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곳의 선한 사람 / 열왕기상 18:1~6
저는 목사로서 악한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서 살고 있는 여러 평신도들을 생각할 때 가끔 연민의 정을 느끼곤 합니다. 이런 데서 신앙생활하기가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에 동정심 내지는 측은한 마음이 생깁니다. 어떤 교인은 제게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목사님, 세상을 좀 아세요?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아세요?" 왜냐하면 목사는 세상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주로 교회 안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선 잘 모른다는 인식을 갖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은 인생 최전선에서 뛰는 사람들이고, 아무래도 저는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므로 여러분들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제가 다 경험하진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을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솔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설교 시간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무 심한 말을 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사정을 동정해서 제대로 말씀을 전하지 못할 때도 더러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만큼 여러분들은 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기 조차 어려운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선한 것을 선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악을 악이라고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벌써 그런 시대가 우리 눈앞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앨런 블룸(Allen Bloom)이라는 미국의 어느 대학 교수가 최근에 잡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학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 사건,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한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이런 끔찍한 사건을 앞에 두고도 '그것을 꼭 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은근히 비치는 경향이 많다고 합니다.
이렇듯 선과 악의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상대적인 도덕관을 가지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언을 거부하려는 도전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반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도덕주의가 이미 우리 주변에 진을 치고 가치관까지 잠식해 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과거에는 깜짝 놀라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하던 것도 요즘에 와서는 "그럴 수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예전에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던 것들이 요즘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매우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들 모두가 절대 진리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는 상대적인 태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좋으면 선일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독할 정도로 간교해진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선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처신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악한 곳에서 선한 사람으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때마다 난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오바댜를 주목하면 그에게서 작지만 매우 강렬한 진리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그가 살았던 당시의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한 선민의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수백 여 민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뽑아 하나님의 것으로 삼은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시고,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신정국가로 통치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에 다원종교라는 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원종교가 허용되는 국가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기독교를 믿는다 할지라도 한 나라의 정치를 기독교 식으로 할 수 없습니다. 타종교에 대한 존중은 물론이고, 타종교인들이 인권을 가지고 국민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방된 나라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절대로 타종교가 용납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한 지 벌써 5-6천 년 이상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민족은 세계 어디에 갖다 놓아도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두뇌가 발달한 민족이요, 정치, 경제, 모든 문화 영역에서 최대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수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북 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으로 아합이등장합니다. 아합은 세습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자격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줏대가 없고, 가볍고 경솔했으며, 리더쉽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 역시 이세벨이라는 굉장한 독종을 만났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과는 무관한, 대대로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성격마저도 매우 잔인하고 간사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남자를 어떻게든 꾀어 제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하는 아주 못된 근성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왕과 왕후 아래 나라의 형편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이 뻔합니다. 아합왕은 이세벨의 손에 붙잡혀 이스라엘을 온통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왕의 강압적인 우상숭배 정책에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에서 아합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16:30)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16:33) 얼마나 하나님 앞에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심판을 하셨습니다. 3년 반이 넘는 가뭄을 허락하셔서 온 이스라엘 나라가 초토화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왕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댜는 궁내 대신으로 아합왕의 가장 충성된 신하였습니다. 오바댜는 참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는 사악한 왕 밑에서 어떻게 그가 궁내 대신으로 봉직할 수 있었을까요?
3절에 의하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되 적당히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며 사랑했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바댜 역시 자신을 일컬어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12절) 따라서 이처럼 경건한 사람이 어떻게 아합과 같은 왕 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그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 신전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는 마당에 어떻게 우상숭배에 몸을 더럽히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엘리야 역시 오바댜가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임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한 마디로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오바댜를 주목하면서 발견한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함께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도 오바댜처럼 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서 영적인 진리를 교훈 받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 인가를 스스로 각오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바댜가 살던 시대나, 대신으로 있던 아합 궁전에는 구조적으로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악한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은 도망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등을 돌린 채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경건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 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은 100이면 100 다 그렇게 권면합니다. 악한 곳에 몸을 담고 있으면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아니면 그 악과 싸워서 순교를 하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오바댜는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피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궁정에서의 그의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요, 소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바댜에게 그런 내면의 음성을 주시고, 명령을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가 끌려간 애굽은 온통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이방국가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아마 요셉 혼자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악한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요셉은 도망가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지켰습니다.
