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 사건은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호소했던 권위의 원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이 펼쳐놨던 성전을 소제하기 위하여, 이방인의 뜰에서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시고 대제사장이 독점으로 공급하던 제물들인 양떼들과 소떼들을 채찍질 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하는가? 예수님이 역으로 물었습니다. 그럼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세례인가, 사람으로부터 온 세례인가? 그 대답을 먼저 해주십시오, 했습니다. 그 종교지도자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했던 세례요한 선포의 신적기원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세례요한을 예언자라고 믿고 있던 많은 민중들의 기대와 배반하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세례라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때 자신이 들었던 말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예수님은 드러낸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하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의 권위로 내가 이렇게 한다고 대답을 한 겁니다. 바로 그 다음에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좀 더 쉽게 설명합니다. 소작인들을 소작료를 받기 위하여 임차중간, 마름에 해당하는 중간소작인을 저 마지막 말단 하층소작인에게 지주가 보냈습니다. 마름소작인들을 지주들이 보낼 때마다 소작인들이 다 때려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아들을 보낸다면 그들이 혹시 공경할까? 그런 마음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아들마저도 돌로 쳐 죽이고 배반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의 마지막, 예언자들을 파송하여 죽게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지막 피파송자, 하나님 아들로써 성전을 뒤집는 겁니다. 성전을 뒤집는 것은 소작료를 받으러 온 겁니다. 소작료를 받으러 온 그 사건 앞에 벳바게의 무화과나무가 있죠? 무화과나무를 들춰보니 열매가 없어서 예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감람산 벳바게에서 무화과나무를 들춰보다 열매가 없으니까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깔 있으신 분인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그 사건은 정확하게 열매 맺지 못하는 성전을 혁파하실 것의 예언적 행위였습니다. 그 나무는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무를 싫어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무화과나무로 대표되는 성전체제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하신 겁니다.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한다고 저주했습니다. 그 말은 다시는 하나님과 소통을 할 수 없게 됐다고 성전을 저주한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써 자의식으로 그렇게 거침없는 언어적 행동적 도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언어적 행동적 도발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 아니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예언자들이 가장 격하고 가장 거센 도발적 언어를 구사할 때가 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지주들에게 막 쏟아내는 겁니다. 그런데 가장 예언자적 예언이 거센 사람은 왕 앞에 가서 왕을 직접 책망합니다. 어떤 장면이냐면, 고양이 대왕한테 쥐가 훈계하는 겁니다. 이 고양이 대왕아, 쥐가 고양이한테 가서 막, 쥐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만 고양이한테 갈 수 있는 거거든요. 엘리야가 가장 강했습니다. 엘리야는 직접 왕 앞에 가서 왕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영감 받았다는 말은 왕의 죄를 탄핵할 때만 쓰는 말입니다. 왕의 죄를 경책하거나 왕의 죄를 탄핵할 때만 예언자들이 쓰는 말이 영감 받았다, 즉 영으로 격동되어서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써요. 성경의 영감설은 성경에 나온 모 과학적 사실이 오류가 없다는 말로써 영감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정말로 잘못된 겁니다. 이 근거, 성경의 영감설 근거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1절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언자들의 들끓는 도발언어를 무색하게 만든 것이 예수님의 언어입니다.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죄를 고발하는 사람은 세례요한과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만이 죄를 직접 고발하면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언어가 하나님을 너무 친하게 불렀다는 겁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라는 기도는 서구의 모든 비평적 신학자들이 도저히 부인하지 못했던 말, 예수가 모두 했던 말 중에서 이 말만은 예수가 진짜 했을 것이다 라고 했던 말입니다. 예수의 기도언어입니다. 