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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세기의 교회사적 특성.[교회사] [현대교회사] [경건주의] [진젠도르프] [계몽주의]

by 【고동엽】 2021. 12. 8.

. 제 18세기의 교회사적 특성.

 

 (1) 영국에 휠리암과 메리의 등극으로 종교자유(Tolerance)가 허용되고, 종교와 정치의 투쟁은 일단락이 된다. 개신교 신앙영역과 구교의 영역이 확정되고, 교파주의가 확립이 되었다.

 

 (2) 제 17세개의 종교 전쟁이 끝나고 정통주의(Confessionalism)가 퇴조하자, 즉시 인간사에서 이성의 활용으로 합리성을 추구하게 되고, 또 한편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한 주관 적이며, 개인적인 내면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절대군주권이 약 화되고 시민사회의 형성, 경제적으로는 근대산업사회와 초기 자분주의의 발달, 사상적 으로는 계몽철학이 나타났다.

 

 (3) 신학적으로는 정통시대-알미니안주의-계몽신학(Enlighten ment theology)으로 진전하였다. 합리적 경향은 합리주의 신학을 낳고 극단적으로는 이신론(자연신론Deism), 무신론에 이르고, 경험적 경향은 좋은 면에서 경건주의와 웨슬리의 때 부흥운동(Evangelical movement)을 낳게 하였다.

 

 

 A . 독일 경건주의(German Pietism)

 

1. 제 18세기 초 독일 경건주의 성격.


 (1) 경건주의 운동은 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과 종교생활에 대한 반동이다.
 (a)독일 지방교회의 속파,
 (b)형식적인 신앙생활,
 (c)교리적 경화에 대한 반발이다.
 
 그러므로 경건주의 운동의 기본 요강은
 (a)경건 생활(praxis pietatis)
 (b)종교적 개인주의(personal religion)로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심화시키려 하였다.
 
 (2) 실제 행동 목표로서 세상과 세상의 오락(춤, 카드놀이, 극장, 세속서적)을 멀리하는 실제 적 금욕주의(practical asceticism)를 실천하며, 경건 생활을 힘쓰고 주의 재림을 기다려 절제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3) 특히 독일 경건주의는 하나의 교파를 형성하지 않고, 루터파 교회 내에서 정통신앙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신앙운동으로 그치게 되었다. 형식적인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소집회(召集會, Conventicle), "중생“의 경험을 가진 신자들만의 모임을 가졌다.
 (예컨데, 구역예배, 경건회, 성경연구회, 특별집회등)

 

2. 스페너(philip Jaclb Spener, 1635-1706)의 경건주의 강령.

 

 (1)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시발자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하는 중에 교회개혁에 힘을 기울이고, 그 방안으로 진실한 교인들로 구성된 “경건회” (Collegia pistatis)를 열어 말씀을 가르치고 실제적 신앙 생활을 지도하였다. 최후에는 베를린에서 감독목사(provost) 로서 일하였다.

 

 (2) 그는 독일의 화평주의자 아른트(Arndt)의 “진정한 기독교” (Ture Christianfty, 1605-1609)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 영국 청교도들의 저작중에서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 ?-1631)의 “경건 연숩”(practice of pietie, 제3판, 1613)백스터의 “자기부정론”
 (Trestise on Self-denial, 1659)등을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75년에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획기적 소논문 :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 / pious Longings)을 출판하여 독일교회의 조용한 개혁을 주도하였다.

 

 (3) “경건한 열망”에서 제창한 6個 항목은 다음과 같다.
 (a)하나님의 말씀 연구와 해석, 공중예배도 말씀중심으로 하고, 개인적으로 가정단위로 성경을 많이 읽게 할 것.
 (b)만인의 영적 제사장 직분의 활용.
 평신도 각자의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 “상호 영적 치료”(mutual cure of souls)를 실행 하도록 할 것.
 (c)기독교는 실천의 종교(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라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칠 것.
 (d)종교적 분쟁을 하지 말 것. 어쩔수 없을 경우에는 사랑으로만 할 것.
 (e)목회자 야성방법을 개혁하며, 교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진리가 영혼속에 베어 들게 할 것.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타올러의 저작들과 “독일신학”등의 경건서 적을 읽게 할 것.
 (f)설교는 학식자랑과 웅변보다 교훈적일 것.

 

3. 독일 경건주의의 세 파.

 

 (a) 할례 경건파(Halle Pietism) : 독일 할례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운동인데 그 특색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그 구체적인 표현으로 복지 기관설치에 있다.(학교, 고아원, 보건소, 선교회등), 그 대표자는 아우그스트 프랑케(August H . Francke 1663-1727)이다.
 
 (b) 뷰르템베르그 경건파(Wurtemberg Pietism) : 남부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 운동으로 자유주의적 색체를 띄었다. 엄격한 회개보다 절제 생활과 자기 성찰을 강조하였다.
 특히 일기의 활용을 권하였다.
 요한 벵겔(Jonann Albert Bengel, 1687-1752)은 이 운동의 대표자이며, 유명한 주석가요 성경학자이었다. 성경을 학적으로 연구하는 전틍을 세웠으며, 나중에 이 계통에서 고등비평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제믈러(Semler - 1793)가 배출되었다.
 