다니엘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끌려가서 포로생활했던 바벨론, 특히 바벨론 궁전은 갖가지 우상숭배로 더러워져 있는 구조적으로 악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평생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사람으로서 자기 위치를 고수했습니다. 그는 자살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고린도 성도들이 살던 고린도라는 도시는 음란하고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던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파는 모든 음식들은 우상의 제단 앞에서 술을 뿌리고 분향했던 음식이었고, 이런 음식을 사서 먹어야 하는 오염된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아무것도 사먹지 말고 굶어 죽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신앙인으로 바로 살되, 음식을 대해서 제사 음식 여부를 묻지 말고 그대로 기도하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 곳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유대나라 사람들이 혐오하고 비난하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 역할을 한 세리장이었지만, 그가 예수를 믿자 부정하게 벌어들인 재산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해주겠다는 신앙의 큰 변화를 맛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세리직을 그만두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쉽게 말해 하나님의 뜻은 구조적으로 악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제자들이나 백성들을 아예 별거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악한 세상에 그대로 남겨 놓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몸담고 있는 주변 환경을 봅시다. 얼마나 구조적으로 악합니까? 신학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악이 온갖 형태로 온상을 이루고 있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선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살면서 악한 세상을 향해 책망하시다가 결국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런 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대신 오바댜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구조적인 악은 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계를 보십시오. 누군가의 말처럼 비리로 날이 밝고 은폐와 축소 수사 의혹으로 날이지는 부패한 현장이 바로 정치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썩고 선한 것이 보이지 않는 정치계라고 해서 우리가 도망가야 합니까? 정치에 뜻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소수이지만 그 안에 있음으로 우리의 존재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명령하십니다.
경제계를 보십시오. 우리 나라 경제계가 얼마나 투명하고 양심적인지 아직도 말하기가 어려운 현실입니다. IMF라는 엄청난 홍역을 치른 후 문민정부를 통한 개혁이 있었지만 과연 얼마만큼 달라졌는지 자신있게 말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몇 일전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송달 장로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수년 전 그분이 저를 찾아와 했던 이야기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는 회계, 재무 관계를 다루는 아주 탁월한 회계사입니다. 국내의 유수한 기업 재무를 정부의 지시에 따라 조사, 분석하여 정부에 보고하는 일에 총 책임을 맡았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각 기업의 사정을 한 눈에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저를 찾아와 길게 탄식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나라 경제가 큰일 났어요. 회계 감사 결과, 수백 억이 비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계속 보내어 그대로 장부를 만들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마이너스 500'(-500)을 '플러스 500'(+500)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바로 되겠습니까?" 그리고는 얼마 안 지나서 IMF가 터졌습니다. 이렇게 썩고 구조적으로 선한 것이 없는 경제계를 그대로 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도망가야 합니까? 비록 구조적으로 악할지라도 경제에 뜻을 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속에 있음으로 우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바댜가 주는 교훈인 것입니다.
연예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이 환각제와 마약을 복용하는가 하면 성 스캔들도 빈번하여, 마치 발을 들여 놓아선 안될 곳으로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악할지라도 우리가 등을 돌려선 안됩니다. 오늘날 문화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문화에 뜻을 두고 은사가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연예계에도 발을 들여 놓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도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가장 악한 황제였던 네로 황제의 궁정에도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북한 공산당 집단 에도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악하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발을 떼던지 등을 돌리면 안됩니다. 아마 오바댜는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리는 나라에 있으면서 궁내 대신의 역할을 바로 하기 위해 요셉과 다니엘처럼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더 신임을 받고 자기 입지를 지키려면, 정직하고 탁월하며 모든 면에서 흠잡을게 없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 일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했을지 족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가 우리에게 유익한 한 마디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밖에 있으면 안됩니다. 반드시 불신 사회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불신 사회에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신 사회에 들어가서 그들과 똑같이 동화되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됩니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을 등지면 안됩니다.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우리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오바댜처럼,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나?' 하고 느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자라도 천을 이루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며, 성령의 능력을 입으면 세상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으면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오바댜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될 교훈이 있습니다. 도전적인 악에 대해서는 대범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도전적인 악이란 신앙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악입니다. 신앙 양심을 더럽히려고 공공연히 도전하는 악입니다.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에 살다 보면 이런 악의 도전을 종종 받게 됩니다.
오바댜도 그와 같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왕후 이세벨이 모든 백성들로 바알신에게 절하라고 명령했는데, 이에 반항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대략 수천 명에 이르는 선지자들이 결집해서 왕과 왕후의 정책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피에 목말라 하던 이세벨이 군대를 동원해서 선지자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끔찍한 상황을 오바댜가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은 궁내 대신으로 있기에 하나님을 섬긴다 해도 칼을 피할 순 있었지만, 선지자의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다 끌려가서 순교할 수 밖에 없는 아주 위급한 상황을 그가 지켜보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오바댜의 양심은 틀림없이 갈등했을 것입니다. '내가 안전하다고 해서 뒷짐지고 구경만 하고 있어야 되겠는가? 나 혼자 경건하면 되겠는가?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이런 갈등 끝에 그는 '가만히 있어선 안되겠다. 행동을 해야 되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혼자 경건해야 될 때와 행동해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가릴 줄 아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될 때와 분명히 "아니요"라고 말해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았습니다. 의의 편에 서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분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가만히 있으면 양심이 가책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태도까지도 무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바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힘닿는 대로 선지자들을 빼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세벨의 눈을 피해 약 100명을 빼돌려 갈멜 지역에 있는 천혜의 동굴에 두 그룹으로 나누어 숨겼습니다. 이곳에 약 2000여 개의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 아프카니스탄의 토라보라 지역에 천혜의 동굴이 있다고 신문 지상을 통해 많이 듣지 않습니까? 바로 그곳에 선지자들을 50명씩 두 군데에 숨겨 놓고는 남모르게 먹을 것을 매일매일 공급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행동입니다. 만약 그런 행동이 조금이라도 들통이 나면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생명 걸고 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오바댜는 그렇게 해서 그 선지자들을 살렸습니다.