예수의 언어가 아빠 아버지인데,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느끼는 고도로 배타적인 친밀감과 신뢰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비교할 수 없는 친근성, 예수님의 행동적 언어적 거센 두 번째 도발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것, 첫째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 두 번째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하는 것, 세 번째는 이 두개와 연결됩니다. 성전을 마음대로 상대화하는 발언을 하는 것, 저 돌로 된 성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이 머물러 있는 성전을 돌로 된 성전이라고 말하고, 모세의 율법을 상대화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쉽게 상대화했던 모세의 율법은 안식일법입니다. 그다음에 정결예법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두드러지게 만들었던, 모든 예언자들과 비슷하지만 예언자라고 볼 수 없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여기입니다. 여기 모세가 있습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있습니다. 모든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도발성 위험성 과격성, 그런 모든 주장, 왜 세례요한이 가장 높으냐면 회개의 직접적 요구, 즉 회개하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를 자른다고 하는 도발적 언어 때문에 세례요한이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높이를 합해도 쫓아갈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와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 주장이 예수를 모든 예언자들과 구별시켰던 결정적인 마크입니다. 이 예수의 신념, 배타적 신념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때 가장 쉬운 원천자료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배타적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차별적 사랑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고, 두 번째로 그저 값없이 베푸는 은혜로운 말씀과 치료사역과 관련돼 있고, 그다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복종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아버지라 했을 때는 항상 절대복종의 순간에 합니다. 이건 검사 아들이나 북창동에서 난동을 피웠던 모그룹 회장 아들이 경찰에 잡혀갔을 때, 너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아버지 이리 와 보쇼, 하면서 아버지를 부당한 사슬 속에 끌어들이는 권세로써의 아버지가 아니라 순종의 자태, 자기부인의 극한 지점에서 항상,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권세를 이야기할 때는, 절대로 복종해야 할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른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독특한 자기 확신과 거침없는 언동과 행동거지, 이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이건 두 가지 답이 가능합니다. 태초부터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수태될 때부터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열두 살 때부터 비약적 각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열두 살 때도 굉장히 사춘기 소년의 도발적 성격과 가시 돋친 언어와 함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몰랐습니까? 하면서 부모님과 갈등하는 걸 볼 때 예수님의 날카로움이 그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격이 거침없는 분입니다. 할 말은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결정적으로 만개한 친자의식, 하나님 신의 친아들 의식은 요한의 세례부터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성전을 뒤엎을 생각을 했느냐? 라고 물으니, 너 꼭 알기를 원하느냐? 너 언제부터 이렇게 됐느냐?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됐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성전에 가서 뭘 뒤엎는다? 그건 절대로 제정신으로는 못하는 겁니다. 영락교회에서 뒤엎는다, 영락교회 성찬식 할 때 저 하동에서 올라온 사람이 낙타털옷 입고 수염도 안 깎고 면도도 안한 사람이 뒤집으면 영락교회 장로들이 멱살 잡고 나와서, 너 왜 이러냐? 섬진강에서 세례 받다가, 이러면 얼마나 웃기겠어요?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그렇게 비친 거예요. 그런데 고대사회에서 종교지도자들을 탄핵하는 행위는 예언자들만 하는 행위거든요. 예언자들이 대개는 율법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출현하면 대개 제사장들이 낮은 포복을 합니다. 반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언동이 거침없었기 때문에 실족을 한 겁니다. 예언자라고 믿고 낮은 포복을 하기에는, 일단 낮은 포복을 했지만 또 보니까 법을 일단 안 지켜요. 안식일 법을 안 지켜요. 그다음에 같이 한통속이 돼서 도저히, 세리와 군병이라고 누가복음 3장 7절부터 나오는 요단강에 뛰어 들어 죄를 자복했던 사람들은 세리와 군병이거든요. 이 세리와 군병은 가장 먼저 죄를 자복할 게 많은 명백한 죄악의 챔피언들입니다. 세례요한이 불꽃처럼 회개를 설득하니까 마가복음 1장 5절, 각자 요단강에 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복음 3장 7절 이하입니다. 세리와 군병은 항상 2인조입니다. 