 (c) 헤른후트 경건파(Herrnhut Pietism / 또는 진젠도르프파) : 감정적이며, 신비주의 경향이 있는 파로서 대표적 지도자는 진젠도르프 백작(Count Zinzendorf 1700-1760)이 다.

 

4.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

 

 (1) 프링케(1663-1727)는 스페너를 만나서 이전에 독자적인 개심의 경험을 하였고(1689), 라이쁘찌히 대학에서 “성경 애호회” (Collegia philobiblica, 성경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스페너의 도움으로 할레대학의 교수가 되어, 거기서 여러 가지 사회복지 기관들을 세우며 능력있는 일을 하였다.
 
 (2) 독일은 30년 전쟁후에 그 여파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피폐한 상태이었으며 선진 열국의 해회 식민지 활동에 가담하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면에서 낙후하였다. 할레 대학 주위에 “버려진 군중” 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모아서 성경을 가르치고 “영 육의 양식”을 주어, “살아 계시고 능력 많으신, 사랑하시고 참되신 하나 님의 은혜로운 발자취”를 따르려 하였다.
 
 (3) 프랑케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외에도 다음과 같은 방대한 사업을 하였다.
 (a)불우 학생을 위한 학교 설립. (큰 아이가 작은아이를 가르치게 함.)
 (b)고아원(1696)
 (c)기숙학교 설립, (철저한 교육과 생활 지도, 자비와 장학금)
 (d)김나지움(1697, 특수교육기관)
 (e)페다고지움(pasdaggium, 사립학교 : 부자들의 자제교육)
 (f)모자원 설립(House of Widows, 1698) : 디모데전서 5 : 3-16을 모델로, 국가와 교회를 위해 기도를 전문적으로 하였으며, 전속 관리인, 목사, 의사, 가정부가 있음.
 (g)김나세움(Gymnaeceum) : 미혼 처녀들이 자비로 교육받음.
 (h)교사 양성소(Teachers training institute, 1704) : 교리를 가르칠 수 있도록 교사 양성
 (i)보건소 설치 : 할레 신학생들에게 의학 지식 보급.
 (j)책방
 (k)성경 출판사 설립 : 경건 서적 출판
 이 모든 기관들은 순전히 프랑케의 기도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의 저서가 영국에 소개되고 온 구라파에 소개되었으며, 특히 영국에서 18세기 후반에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프랑케의 사회기관들이 영국에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 프랑케의 지도로 할레 신학생이 텐마크 왕 프레데릭 4세의 요청으로 인도 크란크바알 (Tranquebar)선교사가 되었다. (1705)

 

5. 진젠도르프 백작(1700-1760)


 (1) 헤른훗트 경건파의 지도자이다. 그는 할레 페다고지움에서 공부할 때 프랑케의 경건주의 사상을 배웠다. 14세 되던 해에 친구들과 한 모임을 창설하여 “전인류를 사랑한다” 고 삶의 목표를 정하였다고 한다. 갈 곳을 잃은 후스파 피난민들을 규합하여 헤른후트 형제회(Herrnhut society of friends)를 창설하고(일명 the Moravian Church, 모라비아교 회)세계 선교를 도모하였다.
 
 (2) 그의 사상은 “성령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주장하며 교회의 연합을 추구하였다. 원시 기독교 풍습을 좇아 발을 씻기고 애찬을 실시하고 화평의 입맞춤, 제비를 뽑아 결정하는등 실제적 생활을 강조하고, 또한 믿는 이들의 공동생활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진젠도르프의 사상은 그외 신비적이고, 고도의 감정적인 예배와 신학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성애적인 흠모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찬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주의 피, 땀 상처, 고통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 찬송시를 지어 불렀다. 한때 그는 성부 성 모 성자를 삼위로 보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과격한 사상을 회 개하였고, 그의 후계자인 슈광겐베르그(August Gottlieb Spangenberg)는 모라비아 교회 의 신학을 재정비하여 정통노선에 세웠다.
 
 (3) 진젠도르프는 미국, 영국, 화란, 발틱해 연안 등지에 모라비아 교도들의 공동체를 세웠으며,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새로운 감정적 요소를 도입하므로 공헌한 바도 크다.
 슐라아어막허(Schleiermacher)는 그의 영향을 입었다. 또 한편 요한 웨슬레도 모라비아 교도들의 열열한 신앙과 전도열에 큰 감명을 받아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6. 청교도(Puritan)와 경건주의자(Pietist)의 차이

 

 청교도들은 신앙과 생활의 기본 입장이 칼빈주의이고 : 경건주의자들은 루터파 신학의 산물이다. 청교주의(Puritanism) - 경건주의(Pietism) - 복음주의(Evangelicalism)로 시대적 이행과 각기 특성의 공동점과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B .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1. 계몽주의의 특색.

 

 (1) 교회의 권위에서 벗어난 인간 이성과 경험에 근거한 자율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정립과 추구이다. 인간이 가치 측정의 표준을 자기에 두었다. 자율(自律 Autonomy)의 주장이 모든 사상과 활동의 특색이다.
 