우리도 악한 세상에 살다 보면 우리의 신앙 양심을 건드리는 악의 도전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 도전 앞에 우리가 잘못 행동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자체를 포기해 버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이나 폭음을 강요 당할 때, 뇌물로 회유를 당할 때, 탈법을 획책하도록 유인 당할 때, 비양심적으로 거래하도록 유혹할 때, 더러운 장사를 해서 떼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골적인 도전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바댜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겨둔 것처럼,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급기야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갈 정도로 도전적이었던 것처럼, 또 다니엘의 신앙을 뿌리 채 흔들어 놓으려는 도전 앞에서 사자 굴로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마지막까지 담대하게 대응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도전적인 악 앞에서 도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미지근한 태도로 반응하면 우리의 양심도 더러워지고, 나중에는 우리의 신앙마저 뿌리 뽑힐 것입니다.
가끔 그런 성도들이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에 살면서 도전적인 악 앞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성도들입니다. "세상이 다 악한데 어떻게 합니까?" 하고는 적당히 세상을 따라가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비극이라고 생각됩니다.
비근한 예로 한두 달 전에 제가 시골에 가서 겪었던 일입니다. 시골에서 3일 정도 있다가 와야 될 상황이 생겨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시골에는 숙박시설도 마땅치 않은데, 마침 아담한 숙박시설이 있어 그곳에 예약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가서 짐을 푸는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거실 유리 문에 커다랗게 십자가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또 밑에는 작은 십자가가 양쪽에 하나씩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삼위일체를 상징하려고 했는가 봅니다. 한편 너무 이상해서 옆방을 보니, 방마다 똑같이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집 주인이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조금이라도 전도할 수 있을까 해서 아마 이렇게 그려 놓았나 보다.'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중에 주인을 만나 인사를 했는데, 어느 교회에 다니는 집사라고 했습니다.
이제 저녁이 되어 TV를 켜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리모컨을 누르면 TV 채널이 바뀌는데, 그 채널이 KBS, MBC, 성인영화로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외국에선 성인영화를 보려면 돈을 결제한 후 시청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채널을 피해 갈 수 없도록 아무런 제동장치 없이 버젓이 다른 채널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애들이 있는 가정이 그곳을 갔었더라면 바로 나왔을 것입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투숙객들이 그런 요구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사람들의 요구에 불응하면 돈벌이가 안될 것 같아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창문에는 십자가를 그려놓고 TV에는 성인영화를 방영하니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이중적으로 생활을 해서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이런 이중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도전적인 악 앞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될 때는 지켜야 되고, 대범하게 반응해야 될 때는 반응해야 됩니다. 그런데 적당히 반응을 얼버무리다가 세상 사람과 별 다른 것이 없는 사람으로 비쳐질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이 이긴 세상이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자신을 지키려고 하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습니다. 오바댜가 자기을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아무리 마귀가 돌아다니면서 우리를 물고 늘어지려고 해도 우리가 기도하고 깨어 있으면 어떤 도전적인 악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비전을 가집시다. 나 한 사람이 도전적인 악 앞에서 진정 예수 믿는 사람답게 처신하면 어려운 일이 생겨도 결국은 이길 것입니다. 그런 나 한 사람을 통해 구조적으로 악한 주변 상황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로 바뀔 수가 있다는 비전을 가집시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오바댜처럼 우리 자신을 바로 지키고 바로 행동하면 이 세상이 변화됩니다.
버클리 대학의 로버트 벨리 교수가 세계 국가의 흥망성쇠를 전부 연구한 결과, 결론적으로 내린 말이 있습니다. "어느 국가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그 국민의 2%가 새로운 비전을 가지면, 한 나라의 문화가 달라질 수가 있다." 2%가 적은 비율이지만 과거 역사를 연구해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 자답게 행동하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집시다. 그러면 이 세상은 비로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역사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악한 세상에서 데려가시지 않고 남겨놓으신 이유가 있는 줄 믿습니다. 세상이 구조적으로 악하지만, 이 속에서 우리의 존재가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구별하시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며, 성령으로 능력 있게 만들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도전적인 악을 많이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오바댜처럼 행동할 줄 아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해 주시고, 다니엘과 요셉처럼 담대하게 대응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비록 적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바로 살면 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비전을 갖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자리에 머리 숙인 주의 자녀들을 주님께서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을 고쳐주시고 이 땅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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