세리가 세금을 걷으러 오고 군병이 세금 안 주면 때려서 빼앗아옵니다. 세리와 군병은 바로 그 당시에 드러내놓고 양심을 팔아버린 죄인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먼저 회개하러 요단강에 뛰어들면서 죄를 고백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고백했는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3장 14절에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세례를 받으러 뛰어들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장 29-35절을 이해하려면 이 장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입니다.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가장 많이 세례 받은 사람이 세리와 군병이라고 하는 폭력적이고 강탈하는 죄인들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이 침수하는 요단강에 죄를 자복하면서 뛰어들고 세례를 받겠다고 하니까 마 3장 14-15절입니다. 세례요한이 말립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여기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미 거룩의 질서에서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걸 알 수 있습니다. 왜?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니면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그냥 갈릴리의 목수가 세례 받으러 왔겠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사이입니다. 즉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지 않으려고 옥신각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매우 애매모호하고도 신비한 말을 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이 무엇이며, 예수가 그 요단에서 침수하면서 세례 받을 때 자복한 죄는 무엇이었을까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 세례는 죄를 자복한 사람만이 받는 거거든요. 예수는 죄를 자복했다고 봐야 해요. 예수는 죄를 자복했는데, 세례요한은 예수에게 죄를 자복하는 세례를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바로 오늘 본문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무슨 죄를 고백했겠느냐? 무슨 죄를 자복하면서 세례를 받았느냐는 거죠. 죄는 이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 하나님 계명에 대한 의도적 불순종이 죄입니다. 두 번째로 의도적으로 불순종한 죄인 때문에 순종할 수 없게 된 사람도 죄인입니다. 제가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밤 12시에도 교통질서를 지켰습니다. 프린스턴 생각이 나서 지켰습니다. 신호등도 한참 지켰습니다. 그런데 김진홍 목사는 항상 안 지켰습니다. 김진홍 목사는 가버리고 나는 항상 서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라고 하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안 지킵니다. 지키는 제가 바보가 될 만큼 일상적으로 신호등을 안 지키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저도 군중 틈 사이에 끼여서 갑니다. 저도 6호선 합정역 타기 직전까지는 평정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에스칼레이터에서 뛰면 저도 갑자기 뜁니다. 뛰면서 같이 쑤시고 갑니다. 그러면서 너무 바쁘게 전철 표를 집어넣지 않고 열쇠를 집어넣습니다. 정신이 나가버립니다. 6호선 합정역에서 1호선 신도림역에서는 내가 아닙니다. 너무 당황하기 때문에 나도 살아야겠다는, 파생적 죄인입니다. 아담의 원죄가 모든 인류를 죄인 되게 만들었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원초적 상황을 죄인 되게 만드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또 죄인입니다. 마가복음 2장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들어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예수님 면전에 갖다 보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네 죄가 사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죄를 지어 중풍병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중풍병자로 누워 있는 그 상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사는 그 식물인간 상태가 바로 죄라는 겁니다. 죄는 의도적 불순종과 의도적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 수 없는 무능력 상태입니다. 사람구실 할 수 없는 죄인, 그 가난이 바로 죄입니다. 남한테 폐를 끼치는 그 무능력 상태가 죄 가운데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죄와 질병을 연결시키는 것은 이 파생적 죄인을 생각한 겁니다. 그 사람의 죄가 아닙니다. 인류 아담의 원죄가 가져온 죄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하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가시와 엉겅퀴가 바로 질병입니다. 찌르는 가시의 고통, 예수님이 죄를 자복했을 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간다 했을 때 이 표현은 너무나 신비하고 오묘해서 오래 묵상해야만 뜻이 통합니다. 저는 고민이 오래됐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1장 29-36절을 공부하면서 너무나 오랫동안 이 뜻을 깨닫기 위해서 분투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은 분투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회구조가 있습니다. 