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내주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 이광호 목사(실로암교회)
성령의 내주(內住)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염원이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베푸시는 온전한 은혜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작정과 사역 없이는 결코 인간에게 성령이 내주할 수 없다. 개개인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은 단순히 개인의 목적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을 인간적인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은 멸망의 대상일 따름이다. 종교적인 목적을 앞세워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도 일한 악행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항상 그런 일들이 발생했다. 사도교회 시대에도 그런 악행은 빈번히 있었다.
사도행전 8장 5절 이하에는 빌립이 사마리아 땅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표적을 일으키며 병자들을 고쳐준 기록이 나온다. 그로 인해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게 된다. 그것을 본 시몬(Simon)이라는 자가 자기도 성령을 받기를 원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자 했다. 우리는 시몬이 성령을 받고자 했던 동기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성령을 받아 자기의 종교적 목적을 추구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유익을 끼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성령의 능력을 직접 격한 시몬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성령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돈을 들여 성령을 받고자 하는 시몬에게 도리어 저주를 선포했다(행 8:18-20).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이 원하기 때문에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들을 통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지역에서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안수하여 교회 안으로 초청하였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6).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사도를 통한 교회로의 초청을 의미한다. 사도교회 시대가 끝난 보편교회 시대에도 개인의 종교적 여망에 따라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통해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진다. 1. 개별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형상과 직접 연관된다. 이는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과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성령의 내주와 하나님의 선택 및 형상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의 씨’(the seed of God)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들에게는 원래부터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는 처음부터 ‘그의 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됨으로 인해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 출생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선택된 자녀들에게도 파괴된 채 그들 안에 잠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에게는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해 계셨음을 의미한다. 아담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길 수 었던 까닭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던 그에게 성령이 내주해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성령강림이 있기 전의 선택받은 성도들은 저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메시아를 소망하며 살았다. 이는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는 것과 연관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며 그를 섬기면서 궁극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메시아를 소망하며 기다렸던 것이다. 1) 중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내주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중생이 선포되었다. 이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출생을 의미한다. 오순절날 강림하신 령께서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 사람이 된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시게 된다.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선포와 예수님의 회개의 선포는 성도의 중생과 연관된다. 중생이란 옛 사람의 죽음을 전제하며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옛 사람은 죽게 되고 새 사람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성령의 내주와 충만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중생한 성도들은 옛 사람이 죽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산 것은 죄악에 물든 인생으로서 육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자기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와 더불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성령 충만이다. 바울은 이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삶을 일컫는다.
나아가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내주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와 방편을 이해해야 한다. 어리석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내주하신다면 몸 어느 부위에 어떻게 거하고 계시는가? 성도의 머리 혹은 두뇌에 거하실까? 아니면 성도의 마음이나 가슴에 거하실까?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부위에 어떤 양상으로 거하고 계실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성령의 내주하심이 실제가 아니라 단순히 상징적인 것인 양 해석하려는 신학적 경향성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성령은 거듭난 자기 자녀 안에 내주하실 뿐 자신과 무관한 불신자에게는 내주할 없다는 사실이다. 2) 성도 안에 상주(常住)하시는 성령 하나님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항상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 성령께서는 결코 주거를 옮기시지 않는다. 밤이든 낮이든 깨어 있을 때든 잠자리에 있을 때든 항상 내주하고 계신다. 성도들이 그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認知) 혹은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생의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그 순간부터 중생한 성도들 안에 항상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다가 형편에 따라 종종 자리를 떠나는 분이 아니시다. 즉 내주와 외출을 되풀이하시지 않는다. 어떤 때는 내주하셨다가 어떤 때는 외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에 대해서는 성도의 견인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2절에서 이와 관련하여 ‘속사람’(inner be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칼빈은 ‘속사람’을 단순한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영혼의 영적인 부분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는 거듭난 영을 ‘속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곧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3) 입술로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가 또한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교회 가운데 특수한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잘 생각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성도들의 중생과 성령의 내주가 인간의 지적 판단여부에 달려 있는 것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가운데는 일반적인 지적 판단 능력이 결여된 성도들이 있다. 지상의 교회들 가운데 그런 성도들이 없었던 경우는 없다. 항상 장성한 성도들이 돌보아야 할 어린 성도들이 교회 가운데 있기 마련이다. 정신 지체를 가진 성도들과 태아, 영아, 유아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 그들은 복음 전파에 의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능력이 없지만 택함받은 자들의 경우 저들 가운데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고 계신다. 우리는 개개인 성도들의 중생 시점에 대해 알지 못한다. 성숙한 성도들의 경우 씀과 교회의 증거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다.