 (2) 르네상스 이후 “自我의 발견” 은 이런 방향으로 계속되였으나 종교계혁, 정통주의, 종교 전쟁 등으로 각광을 받지 못한 채 저류를 이루어 오다가. 신학적으로 암미니안 주의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나타나다가(제 17세기), 30년 종교 전쟁이 끝나고 상업경제의 발달과 함께 하나의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등장하여 제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3) 이 계몽주의 운동은 나라마다 그 특색이 다르다. 종교개혁과 같은 단일성을 이루지 못하였다. (a)영국의 경험론 (b)독일의 합리주의 -나중에 이상주의(ldealismus)
 (c)불란서의 자연주의이다. 그러나 다같이 이성을 최고의 규범(Norm)으로 삼고,
 
 모든 인문과학을 자연적 체계로 정비하여, 종교, 도덕, 헌법, 시민법, 경제질서의 근거를 이성 또는 자연법에 두려 하였다.

 

2. 네덜란드의 계몽주의

 

 (1) 네덜란드에서 계몽주의는 시발되었다.
 1630년 종교관용(Tolerance)정책과 상업경제 발달과 시민계급의 형성등으로 문화가 발 달하였다. 알미니안이었던 그로티우스의 자연법사상, 성경주석, 자연신학적 경향은 벌 써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데까르뜨, 스피노자, 베일 등이 일찍 활 동하여 계몽주의의 기초를 쌓았다.
 
 (2) 데까르뜨(1596- 1650) : 데까르뜨 학파를 세웠다.
 “의심” 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하였다. 최후로 남아서 의심할려해 야 할 수 없는 “의심하는 자기” (그의명제 :Cogito, ergo sum)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 다. 이것이 서양 철학과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자율(human autonomy)의 발견이다. 이성이 현실의 전부와 과학적 방법문제를 해결한다는 합리주의를 낳게 되었다.
 데까르뜨의 신의 존재에대한 논의는 결국 인간의 인식의 확실성을 증명하는데 이용되었다.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으로 완전한 존재는 “존재” 까지 포함한다.
 인간의 분명하고 똑똑한 관념들이 타당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 완전한 신이 사람을 “속일” 리가 없기 때무에, 인간의 분명하고 똑똑한 제 관면들이 오류를 범하도록 허락하 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연역(logical deduction)은 타당할 수밖에 없다. 그 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아니하였으나 철저한 “세상” 中心의 사상가였다.
 
 (3)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 - 1677) :그는 스페인에서 피난은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으나 자유사상 때문에 출교 당하였다. 그의 철학은 합리주의적 범신론(rational pan-theism)이다.
 그는 교회와는 관련이 없는 철학자이었으나 후세에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며 지금까지 그 영향은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는 자연신학의 아버지요, 자연주의의 사상적 원천이요, 계시종교의 파괴자이다.
 그는 “신학적-정치적 논문” (Tractatus Theologico-politious 1670)과 윤리학(Ethica, 1677)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혁명적 형이상학을 전개하였다 : 실체(Substance)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자신을 통하여 인식되어 진다” 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그 자체에 대한 관념의 구성은 그 자체의 (外)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체는 “ 신 또는 자연” (deus sive natura)이며, 다만 신은 자기원인(causa sui / 생산하는자연 Natura naturans)이며, 자연은 그의 나타난 것(Natura naturata)이다. 이 실체는 무한하며 수많은 속성중에 생각(cogitatio)과 연장(extension)만 사람에게ㅡ 알려져 있는데, 모든 개체들은 이 두 속성의 양태(modes)들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란 필연에 따라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신의 지능(Intellect)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격의 영원성이나 영혼 불멸도 부정한다.
 최고의 인간활동이란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의 필연성을 정관(靜觀 conremplation)하는 것인데, 이는 겸손과 참회를 통하여 인간의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다음에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의 영향 : 스피노자가 이와 같이 단일 영적 실재(a single speritual reality)라는 기본사상을 가지고 데까르뜨의 영과 육의 분리, 하나님과 세계의 분리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므로, 후에 독일 이상주의(German Idealism)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쉘링(F . W . J Schelling), 헤겔(G . W . F Hegel)에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폴틸리히(Paul Tillich)같은 이가 하나님을 초월자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자연 개물의 창조적 근거” (the Creative ground of all natural objects)라 생각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4) 삐에르 베일(Pierre Bayle, 1647-1706) : 계뭉철학의 화약고라고 불리워 지는 “역사적 및 비평적 사전”(Dictionaire histirique et Critique, 1695-1697)을 저각하였다. 성경에 대한 합리적 연구를 주장하고 모든 이적을 부인하였다.

 

3. 영국 이신론(理神論 Deism)의 발달.

 

 (1) 1688년 명예혁명, 1689년 관용령, 1694년 출판 자유등 일련의 자유화 기운이 일자, 네덜란드에서 알미니안 주의와 스피노자의 철학등에 영향을 입은 영국인들이 속속 귀국하여 계몽사상이 퍼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영국 내에 이신론(Deism)이 득세하였다. 이신론은 독특한 영국적 계몽주의 종교 사상으로 벌써부터 허버트 경에 의하여 주장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도 1750년에는 벌써 세력을 잃게 되고 영국은 웨슬레의 대 부흥운동의 종교적 역기에 휩쓸리게 된다.
 