이게 죄인을 양산하는 구조입니다. 아무리 분투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그 사회구조 자체가 죄인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죄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때 죄라는 말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은혜의 직립인간으로 살 수 없는 총체적 무능력상태, 총체적인 무의지상태, 의지가 없음, 능력이 없음, 이것이 바로 죄에서 구원할 자, 이 말은 공동체 전체의 성격을 규명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정상적으로 직업을 선택하여, 젊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업활동을 통해서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 이스라엘이 죄 가운데 빠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를 이해한 겁니다. 예수님이 왜 세리를 이해했느냐면 세리가 공연히 세리가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비전이 없고 갈 곳이 없어서 선택하는 마지막 벼랑 끝 삶의 선택임을 예수님은 동정하시고, 세리와 창녀와 소문이 나쁜 여자들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신 겁니다. 마가복음 1장 5절에서 저마다 다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는데, 예수님은 도대체 세례요한 앞에 무슨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겠는가 생각해볼 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보았던, 예루살렘 역사의 지평을 두텁게 장악하고 있는 탐욕과 배제의 논리를 보았습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무서운 적대감을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 사이의 무서운 적대감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농민과 지주들 사이의 무서운 적대감을 보았습니다. 세리와 이스라엘 열심당원 사이의 무서운 적대감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갈가리 찢겨진 언약공동체의 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에 걸려서 공동체로부터 이탈된 죄인들을 보았고, 귀신들린 청년이 무덤 근처에서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을 보았고, 너무 의로 가득 차서 일반백성들과 자기들을 구별시킨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교만의 극치를 보았습니다. 이 모든 탐욕과 배제와 분리와 구별의식들, 그 모든 죄의 모순을 지고 가려고 예수님은 결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이스라엘의 죄악 되고 갈가리 찢긴 공동체의 참상을 고백한 겁니다. 어떻게요? 이렇게 고백했을 겁니다. 세리와 열심당원으로 구별 짖는 이 땅의 백성들이 화해할 수 있도록, 언약공동체와 돌봄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도록, 귀신들려 질병 들려 누워 있는 저 무기력한 군상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저 오만한 종교지도자들이 회개하여 겸손케 될 수 있도록, 저 세리들이 토색한 것을 토해내고 민중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자복하면서, 그 모든 죄를 당신이 죄악을 짐으로 영접하면서, 즉 죄를 자백하면서 그 죄의 짐을 자기가 질 것을 결단하면서 세례를 받았다고 봐야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세례 받는 모습을 보고,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왜냐하면 앞에 보십시오. 28절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나서 사건입니다. 그 이튿날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세례 주던 그 장면 때 충격적인 진리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자백하는 장면을 볼 때,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 근본적인 탐욕과 배제와 갈가리 찢긴 공동체 참상과 분열의 모든 죄를 자기가 뒤집어 쓸 것을 각오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하시려는 결심으로 이스라엘의 중심죄악들을 전부 다 자기가 지기로 결단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어린 양이로다, 저는 여기서 그 기도를 참 많이 했다고 봅니다. 문둥병자 그 짐을 제가 지고 싶습니다, 귀신 들려서 짐승 소리를 내는 저 아들딸들, 아버지 제가 지고 싶습니다, 그건 제 짐입니다, 저 탐욕적인 세리들의 죄책감 끓어오르는 마음, 그거 제 마음입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마음, 돌로 쳐 죽임을 당해 마땅한 그 마음 제 마음입니다, 주님 저는 이들의 죄를 내가 지고 싶습니다, 라고 이스라엘의 모든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그 죄를 예수님 자신에게 전가시키는 기도를 했기 때문에 아마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는 직관적인 계시를 보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독특한 무한책임적인 자의식이 어떻게 생겼을까? 예수님이 이렇게 무한히 자기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태도는 어떻게 생겼을까? 프로이드나 에릭슨 같은 사람들은 가학적 심리구조를 예수님이 당했던 가난의 구조, 피압박민족의 구조, 이런데서 심리적으로 풀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제가 볼 때 그건 부분적인 진실입니다. 