이는 성령의 내주하심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인간의 종교적 신심(信心)이나 경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뜻에 의거한다. 그렇지만 지적 판단능력이 부족한 성도들에 대해서는 교회 공동체의 객관적인 신앙적 인식과 판단을 요구한다. 이는 그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내주가 외적으로 보증되는 나님의 언약에 근거함을 말하고 있다. 2. 성령의 내주와 연관된 교회적 적용 성령께서는 개개인 성도들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참된 교회 가운데 내주해 계신다. 이는 교회를 위한 통치적 근거와 연관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 내재적으로 존재하며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세상 만물 안에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그에 동의할 수 없다.
성령은 결코 범신론(汎神論)적 존재가 아니다. 성령 하나님은 세상 만물 가운데 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다. 성령은 만물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상을 감찰하고 계시는 분이다. 1) 오순절 성령사건 이후부터 사도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구속사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보편교회 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 요구의 말씀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약속된 성령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오순절날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초기 공동체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성령 강림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님의 명령과 약속에 따라 성령을 기다리던 초기 공동체에는 교회의 기초가 는 열두 사도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이 강림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섭리적으로 성령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사도교회의 구속사적 활동으로서 이후 따라오게 될 보편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곧 이후 존재하게 되는 모든 교회들의 근간이 되었다. 역사적인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오순절 성령께서 임하신 열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그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은 오순절 성령이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강림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교회의 기초가 되는 특별히 선택된 성도들의 공동체 가운데 임하셨다. 즉 성령께서는 교회 밖에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교회 공동체 안에 강림하셨다.
교회 가운데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지금까지 줄곧 교회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것을 간섭하고 계시지만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분이다. 즉 성령께서는 교회 가운데 거하시면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며 세상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고 계신다. 2) 매 주일 행해지는 성찬을 통해 증거되는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의 주된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요 15:26). 이는 성령께서 오신 목적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는 교회 가운데서 발생하며 그것은 말씀선포와 성찬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은 오늘날도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시던 당시의 그리스도께서는 보편교회 시대의 모든 참된 교회들 가운데 내재하신다. 주님의 보혈은 식어 냉랭한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온기가 있는 상태로 교회 가운데 내주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에는 매 주일마다 주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찬이 지속적으로 나누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님의 재림 때까지 성찬을 나누며 그것을 기념하도록 명령하셨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위한 생명의 공급을 의미한다. 교회 가운데서 나누어지는 성찬은 그리스도의 내주를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예배 가운데 성찬을 나눔은 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통해 교회 가운데 내주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배 중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찬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 내주하고 계심이 드러나게 된다. 3) 예루살렘 성전파괴 이후 보편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하나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의 최종적인 성취를 보여준다. 이는 사도교회 시대에 있었던 계시적 은사들의 완성을 포함한다. 나아가 사도교회들 가운데 존재했던 계시적 직분들 역시 그것을 통해 완성되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가운데 항상 내주하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찬 나눔을 통해 자신의 내주하심을 지속적으로 확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특히 교회 가운데 시행되는 성찬을 위해 친히 사역하신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방해하거나 막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령의 간섭을 통한 올바른 성찬의 의미가 사라진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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