(2) 이신론의 내용은 허버트 경(Lord Herbert of Cherbury 1581-1648)이 저작한 “지리론”(De veritate, 1620)과 “만민의 종교" (De religione gentilium ...... 1645)에서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5개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a) 유일신 (b) 예배 (c) 도덕과 경건생활 (d) 인간의 의무는 회개와 악을 멀리함
 (e) 현세와 내세의 보상이다. 기독교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념에서 출발하였으나 타락하여 비 합리적 제도와 교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존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비록 자신은 이신론자가 아니라고 부정하였으나 기독교는 가장 합리적 종교임을 “기독교의 합리성”(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75)이란 저술에서 변증하고 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고 하였다. 그러나 항상 이성으로 미신과 신비주의를 가려내고, 이성으로 계시를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경험론적 인식론은 모든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고 다만 경험에 의하여 지식이 발생한다. 즉 감각과 회상을 통하여 이성작용으로 지식이 생겨난 뿐이며, 본래 인간의 마음은 백지(tabularasa)와 같을 뿐이라 하였다. 이렇게 감각과 이성 작용으로 얻은 지식이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 하였다. 이런 사상의 결과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시 종교가 자연 종교에게 밀려나게 된 것이다.


 롤크 이후, 본격적인 이신론자들이 나타났다. 18세개 이신론자들은 대담하게
 (a) 계시종교를 부정하고 기독교를 자연종교로 격하시키었고,
 (b) 하나님, 영혼불멸, 윤리등 합리적 요소만 기독교신앙에서 수용하고, 비합리적이라 생각 하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부정하였다.
 (c)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를 부정하고 우주의 기계적 운행과 진행을 믿었다. 그 대표자는 톨란드(John Toland, 1670-1722), 클린스(Collins 1676-1729), 틴달(Tindal, 1656-1733)등 이다. 톨란드의 저서 “신비하지 않은 기독교” (Christiamity Not Mysterious, 1736)는 자연종교가 기독교의 원형이며 : 유대교, 희랍 밀교, 플라톤 철학의 악 영향으로 타락하 였다고 지적한다. 탄달의 저서 “창조만큼이나 오래된 기독교” (Christianity as old as the Creation, 1730)에서도 自然宗敎가 모든 종교의 근본이라 하고 있다.
 
 (3) 1750년대에 오면 이신론은 그 세력을 별써 잃어 버리게된다. 대비드흄(David Hume, 1711-1776)에 의하여 이신론의 근거가 무너지고,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의 기독교 측 반격으로 영국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불란서 자연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4. 흄의 회의론(Scepticirm)이 기독교 사상에 미친 영향.
 

(1)록크(Locke)의 경험론은 아직도 이신론자들 가운데 합리적 초자연주의(rational Supernaturalism)를 가능하게 하였다. 계시와 이성을 조화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신론자들이 구약예언의 성취로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증거 하려 하였다.
 
 (2) 흄은 그의 회의론(Scepticism)으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이적론(Essays on Miracles, 1748)이란 저서에서, 철저한 경험론의 입장에서 이적을 부인하였다. 그의 논리는 이러하다 : 죽은 자의 부활을 회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경험상, ” 인간의 증언이 잘못되었을 경우가 많은 것은 경험에 배치되지 아니하나, 이적 이 참되다는 것은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경험의 한계를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의 존재, 영혼불멸, 보편 타당한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흄에 이르러 합리적 기독교(이 신론)과 합리주의 자체까지도 파국에 빠져버렸다. 이성이란 경험의 소산일 뿐이며, 심 지어 자아도 지각의 묶음(다발)에 지나지 아니하며, 모든 지각은 경험이 얻은 인상들이 아니면 인상의 모조품인 관념일 뿐이다. 따라서 관념관( 觀念間)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있으나, 실재의 사실들은 그러리라하는 개연성이상 더 증명할 수 없다.


 인과율도 논리의 개념이 아니며, 인간의 구상력에 인상지어진 습관과 연상의 결과일 뿐이다. 그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의 가능성도 부정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가견적 우주에 대한 신념도 부정하고, 도덕생활도 사실은 의지와 행동을 결정하는 결정에 따라 지배될 뿐이다.
 
(3) 이러한 철저한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흄이후 새로운 시대 곧 낭만주의, 자연주의, 유물주의 시대를 도래하게 하였고 :독일의 라아다러스(Reimarus)에게 영향을 주고 그리도 칸트로 하여금 시천 이성의 비판을 낳게 하여 자유주의의 근거를 쌓게 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철저한 인본주의에 빠져 기독교 신앙의 침체를 가져오게 허였고 그 기에 대항 반동(反動)으로 급선회하여 “대복음 운동”을 낳게 하였다.