그건 구약전통 안에서 하나님의 제물로써 레위기를 오랫동안 묵상한 끝에 나왔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레위기를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특히 16장에 1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 모든 공동체의 죄를 지고 가면서 성전에서 일곱 번 피를 뿌리면서 하나님 제단에 도살되는 어린 염소, 세상 죄를 지고 가면서 산 자에 땅에서 끊어지는 죽음의 광야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사셀의 염소, 이런 희생의 제물의 전통에서 이런 언어적인 표현이 나왔다고 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표현은 아사셀의 염소, 대속죄일에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그걸 예수님은 기억했다, 그런데 죄의 문제를 이렇게 치명적으로 이스라엘의 문제라고 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당시 예수님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죄가 이스라엘 근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 모든 종교주체들이 생각한 게 아닙니다. 열심당원 같은 경우는 로마제국이야말로 모순이다, 바리세인들은 아니다, 헤롯당 같은 자들만이 우리 민족의 죄악된 모순이다, 에세네파는 아니다, 도시에 사는 모든 녀석들이 전부 다 모순덩어리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아사셀의 염소 같은 짐승으로써, 세상의 죄와 연약함을 짐 지고 가겠다는 결단으로써, 이렇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세례를 받기 전까지 이 모든 무한책임추궁적인 자의식은 성령 받기 전에 어디 있었습니까? 이걸 생각해봐야 해요. 이건 제가 볼 때 갈릴리라고 하는 특수한 환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즉 그가 너무 많은 아우성에 노출됐을 것이며, 너무 많은 병자와 너무 많은 귀신들린 자와 너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눈물에 동정심이 단련되었을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건 일종의 귀납적 관찰입니다.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간디가 왜 간디가 되는가를 봐야 합니다. 제프리 애쉬가 쓴 <간디평전>을 보시면, 제가 지난주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제프리 애쉬가 쓴 <간디평전>에 그가 7년 동안 south 아프리카의 평범한 변호사, 그는 정말로 평범한 바이샤 출신의 정말로 평범한 사람입니다. 계급은 상인직업이니까 바이샤 출신입니다. 인도의 상위 계급 중 세 번째 카스트계급, 수드라 위, 바이샤 출신이었습니다. 소시민이었던 그가 동정심의 단련자가 됐느냐면 south 아프리카에서 푸대접을 받는 무굴인의 회교도 인도인들, 무굴인들이 푸대접 받는 것을 기차를 타면서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7년 동안 이미 south 아프리카 케이프타운 등에서 엄청난 굴욕적 대우를 받으면서 일하는 무굴인들의 일을 도맡아 하면서, 그들처럼 하면서 무굴인의 핍박과 몸서리치는 굴욕의 노출되면서 간디가 됩니다. 간디는 그때 간디 DNA가 형성됩니다. 굴욕과 비참에 노출된 인간에게 접촉을 하면서 그것에 단련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이란 정신문화적 토양에서 박탈당한 자, 귀신 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사람들의 아우성, 매 맞는 소작쟁의, 매 맞는 소작인들의 피눈물, 가곡의 맏아들 장례식, 하루에 한 데나리온 찾기 위해서 밤새도록 비질하는 여인 등의 종합적 일상생활에서 얻었던 귀납적 관찰력, 그런 감수성, 이것이 예수로 하여금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받고 대속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아들로 비약적 진화를 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문제는 그런 걸 많이 본다고 다 그렇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걸 절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성자처럼 무한책임적인 길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이건 아씨시의 프란체스코가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움브리아 평원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가 원래는 플레이보이였습니다. 여자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그냥 한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클라라라고 하는 한 아름다운 소녀가 움브리아 아씨시 깊은 산 속에서 문둥병자에게 빵을 갖다 주면서 문둥병자들을 양육하는 장면을 주기적으로 지켜보면서 영혼의 지진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자기 아버지, 부유한 방적 포목상이었던 아버지 지하 2층 3층에 전태일 보다 더 비참하게 일하는 피복노동자들, 방직기계를 돌리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완전히 인간이 바뀝니다. 그래서 헐벗은 사람이 되기로 작정합니다. 아버지의 모든 옷을 재판관에게 벗어주고 홀몸으로 갑니다. 그날 재판관이 자기 옷을 벗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가난에 대한 굴욕, 굴욕과 가난의 경험을 자세히 의미심장하게 관찰하는 사람 속에 성자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볼 수 없는 압구정동 사람들은 영원히 성자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성자가 나올만한 곳은 중랑구, 역곡, 광명시, 안양 비산동, 이런 데입니다. 성자는 비참과 굴욕에 단련된 사람 가운데 영을 받는 겁니다. 