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사람들(5)
누가복음 19:1-10
영국에서 발행되는 런던 타임스지가 독자들을 대상으로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설문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1위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 였고, 2위는 아기를 목욕시키고 재우고 난 후 아기얼굴을 바라보며 뿌듯해 하는 어머니였고, 3위는 구슬땀을 흘리며 공예품을 완성한 목공이었고, 4위는 어렵고 힘든 수술 끝에 생명을 구한 의사였습니다.
런던 타임스지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는것도, 수상이 되는것도 아닙니다. 재벌이 되고 인기를 얻는것도 아닙니다.
우리 얘길 해 보십시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본문속에서 구원받은 한 사람의 감동적인이며 행복에 넘치는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의 주인공인「삭개오」는 그 당시 여리고 지방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유대나라를 점령한 로마는 효과적으로 세금을 거둬 들이기 위해 중요한 도시마다 세관을 두고 인두세와 지세를 징수했습니다. 로마 세관원이 직접 파견된 세관도 있었지만 대부분 지방에서는 유대인을 발탁해 정해진 징수액을 거둬 로마에 바치게 하고 통행세는 세리장이 챙기도록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세리장들을 침략자의 앞잡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과다한 세금징수와 부정축재 때문에 미워하게 되었고 시쳇말로 왕따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거기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신체적 약점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사회로부터 따돌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돈은 많고 좋은집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그를 사람대접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고독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악조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삭개오의 약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왕따 당한 부자였고, 신체적으로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후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삭개오가 구원받은 과정은 우리가 구원받는 과정과 다를바 없습니다. 삭개오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을 대비시키면서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
1. 예수님을 보고싶어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삭개오의 구도자적 자세를 보게 됩니다. 그는 예수가 궁금했습니다. 예수가 누군지 보고 싶었고, 알고 싶었습니다. 키는 작고 사람들은 많아 별 수 없이 뽕나무 위로 올라 갔습니다.
철학은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되고 과학은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출발합니다.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는가?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설명하고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연구해 박사가 된 사람이 쓴 책도 성경만큼 예수님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어야지 그 외의 연구서나 서적을 믿으면 안됩니다.
유명한 화가 피카소의 아버지는 시골학교 미술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덕에 피카소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떤날 그는 낡은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는 파리의 뒷골목을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 이곳 저곳엔 쓰레기가 쌓여 있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폐기처분된 자전거 한 대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마침 건물사이로 아침 햇살이 자전거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화가 특유의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 자전거를 집으로 가져와 안장과 운전대 부분을 떼내고 안장과 운전대를 용접하여 뿔달린 황소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값으로는 계산이 안되는 피카소의 명작「황소머리」라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훗날 피카소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에게 버려졌다고 해서 그 물건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부여하는 자의 몫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쓰레기는 위대한 가능성을 가진 예술재료가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죄수를 매다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틀에 못박힌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십자가의 가치와 의미와 능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아 버렸습니다만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을 즐거워하며 영접했습니다.
6절을 보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토록 정답게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준 일이 없었습니다. 그날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 지나가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즉각 응답했던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5절의 예수님 말씀과 6절의 삭개오의 응답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속히 내려오라 - 급히 내려와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 즐거워하며 영점하거늘"
그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고 머뭇거리지도 않았습니다. "급히" 라는 말은 즉시, 곧바로, 빨리라는 뜻입니다. 6절 짤막한 구절속에 세가지 동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입니다.
신앙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고 검토해보고 연구해 볼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급히, 속히 결단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도둑질을 하자, 강도짓을 하자, 누군가를 두들겨패자, 나쁜짓을 하자, 못된일을 저지르자"라고 나를 꼬이고 회유한다면 그것은 심사숙고하고 그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믿고 죄사함 받는일, 교회 섬기고 남을 돕는일, 바로믿고 바로살고 복 받는 일이야 말로 미룰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세례 문답할 때마다 특히 남자들에겐 술 담배을 하는가을 묻습니다. 백명가운데 하나나 둘 정도는 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예, 바로 끊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가 문제입니다.
세 번째 사람의 경우는 끊을 마음이 없다는 대답과 같습니다. 왜냐면 담배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사색할 때, 상념에 잠길 때 피우기 때문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해야 합니다. 지금 내려와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3. 수군거림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과 행동을 지켜본 동네 사람들은 쑥덕대며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수군거렸다는 것은 디에공귀존이라는 헬라어인데 비둘기나 벌들이 윙윙거리고 떠드는 소리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나 삭개오한테는 직접 말하지 못하고 구구거리고 윙윙대는 모습이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수군거리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6:43에서 주님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셨고, 로마서 1:29을 보면 수군거리는 것을 살인, 분쟁, 악독, 불의, 탐욕과 동일한 죄라고 했습니다.
꼭 해야 할 말은 직접하고 해선 안될 말이나 할 필요가 없는 말은 수군거리지 않아야 합니다.
서부활극을 보면 총잡이들은 절대로 등뒤에서 총을 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량배나 깡패는 앞뒤 안가리고 흉기를 휘두르고 주먹질을 해 댑니다. 그보다 더 저질이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든, 누가 방해하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혼자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고, 둘이 마주 앉아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고 패거리로 몰려 앉아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61을 보면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날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린다고 해서 삭개오가 예수님 모시는 일을 포기했다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4. 회개했습니다.
8절을 보면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재산권과 소유권을 포기하고 예수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전인적 행동입니다. 다시말하면 자기 잘못을 입으로 시인하고 몸도 마음도 고치고 행동도 고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머리가 회개하면 나쁜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이 회개했으면 나쁜 것을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귀가 회개했으면 나쁜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합니다. 입이 회개했으면 나쁜말은 안하고 좋은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합니다. 손이 회개했으면 더러운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합니다. 발이 회개했으면 그 발로 더러운 땅을 밟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당한 회개입니다.
그 뿐입니까?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돈주머니도 회개해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돈주머니를 열어 드릴 것은 드리고 바칠 것은 바치고 베풀 것은 베풀고 갚을 것은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회개의 열매인 것입니다.
9절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자신의 회개를 구체적으로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사죄도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린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남편을 잃었고 아내를 잃었고, 부모를 잃었고, 직장을 잃었고, 회사를 잃었고, 거기다 양심도 신앙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 급히 내려와, 오늘 구원이"라는 세 마디를 주목십시다.
속히, 급히, 오늘!
고린도후서 6:2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오늘 구원받읍시다.
오늘 고백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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