 

5. 버틀러의 “종교 유추” (Analogy of Religion, 1752)에 관하여

 

(1)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는 장노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영국 국교회로 전향 하여 나중에 더함의 감독(Bishop of Durham)이 되었다.
 “종교유추”는 그 원명이 “自然의 구조와 진행에 대비한 자연 종교 및 계시종교”
 (Analogy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 to the Constitution and Course of Nature, 1734)로 버틀러의 대 저작이며, 기독교 변증서로서 이신론자들에게 계시종ㅇ교 의 합리성을 변증하고 또 한편 회의주의자에게 계시종교와 그 개인성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2) 첫 부분은 자연계시로서 영혼 불멸성, 상벌,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moral government of the world)를 변증하였으며, 둘째 부분에서는 특별계시의 필요성을 논한 다음에 이성으로서 계시의 의미와 도덕성과 그 증거를 판단해야 하며, 양심은 신의 선물로서 성경 말씀 중 어느 한 부분이 자기 양심에 거슬릴 수 없어야 된다.
 예수님의 대속 교리를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개연성(Probability)이 인생의 인도자가 되니, 이렇게 개연성이 높은 계시도리야말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3) “종교유추” 는 이신론과 회의론에 대한 답으로서 널리 인정되었고, 이것으로 일단 기독교의 변증은, 적어도 영국시민들에게는, 성공적이었다고 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버틀러의 변증방법은 알미니안 적이며, 즉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기독교의 변증이었다. 그 근저에 있는 전네는 중생 되지 않은 自然人이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면 자연 진행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유추하여 그리스도의 대속과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되고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태도는 지금도 소위 “복음주의” (Evangelical)라고 하는 감리교의 변증방법이며 영국 국교회의 태도이다.

 

6. 프랑스 계몽운동과 기독교에 미친 영향.

 (1)프랑스의 계몽사상은 영국에서 건너왔다. 볼테에르(Voltaire, 1694-1778)는 영국 이신론 을 받아드렸으며 계몽사상을 보편화시켰다. 그러나 불란서 계몽운동은 그 공격 목표가 교 회와 성부의 불관용 정책이었기 때문에 반 기독교적 색체가 농후하였다. 볼테에르도 나중 에는 신의 필요성을 실제적 생활면에서 찾았고 영혼불멸을 믿지 않고 점차 물질주의에 빠 졌다.
 그러므로 불란서 계몽주의는 (a) 자연주의 (b) 물질주의 (c) 반기독교(무신론을 포함)를 낳았다.
 
 (2) 룻소(Jean-Jacques Rousseau, 1712-78) : 흄이 룻소를 영국으로 데리고 간 일이 있다.
 그는 흄과 교유를 통하여 벌써 이신론의 단계를 넘어서서 자연주의 또는 낭만주의에 넘어 가고 있다. 그는 감정과 자연을 찬양하는 열혈 선지자이었다.
 자연상태가 행복과 평등의 상태이며 自然에 접근하여 국가생활(정치), 교육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 하였다. 그의 종교는 “自然”이었다. 여기에서 사회계약론(1762), 에밀 (1760)등의 저작이 나왔다. 기독교에 대하여는 신 . 자유 . 영혼불멸을 믿었으나 이신론자 의 신앙정도를 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이성으로 증명학 수 없고 종교는 다만 종교감정에 근거하며 순수한 마음의 자연스러운 느낌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3) 디드로(Diderot, 1713-84) : 백과사전 편찬자로서 계몽사상을 보편화 시켰다. 사전에는 룻 소, 볼테에르, 돌바크(D' Holbach)등이 기고하였으며 종교관용(자유)와 민주사상을 전개하 였기 때문에 1759년 판금되었으나 1772년까지 비밀히 전 28권이 출판되었다. 디드로는 개 인적으로 기계적 유물론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계몽사상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영 향을 미쳐 1789년 불란서 대 혁명을 낳게 하였다.

 

7. 독일 합리주의 발생.

 

 (1) 독일 합리주의는 라이쁘니츠(Leibuitz, 1646-1716)와 그의 사상을 대중학시킨 크리스찬 볼프(Christian Wolff, 179-1754)의 계몽사상이다.
 라이쁘니츠는 만능의 천재로, 정치가, 외교가, 수학자(미적분 발견)기호 논리학을 연구한 사람이요, 발명가(계산기)이었으며, 프러시아 한림원 창설자이다.
 
 (2) 영국 이신론자들처럼 기계적 우주론을 중심사상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단자론” (簞子論 Monadology 1714-1720)으로 결실되었다. 우주는 무한한 단자(monad) 들 의 체계인데 이 단자들은 자체의 힘을 지닌 불멸의 본체(즉 쪼갤 수 없으며, 언제나 활성을 지님)로서 완전한 상승 연속법칙에 따라 하급 형태의 물질에서 영 . 천사 . 최고 로 신의 형태에까지 이르고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자체는 본체의 무한성을 가 질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라이쁘니츠는 신의 존재를 설명할 때에 최고의 단자형태로 표현하기도 하고, 모든 단자를 창조하거나 유출하여 발생케 한 “원형적이며 단순한 본체 ”(the original simple substance)라 하기도 하였다. 영혼불멸은 영의 본체적 성격이라 하였다.
 우주는 완전한 기계적 기능을 가지므로 죄는 자연질서와 사물의 기계적 구조자체의 성격에 따라 형벌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의로운 행위도 보상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낙관론자로서 이 세상은 “가능한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것” 이라 하였다.
 
 (3) 라이쁘니츠의 합리주의는 하나의 잉신론의 형태로서, 록크 처럼 자연 종교와 계시를 조화시키려 하였으며, 1730년대 독일대학을 매료시켰다.

 

8. 독일 신학에 있어서 신학문(Neology)의 발생.

 

 (1) 독일 합리주의는 1740-1750에 극성기에 이르렀고 그 영향은 독일 신학계에 소위“신학문”
 (新學問, Neology)과 합리주의신학(rational theology)를 낳게 하였다.