부잣집 아이 속에 크면 그 아이는 망가집니다. 망가진다는 말 미안합니다. 망가지는 건 아니지만 거의 감수성이 태반 안 된다는 뜻입니다. 가난과 비참과 생의 원초적 아우성과 전혀 연결되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성령이 도와달라는 필요성이 전혀, 가슴 사무친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 젊은 청년으로써 가난의 아우성, 피눈물 나는 아우성, 병든 사람, 과부의 고통, 과분의 오열, 이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겪다가, 이거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 나인성의 과부가 아들이 죽었습니다, 저 거라사에 제가 지난 번 목수 일하러 갔을 때 봤는데 두 청년이 몸을 흔들던데요, 제가 지난번 가버나움에 일하러 갔을 때 보니까 세리 한명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고뇌에 가득 차서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걸 봤습니다, 그때 제가 그를 부를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많이 쌓인 끝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세상 죄를 지고 간다할 때 예수의 귀납적 피교육 경험, 세상노출 경험,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하나의 벡터 같은, 하나의 지향성 있는 경험으로 예수를 몰아가서, 이것은 내가 해결할 일이다, 책임추궁적인 자기 사명이 발생하는 거죠. 여기에 위대한 컨트롤, 하나의 비약적 진보가 일어났습니다. 절대로 부자들하고만 살지 마십시오. 인간 버립니다. 비참과 굴욕에 처한 사람, 보편적인 인간성 밑바닥 경험에 노출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 속에서 아우성치는 인간의 핏발 선 눈동자를 보고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 제발 좀, 그래서 실제로 목회자가 정상적으로는 굉장히 인간성이 성장하기에 좋은 직업입니다. 참고로 알고 계십시오. 정상적으로는요. 정상적으로 교우들의 아픔을 놓고 기도하다 보면 점점 고통의 전이를 경험하면서 치료의 능력이 발생합니다. 그때 손을 잡으면 병이 낫는 겁니다. 그런데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은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그들의 핏발 선 절망도 응시하지 않으면 목사님은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처럼 되고, 구원독과점 업체의 주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채찍을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분께서 성경 읽으실 때 한 말씀 한 말씀을 가만히 응시하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는 그 말을 직관적으로 세례요한이 터트렸을 때,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고통에 대한 무차별적 노출과 인간의 연약성, 죄에 대한 무찰별적인 노출을 경험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열망이 많았기 때문에 성령의 내림을 받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예수님이 목수 활동하면서 겪었던 모든 부정적 양상의 경험들을 동정심과 한탄과 탄식에만 머물고 있던 예수님의 마음을 거대한 공적인 능력, 역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치환시켜주는 것, 그 동정심을 실제로 빛을 발하는 동정심, 눈물 아우성에 대한 공감을 진짜 사람을 살리는 공감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비둘기 같이 임한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 됩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시에 임하는 성경구절은 에스겔 36장 25-26절 밖에 없습니다.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에 성령으로 마음에 인을 쳐서 여호와의 율법을 행할 능력을 주는 분은 이제 성령세례입니다. 에스겔 36장 25절은 물세례, 26절은 성령세례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을 이스라엘에 데뷔시키기 위함이었다라고 합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은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서 극한의 자기 부인을 일삼는 사람, 다시 말해서 완전한 순종의 화신이 걸어간다, 이 세상의 모든 모순이 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부인의 영성화신이 저기 온다, 112%의 주택보급률에도 불구하고 집 없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내가 집에 대한 탐욕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렇게 비참한 사람이 많이 아우성치는 것은 내가 탐욕과 배제의 논리에 안주하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자기부인의 영성, 그게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됩니다. 대한민국의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서 예수님이 재성육신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다시 한 번 하늘보좌에서 내려와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우리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복제인간이 돼야 할까요? 우리가 한강물에 빠져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시 한강물에 빠져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복제 어린 양이 되도록, 복제양 돌리가 아니라 복제양 예수가 되겠네요. 