고통당한 자 중심으로 사회를 보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어린 양 중심으로 세상살이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 돈 많이 벌어서 내 한 평생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은 극복하게 하시고,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결심 주셔서 순종의 화신 예수의 발자취 따르는 저희가 되게 복을 내려주시고, 성령부어 주소서. 성령 부어주셔서 하나님 어린 양의 발자취를 희락과 기쁨 속에 따라가게 하여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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