 (2) 특히 교회사와 성경주석에 신학문이 발다라였으며 뷰르텔베르의 경건즈의 성경학자인 제 물러(J . S . Semler, 1725-91)는 그 대표자이다. 그는 획심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역사와 합리적 비판에 근거를 둔 성경연구를 하였다. 종교(하나님에 대한 믿음)와 신학을 구분하였으며, 신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는 실제로 교회 사를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성경론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사용하였다(소위 historisch-Kritisch).
 1771-1775년에 출간한 “정경의 자유비판 논문”에서 정통적인 영감설을 부정하고, 정경이 점 진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가치도 동일하지 않다고 하였다. 도덕적 성격은 하나님에게서 근원하였기 때문이며, 실제로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당시 시대적 특수형편에 “적용” (accimodation)하여 썼을 뿐이며, (보편적 도덕적 가치 외에는)현재 우리들에게는 의미가 없 는(역사적)문서라는 것이다.
 그의 에르네스티(Ernesti), 미카일레스(Michaelis)등은 영감론은 유지하나, 문학적(문법)-역사적 비판을 시도하였다.


 (3) 라이마러스(Samuel Reimarus, 1694-1768)는 렛씽이 익명으로 출판한 라이나러스의 비밀 저작“볼멘빗텔러 단편” (die Wolfenbutteler Fragments, 1774-1778)에서, 독일서는 최초로 자연종교에 근거하여 계시종교를 부정하여 세상을 몰라게 하였다.
 
 (4) 그 결과 : 1770년대에 독일 교회에서 설교가 도덕설교에 그치고 말았으며,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18세기말에 독일 교회는 (a) 칸트에 근거한 자유주의 (도덕주의)를 따라 기독교의 활로를 찾거나 (b)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의 자유주의(종교적 감정주의)를 따라서 활로를 개척해야만 되었다. 한편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고 특히 할레대학이 이 물결에 휩쓸렸으나, 일부는 그들이 “마음의 종교” (Herzensfrommigkeit)라는 원리를 붙들고 경건으로서 정통교리를 고수하려 하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2세는 볼너 칙령을 내려(Wollnerscher Religionsedickt, 1788) 설교가 들이 정통교리에 위배되는 가르침을 못하게 하였다. 여기에 제물러는 순복하였으나 일반 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C . 제 18세개 영국 복음주의 운동(The Evangelical Movement)

 

1. 제 18세기 영국의 종교적 상황.

 

 (1) 알미니안 주의의 영향으로 광교주의(Latitudinarianism)이 성행하였다. 그 대표자는 변증 가 버틀러(Butler)와 설교가 틸룻슨(Tillotson)이다. 이들은 이신론과 흡브스(Hobbes)의 무신론에 대항하여 합리적 신학을 안출하고 교리보다 성경에 근거하여 합리적 도덕생활 을 강조하는 한편 : 엄격한 칼빈주의를 알미니안 주의로 완화시켰다. 따라서 이들의 주 장은 혼합주의 또는 절충주의로서 계시와 이성의 조화를 모색하였으며, 의지의 자유화 보 편 구원설에 동조하였다.
 그 결과는 버틀러 감독에게 1747년 켄터베리 대감독의 지위를 줄려하였을 때 “무너지는 교회를 뒷받침하기에는 너무 늦엇다” 고 말하면서 사양할 정도로 기독교회는 침체와 퇴 락의 길로 내닫고 있었다.
 이신론, 무신론, 합리론은 전체가 기독교인으로 간주되는 영국 국민들 마음에 깊이 뿌리 를 내리고 있었다.
 
 (2) 과격한 알미니안들은 일위파 교회(Unitarian Church)를 조직하여 수많은 교인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요셉 프리슬리(Joseph Priestly)는 그 대표자이다. 이 운동은 나중 19세기 더 욱 크게 성장하고, 미국 회중교회를 거의 전멸시키게 된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일위(Unipersonality of God)이심을 주장하 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무 신조 주의이다. (No Creed). 처음에는 성경에 근거하였으나 19세기 이르러는 이성과 양심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다.
 
 (3) 기독교의 합리화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신비주의와 밀교가 일어났다. “자유 석수단”
 (自由石手?, Freemasonry)같은 비밀 결사와, 1788년 이후에는 스웨덴보르그(Swedenborg, 1688-1772)교회가 섰다. 스웨덴보르그는 스웨덴 출신의 과학자요 신비 사상가로서 과학적 분석으로 우주가 근본적으로 영적 구조(Spiritual structure)를 가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1743-5사이에 갑자기 영적 실체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꿈과 환상을 통하여, 그리고 생시에도, 영계와 영물과 접촉하였다고 하며 주님의 지시로 새 교회를 세우려고 노 력하였다.
 그는 조직교회를 원하지 아니 하였으나 1787년에 웨슬레파의 설교가들이 “새 예루살렘 교 회”(the New Jerusalem Clrurch )를 설립하였다.
 그의 가르침에는 삼위일체 부정, 영계와 물질계의 대칭, 일반적으로 범신론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2. 제 18세기 영국 북음운동(Evangelical Movement)의 선구자들

 