복제양 예수가 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 우리가 예수의 얼 예수의 영을 받아서 세상 죄를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면 그 일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하신 일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되는 거죠. 그런 태도가 예수님께 의존하는 태도죠. 그렇지 않고 이 모든 사태를, 예수님 도와주십시오,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내려와 주십시오, 한강에 첨벙 뛰어들어 주십시오, 하는 것은 노예적 의존입니다. 자기 실천의 책임을 방기한 채 모든 걸 예수님께 맡겨버리면 지극히 잘못된 의존입니다. 이런 잘못된 의존을 니체가 아주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지금 한국 목사보다 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모든 걸 신에 맡기고 실천하지 않는 완악한 기독교인을 공격한 겁니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 다행이다, 예수는 실천했고 믿는 대로 살았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모든 걸 예수에게 맡겨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너무나 적확한 지적입니다. 제가 볼 때 니체보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모방입니다. 믿음은 의존이고, 의존은 모방과 투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의존하고 모방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다는 말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죄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재인식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인식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구원을 몸서리치게 열망하는 사람들 옆에서 그들의 숨결에 공명하는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그 길을 따라가도록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는 게 너무 잘못됐어요. 하나님께 맡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얼과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모든 죄책의 궁극적인 책임소재를 자기에게 전가시키는 이 행위야 말로 예수님의 발자취요. 예수님을 의존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바른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살지 못할지라도 이것이 바른 가르침이라는 합의에는 이르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써 사례가 너무 많지만 4가지만 들겠습니다. 제가 7천만 원 빚진 동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동생아 내가 네 7천만 원 빚을 갚아 줄 테니 빚 채무증서를 나에게 주라,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 내 동생은 짐이 가벼워집니다. 대신 그 모든 7천만 원 모든 짐은 어디로 갑니까? 나에게 옵니다. 이 세상은 물의 양도 바뀌지 않습니다. 에너지와 질량도 안 바뀝니다. 이 우주 대기권 안에 있는 모든 질량과 에너지와 물은 똑같습니다. 그건 어딘가에 다른 에너지로 바뀌었을 뿐이고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고, 장소가 전이돼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간다면 절대로 우주 바깥에다 버리는 거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걸 지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궁극적인 짐을 어디다가 내려놓습니까? 하역합니까? 그 짐의 최종 하역처가 예수님 자신입니다. 마태복음 8장 14-17절, 찾지 마세요. 기억해야 합니다. 경전이 짧은 종교를 믿는 저는 복된 자입니다. 얼마나 성경 짧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1년에 너댓번 읽을 수 있는 이렇게 짧은 성경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불순종의 죄악이 가득 찬 세상에서 성경이 어렵다느니 무겁다느니 길다느니, 이런 모든 사탄적 음모, 사순절에 살살 꼬아도 읽지 않고, 이게 바로 파생적 죄인입니다. 여러분은 최초의 죄인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죄악된 문화에 태어나서 죄악된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있는 파생적 피동적 죄인으로써 그러나 온전히 지옥가기에는 부족한 죄인들입니다. 이런 죄 가운데 사는 우리가 죄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사는 이런 무기력 상태를 짐 지고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죄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 14-15절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열병이 어디로 떠나갑니까? 여러분 궁금해야 합니다. 열병이 어디에 갔을까? 의사 선생님 열병은 짐 맞죠? 열병은 에너지 맞죠? 질량입니다. 열병은 칼로리가 뜨겁지 않습니까? 그건 분명히 에너지 아닙니까? 열을 만져보세요. 에너지입니다. 그 열을 만든 에너지가 있는 겁니다. 그게 지금 어딘가로 갔습니다. 열이 떠났으니까 어디가 있어요? 8장 17절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예수님이 죄를 자백했을 때는 병자를 위해서 많은, 모든 병자의 짐을 질 것을 결단하셨음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은 말을 통해서 채무증서를 가져갑니다. 