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후광
삼상 17:45-49
다윗이 불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곧 네가 모
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좋은 재산은 용기입니다. 용기있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자신의 뜻을 조목조목 말할 수 있는 용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장점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 필요시 아니요 와 예를 분명하게 말하고 자신이 필요할 때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헌신의 도구로 내 놓을 수 결단, 이것은 모두 용기입니다.
오늘은 이런 용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여대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학생들이 느끼는 가장 추한 남학생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여학생들이 대답하기를 “여학생 앞에서 덜덜 떠는 남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용기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남자가 가장 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자 하면 용기, 자신감, 결단력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젊은이가 찾아와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하여 지금 고민이라고 말합니다. 헤어지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남자가 용기도 없고 박력이 없어서 인생을 맡기고 살기가 불안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약속을 해도 모든 결정을 여자 친구에게 일임한다고 합니다. 음식을 시킬 때도 여자 친구에게 선택권을 일임하고 친구가 선택하는 것을 자신도 따라서 선택한다고 합니다. 그런 우유부단이 여자친구 마음에는 용기도 없고 결단력도 없는 것 처럼 보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그 남자 친구에게 일생을 맡기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나 용기가 없으면 평생 믿고 살아가기가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언하기를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오늘 당장 전화해서 보고 싶으니 퇴근 후 몇 시에 어디로 나와라 하고 전화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자친구가 이 친구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용기, 자신감, 믿음, 확신처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이지 않는 재산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재산 중 재산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몇 가지 재산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지식의 재산”입니다. 오늘은 지식사회입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오늘은 기술, 지식, 정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능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밀리지 않고 낙오되지 않고 앞서가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지식이 재산인 시대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나 혼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시대입니다. 반드시 좋은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형제, 좋은 친구, 좋은 이웃과 좋은 지인들은 모두 좋은 이웃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평생 함께 해주고 때로 용기도 주고 나를 보호해주는 좋은 이웃들입니다. 이런 이웃들이 없으면 살아가기가 외롭고 힘듭니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을 보십시오. 남한에 오직 혼자뿐입니다. 그래서 명절 때면 가장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삶의 터전을 다 이루었어도 이 고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고아들을 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겠습니까. 다 이루었으면 뭣합니까. 봐주고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고향, 내나라, 부모, 형제, 이웃, 친구는 참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가 도움 주는 관계로 만들어야 하고 내가 도움 받는 관계로 이루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특히 우리 신앙인은 영적인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영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 도움이 없으면 오늘 같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효과적으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세상 살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힘을 받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 도움, 함께 하심을 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인의 생활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은 나오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본문은 아무리 보아도 신비스러운 내용입니다. 골리앗과 다윗이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비교가 안 되는 상대입니다. 확률로 보면 100:0입니다. 도박사들이 도박을 걸었다면 골리앗은 100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0입니다. 그런데도 이 싸움에서 다윗이 이깁니다.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아가는 다윗의 눈빛을 보십시오. 다윗의 눈빛은 상대방을 제압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옛날 전투에는 기선을 제압하는 눈빛이 좌우했습니다. 그 눈빛에는 아주 무섭고 날카로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내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아간다”. 누가 이런 사람을 당해냅니까. 그런데 골리앗은 코웃음을 칩니다. 방심합니다. 누가 전투에서 방심합니까. 그러니까 다윗이 던진 돌이 방심하던 골리앗의 이마 통에 박혀 쓰러진 것 아닙니까.
이 영적 자신감, 믿음, 용기, 주저 없음이 얼마나 강력한 힘입니까. 이런 용기, 힘, 능력, 확신 이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요소들은 하나님의 후광을 입는데서 오는 힘이고 용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나야 이런 후광을 입고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몇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 속에서”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하나님은 기도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하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신앙인의 일상의 생활입니다. 그 일상의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무한한 힘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기도의 삶입니다. 간디는 일주일에 하루는 침묵의 날로 정해놓고 묵상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간디는 무한한 힘을 공급받고 그 힘으로 무저항의 싸움을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경우는 고넬료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고넬료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고넬료가 제 9시에 기도를 합니다. 오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입니다. 그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피고한 시간이고 여름으로 말하면 가장 더운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그 말은 고넬료가 매일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아마 고넬료는 그런 기도하는 삶을 오랫동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기도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기고 앞날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렇게 기도하는 시간과 삶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살인을 전과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루도 왕궁생활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를 회상하면 오늘 자신의 초라함과 형편없이 낙오됨에 크게 비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놔두실 것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얼마나 심각한 기도입니까. 좌절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너 있는 곳에서 신을 벗으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모세가 그때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애굽으로 가라, 가서 고통받고 잇는 네 민족을 구원하라”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부름 받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중요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세 번째는 “실패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실패는 가능하면 하지 않으면 좋습니다. 실패를 해도 평생 한번쯤으로 족한 것입니다. 실패의 순간은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참 불행한 자리입니다. 실패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뺏고 실의를 안겨주고 고뇌하게 하는 그런 순간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신앙인들에게 실패의 순간은 참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보면 실패는 축복의 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신앙생활이 아주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역장 애를 많이 먹였습니다. 교회 가자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지고 회피하고 구역장 애를 태우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곗돈 부어야 한다고 주일날도 일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토록 힘을 다해 정성을 쏟던 계가 깨졌습니다. 구역장이 “이제는 구원이 완전히 불가능해졌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해서 집에 가 보니 찬송을 부르며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나는 이번 실패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깨달았어요“ 하고 말합니다. 이 경우가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실패는 어떤 면에서 새출발의 시간이고 눈을 뜨는 시간이고 은혜를 입는 순간입니다.