(1) 다른 여러 가지의 신앙운동처럼 훼슬레와 휫필드의 대 부흥운동이 있기 이전에 그 길을 열 어 놓은 선구자들이 있다.
 필립 두드릿지(Philip Doddridgs, 1702-51),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 어스킨 형제들 (Ebenezer Erskine, 1680-1754 그리고 Ralph Erskine)들은 모두 칼빈주의자들로서 특별히 회개화 전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통주의 칼빈파의 엄격한 노선과 큰 마찰을 일으켰다. 특별히 1717년에 익명의 저작인 “현대신학의 골수”(The Marrow of Modern Oivinity, 1645) 가 재간되자 “골수 논쟁”(the Marrow controversy)이 스콧트란드 장노교회내에서 일어났으 며 서로 “반 율법주의” (Antinomianism)이다, “신 율법주의”(Neonomianism)이다 하며 싸 웠다.
 보스턴은 이 논쟁의 주역이었으며 단순한 칼빈주의 교리를 증거하고, 인간의 네 가지 상태 를 논한 “인성의 네 상태” (Human Neture in Its Fourfold State)를 저술하여 회개와 새생 활을 강조하였다. 어스킨 형제들은 스콧트란드 장노교회와 투쟁하면서 전도설교를 하였다. 이들은 알미니안 주의가 교회를 망하게 하며 도덕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하고, 예정과 선택을 그들의 설교에서 강조하였다.
 
(2) 복음운동은 특별히 1730년대에 미국, 스콧트란드, 웨일즈 그리고 영국에 널리 퍼졌다. 처음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은 네덜란드 개혁파 목사 트렐링하이젠(T . J . Frelinghuysen)이 회개와 새 생활을 외치고(1719)이어서 테난트(Gilbert Tennent)가 합세하여 펜실바니아주에 살고 있던 장로교인들에게 부흥의 불길을 일으킴으로 시작되었고, 이 불길이 1735년 조나단 에드워 드(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교회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미국의 대부흥운동이다.
 그 다음으로 1735년에 하우월 헤리스(Howel Harris)가 웨일스 지방에서 성례를 베풀다가 복 음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남을 느꼈다. 그는 생전에 300교회를 세웠으며 순회목사로 지방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핍박도 많이 받았다. 휫필드와 협조하며 나중에 웨일스 칼빈주의 메소디스교회(the Welsh Calvinistic Methodists)를 세우게 되었다. (나중에 웰쉬 장노교 회라 불리워짐)
 
(3) 이러한 부훙운동의 성격은 종교개혁과 같이 교회의 개혁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개혁파 교회의 신앙과 생활의 침체상태에서 재기하여 북음의 능력을 힘입게 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 목표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강력하게 전하고 회개와 새 생활을 촉구한 것이다.

 

3. 조지 휫필드의 칼빈주의 북음운동(Calvinistic Evangelicalism)

 

 (1) 조지 휫필드는 1741년 웨슬리와 신학문제로 서로 길을 달리하게되었다. 그는 복음운동에 항상 따르기 마련인 알미니안 주의 위험을 간파하고 선택과 예정교리에 근거한 칼빈주의 신학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전도자로 일생을 마치고, 어떤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교회를 새롭게 하였고, 개인의 생활을 개선시켰고, 또한 그의 교역의 결과는 미국의 독립운동 이란 큰 혁명의 밑거름이 되기고 하였다.
 
 (2) 휫필드는 1714년 영국 글루스터에서 태어나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되었다. 1735년에 오랜 영혼의 고민과 육체의 교통을 거쳐 갑자기 죄 용서함과 구원의 확신을 느끼게 되고 소위 “개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특히 웨슬레 형제들이 주도하는 “옥스포드 학생회”에서 찰스 웨슬리의 도움으로 헨리 스쿠결(Hener Scougal)의 “인간의 영혼에 내재한 하나님의 삶”(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이란 책을 읽고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였 다고 한다. 그는 웨슬레 형제들과 미국 조지아에 가서 선교를 하였으며, 거기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그 기금을 모으려고 영국 각지에서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는 야외에서 하였는데, 스코틀랜드에서는 한번에 2만명이 들었다고 한다. 명설교가요, 부흥운동과 새 생활운동의 주축이었다. 그는 일곱 차례나
 미국을 방문하여 전도하였고, 학교와 고아원 등 여러 기관들을 창설하였다.

 

4. 웨슬리의 부흥운동

 

 (1)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 은 옥스퍼드 대학 재학시 혹스포드 학생회(Oxford club, 1729)를 조직하고 20여명의 학생 들이 이를 “성결 클럽” (Holy Club)이라 불렀다. 이 클럽의 특색이 생활의 질서와 규율이었 으므로 “메스다스트” (Methodists)란 벌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지도를 받았다. 로는 1729년에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심각하게 촉구함” (Serious Call to a Holy and Devout Life)이란 책을 저술하여, 경건생활 을 강조하였다. 이들이 1736년 미국 조지아 주에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모라비아 교도들 과 그들의 지도자 스팡겐베르그를 만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당황하였으며, 그 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요한 웨슬레는 조지아 선교 실패 후 영국으로 돌아와서, 1738 년 5월 24일 알더스게이트(Aldersgate)소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 기록된 루터 의 개심기를 읽을
 때에 갑자기 마음이 더워지고,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 한 분만 의지하며, 주께서 자기 죄를 제거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자기를 건져 주셨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한다.
 