중풍병자에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그 순간에 그 중풍병자가 침상을 번쩍 들어서 그 중풍병자의 온 몸을 비트는 마비와 무기력은 예수에게 전가가 됐습니다. 짐을 졌죠? 예수님의 사랑의 말이 바로 짐을 지는 행위입니다. 동생아 내가 네 빚을 갚아줄게, 짐을 지는 행위 아닙니까? 말만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짐을 하역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말이 사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죄악의 사슬에 있는 사람을 푸는 신비한 신적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말이 너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8장입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돌로 손에 가득 찬 회중에게 맞아죽기 직전에 왔습니다. 돌을 가득 든 회중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순간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자세가 몸매가 머리가 헝클어진 수치감으로 찌든 여인과 같이 엎드린 채 몸을 구부린 채 땅 바닥에 글을 쓰시면서 하는 말이, 여러분 중에 한 번도 간음죄를 범해보지 않은 분이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십시오, 하니까 노인들이 아무래도 오래 살다보니 간음죄를 많이 범했기 때문에 노인부터 돌을 놓고 젊은이까지 돌을 놓고 다 갔습니다. 이때 그 여인의 수치감을 대신 짐 져주기 위해서 자태를 구부렸습니다.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수치를 영원히 짐 지기 위해서 돌을 쳐든 군중의 분노를 여인으로부터 누구에게 전이시켰어요? 자신에게 전이시켰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10절입니다. 삭개오 집에 들어가서 그 죄인 삭개오가 들었던 모든 악명과 비난을 죄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삭개오는 명예가 회복되고 예수님은 삭개오의 모든 더러운 짐을 지게 됩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다는 말은 삭개오의 모든 악명과 나쁜 소문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삭개오에게 향했던 분노의 눈길은 예수를 향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 30절입니다.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생화학적 반응이 일어났다, 내 능력이 빠져나갔다, 내가 휘청거리고 현기증을 느꼈다, 내 몸이 현기증을 느낄 만큼 능력이 빠져나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짐을 지는 행위입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짐을 지는 행위가 바로 혈루병 여인의 몸을 고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십니다. 우리 죄를 지고 가셔야만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죄를 져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죄 우리의 수치감과 연약함 무기력을 예수님이 져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 수종할 의지가 없는 고의적 불순종도 예수님이 져주셔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할 수 없는 총체적 무기력상태, 식물인간 상태도 예수님이 처리해주셔야만 내가 은혜의 직립인간이 됩니다. 레위기 26장 13절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은혜의 직립인간이 돼서 똑바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시려면 내 죄짐을 주님이 대신 짐 지셔야 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주님이 말씀해주심으로 여러분 영혼의 죄짐을 다 짐져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짐을 대신 짐져주시므로 우리는 자유인이 돼서 세상 사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갈라디아서 6장, 가난의 짐을 지라, 장애의 짐을 지라, 경제적 부담의 짐을 지라, 그래서 짐을 지는 범위가 조금씩 넓혀지면 거의 예수님과 같은 상태, 즉 이 세상의 모든 죄짐을 지겠다는 결렬한 확신들, 여기서 성자가 나오고 위대한 인물이 나오고 사상가가 나오고 사랑의 사도가 나오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기독교인이 필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예수님 발자취를 따르는 어린 양, 자기 부인의 화신들, 그들이 이 세상에 필요합니다. 파생적 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세상이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죄로 가득 찼기 때문에, 죄 짓지 않고 살 수 없어서 사나워지고 죄인이 된 사람들, 그들의 죄짐도 우리 주님이 풀어주시고 우리 주님이 져 주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의 죄짐을 져 주실 때 성령이 여러분에게 임합니다. 성령은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의 짐을 질 수 있는 또 다른 복제양, 어린 양 예수가 되게 하십니다. 가향 복제양 예수의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죄짐을 져 주시는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짐을 요단강 깊은 곳에 집어던져서 자유롭게 되는 은혜의 직립인간이 되는 놀라운 영적진화가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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