작가 오혜령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인생을 보면 참 파란만장합니다. 이분은 4살 때 폐렴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국교 4년 때는 신장염, 방광염, 관절염에 걸려 2년 동안 혼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여고 1년 때는 하반신 마비로 2년 동안 누워 있다가 겨우 두발로 일어납니다. 1주일 뒤 불치병 진단을 받고 2년 동안 누워 살며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기고만장합니다. 그러다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납니다. 다음해에는 갑상선으로 고생하다가 겨우 낫는가 했는데 1주 후에 위암판정을 받습니다. 그때 이 분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하나님 당신이 자비하시다구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요, 웃기지 마세요”하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얼마나 화가 나고 원망스럽고 분노스러웠겠습니까. 그 심정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런데 위암이 임파선 암으로 번져갑니다. 그때 이분이 자살을 기도합니다. 아파트에서 추락하려는 순간 경비원에게 발각되어 실패합니다. 방문을 잠그고 장미꽃 50송이를 사다 놓고 향에 취해 죽으려 하는데 가족에게 발각되어 또 실패합니다. 그때 이분이 또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는 약이 올라 참을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누구기에 죽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다가 지쳐서 잠을 잡니다. 그런데 잠 속에서 환상이 나타나더니 어거스틴의 참회록의 한 귀절 “오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내가 왜 이제야 당신을 알게 되었나요”라는 구절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깨어나니 꿈이었습니다. 잠에서 개어난 이 분이 비로소 살려달라고 참회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그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 분이 그 중병의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나고 그 병에서 회복됩니다. 이분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분은 이렇게 힘들게 하나님을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처절하게 만난 만남입니까. 그런데 또 어떤 분은 아주 쉽게 하나님을 만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렇게 한번 하나님을 만나면 일평생 동안 그 만남의 은혜를 가지고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신앙생활이고 영적 생활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가 하면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저는 전도사 때 몸이 많이 아파서 도저히 몸을 지탱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일 힘든 것이 새벽기도 하는 일이었습니다. 새벽시간이면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제발 나를 도와 주사 나로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힘들 때 찾아가고 마음을 털어놓을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밖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했더니 다음날부터 새벽이면 밖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날 깨웠습니다. 밖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깨웠는데 문열고 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또 깨웠습니다. 언제까지였는가 하면 재가 힘을 얻을 때까지 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어느 골수불교신자는 열심히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습니다. 어느 날인가 대웅전에 가서 예불을 드리다가 쓰러져 잠을 잤습니다. 잠자다 꿈을 꾸는데 아주 선명하게 “십자가가 보이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얼마나 신비합니까. 그래서 잠이 깨자마자 주지스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은 여기 오지말고 교회에 나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온 분도 있었습니다. 대웅전에서 잠을 자다가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꿈을 꾼 것도 신비한 일이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대뜸 당신은 교회에 나가라는 주지스님도 참 신비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습니다.
또 “사역하는 중에”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역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나타나 있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대부분 그런 경우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출애굽의 과정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실감나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개입하시고 보이십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이 소낙비처럼, 폭포수처럼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마음으로 나타나시고 느낌으로 감격으로 용기로 나타나십니다.
사역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난 경우는 참 많습니다. 사역 중에 만난 가장 극적인 경우는 다윗과 골리앗과 싸울 때입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처음부터 비교가 안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골리앗은 방심과 자만에 빠져있습니다. 다윗이 막대기를 들고 나가니까 골리앗은 내가 개인 줄 아느냐고 코웃음을 칩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태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노라” 누가 이런 사람을 당해냅니까. 그래서 다윗이 보기 좋게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이 용기, 배경, 후원이 신앙인들에게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 후원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최대의 배경, 최대의 빽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후광을 얻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패의 조건! (시 19:14) (0) | 2021.12.09 |
---|---|
아버지의 잠언! (잠 3:1-6) (0) | 2021.12.09 |
폭풍과 폭우 속의 진노! (겔 13:13-14) (0) | 2021.12.09 |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잣나무가 (0) | 2021.12.09 |
제 18세기의 교회사적 특성.[교회사] [현대교회사] [경건주의] [진젠도르프] [계몽주의] (0) | 2021.12.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