(2) 개심 이후 사랑과 열심으로, 훈련과 노역으로 “만인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생활이 시작되고, 증진되고, 보존되게 하여, 실제적인 종교를 실천하도록” 힘을 썼다.
 그는 “세계를 교구” 로 전도에 온 힘을 기울이었다. 단순한 북음과 지옥의 무서움과 회개의 필요성을 설교하여 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국교회 목사들이 웨슬레의 부흥집회를 방해하기 때문에 노천설교를 하였으며 1739년에는 평신도들을 설교자(lay preachers)로 양성하여 설교하게 하였고, 새로운 결신자를 얻으면 작은 그룹(bands)로, 속회(classes)로 무리를 지어 주고, 새로 얻은 신앙을 서로 격려하며 계속하 도록 하였다. 이들은 초대 교회와 같이 “상호교육”(mutual edification)과 “형제적 교 정”(fraternal correction)에 힘을 썼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같은 해에(1739)집회소를 마련하 였다.
 
(3) 1741년에 교리 문제로 휫필드와 웨슬리의 분열에 있었으며, 1742년 웨슬리는 단독으로 영국 곳곳으로 전도하였으며 매년 8,000마일을 말을 타고 다니며 순회 전도하였다고 한다. 그리 하여 그가 죽을 때에는 294명의 설교자, 영국에만 71,668명의 교인,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 의 외방신도, 그리소 미국에 198명의 성교자와 43,265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한다.
 
(4)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예 남아서 전도하기를 원하였으나 1768년 미국 선교를 위해서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 안수하였고, 그에게 부탁하여 에슈베리(Ashbury)를 안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744년에 모인 설교자들의 연회가 차츰 교회구실을 하게 되어 1784년에는 자기 사 후에도 계속하여 복음전도를 하도록 “100인회”에 소유권과 전도운동의 방향에 대하여 일임 시켰으며 1791년 그가 죽자 정식으로 웨슬리 메소디스트 교회(the Wesleyan Methodist Churen)가 설립되었다.
 
(5) 웨슬리의 신학은 청교도들의 신앙전통을 가졌으나 백스터와 같은 알미니안 주의 경향이 농후하였다. 엄격한 예정과 선택을 부정하고, 알미니우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반응에 역점을 둔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졌다. 그러나 윤리적인 면에서는 훈련과 시간 생활, 경제 적 책임, 오락금지등 청교도들과 같은 경건 생활을 주장하였다.

 

5. 영국 국교회내의 “복음주의자” (Evangelicals)

 

 (1) 대 복음 운동으로 인하여 국교회 내부의 신교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그들의 신학은 칼빈 주의이고, 개인의 회개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강조하였다. 휫필 드의 노선을 따르며, 국교회 내부에 남아서 복음운동을 하려 하였다. 그 대표자로서는 헨 리 벤(Henry Venn, 1725-95), 과 선교회 창설자 중 하나인 존 벤(John Venn,1759-1813), 그 리고 한 때 노예선 선장으로 일하다가 회개하고 목사가 된 존 뉴톤(John Nawton, 1725-1807), 캠브릿지 대학을 지금까지 복음주의의 온상이 되게 한 아이삭 밀너(Issac Milner, 1751-1820)등이다.
 이들은 숫 적으로 소수이었으나 국교회와 영국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부유한 복음주의자들로서 평신도들이 클랩팝지역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클랩팜 파”(Clapham Sect)라 불리워졌는데, 이들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각자 자기 지위와 신분에서 차할려고 노력하였다. 그 중에 유명한 윌리암 위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은 국교회의 복음주의 목사들과 교류한 끝에 개 심하고,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일으켜 1833년 제국내에 노예매매제도가 폐지되게 하였고, 1787년에는 부도덕 퇴치 협회조직, 1810년에 기독교 신문 창설, 1804년 대영 성서공회와 해외 성서공회 창설, 그리고 각종의 학교, 주일학교, 감옥개선 등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 그룹의 회원 중 한 사람인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는 1787년 해방된 노예를 위해서 시에라 레오니(Sierra Leone)국을 창설하는 데 큰 역활을 하였다.
 
(3) 그리고 영국 국교회의 평신도인 로버트 래이크스(Robert Raikes 1735-1811)는 1780년 글루스터(Gloucester)시에 처음으로 주일학교(Sunday School)을 시작하였다.
 존 하워드(John Howard 1726-1790)은 비국교도로서 감옥개선에 공헌을 하였다.
 
(4) 1796년에 교회 선교회를 국교회 평신도들이 창설하였다.
 이때에는 각 파에서 선교열이 대단하여 초교파적인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가 생기고, 1796에 스콧트란드 선교회가 생겼으며, 1793년에는 침례교 선교회 에서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를 인도 선교사로 파송하여 칼컷타 근처 세라포레 (Serampore)에서 선교하였다. 그 이후로 런던 선교회는 남아시아, 중국에까지 선교사를 파 송하여 큰 전도 운동이 일어났다.
 
(5) 이러한 국교회 복음주의 자들의 활동은 영국사회에 큰 활력을 주었고, 기독교 신앙도 새로운 힘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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