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민수기라는 본문을 보겠습니다. 민수기는 말 그대로 백성들의 수를 센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왜 민수기라는 책의 제목이 만들어졌을까요? 민수기 1장과 26장을 보면 두 번에 걸쳐 이스라엘 12 지파에 대한 인구조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인구를 계산했던 것이 1장과 26장에 나오기 때문에 백성들의 수를 세었다 라고 해서 민수기라는 제목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라는 본문을 유대인들은 ‘베미드바르’라고 했습니다. 원래 성경에는 책의 제목이 없었습니다. 두루마리를 둘둘 말아서 들고 다니다 보니 구분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두루마리를 폈을 때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 혹은 앞 부분에 나와 있는 단어 가운데 중요한 단어를 그 두루마리의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창세기라는 두루마리를 펴면 브레시트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레위기를 펴면 바이크라라는 단어가 먼저 나옵니다. 이게 제목이 된 겁니다. 70인경으로 번역하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의 제목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수기라는 두루마리를 펴면 다섯 번째 나오는 단어가 베미드바르라는 단어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베미드바르라는 것을 이 책의 제목으로 정했냐면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에서’라는 의미도 있고 ‘말씀과 함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민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광야 여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가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민수기입니다. 이스라엘 광야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니까 책의 제목을 베미드바르라고 한 겁니다. 다음에는 말씀과 함께입니다. 광야라는 것은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인생 여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여정에서 대부분 실패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신실하게 붙잡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자산이 말씀과 함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할 때 광야와 같은 인생의 고단하고 힘겨운 여정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민수기라는 책의 제목을 베미드바르, 광야에서 또는 말씀과 함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민수기는 출애굽 1세대가 어떻게 실패했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책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이후의 이야기가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나오는데 이것을 시공간적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부터 18장까지는 출애굽 이야기, 출애굽기 19장부터 민수기 10장 10절까지는 시내산 이야기, 민수기 10장 11절부터 신명기 34장까지는 광야여정 이야기입니다. 특히 민수기는 광야 여정에서 출애굽 1세대가 어떻게 실패했는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월절에 애굽이 싫고 바로의 통치가 싫었던 사람들이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때 탈출했던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야곱의 후손과 중다한 잡족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애굽과 바로의 통치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자신들을 출애굽 해주신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습니다 라고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1년 동안 머물면서 율법을 배우고 성막도 건설합니다.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은 애굽 탈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출애굽 한 사람들은 어디를 향해 힘있게 걸어가야 합니까? 가나안을 향해 힘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가 그 일에 실패했음을 민수기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나안을 향해 힘있게 걸어가야 할 출애굽 1세대가 그러지 않고 자기들을 종으로 부려먹었던 애굽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려고 합니다. 향가나안이 아니라 환애굽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 무엇 때문에요? 광야 여정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입니다. 광야 여정이 힘들고 어렵다고 출애굽 1세대는 끊임없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면 어떤 삶에 또 시달립니까? 종살이하는 노예로 살아갈 것이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려우니까 스스로 자발적으로 탈출해 나온 그곳에 대해 환상 가득한 나눔을 합니다. ‘거기서는 너무 좋았는데’, ‘고기도 많이 먹었는데.’ 종들이 고기를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겠습니까? 지금 당장 광야 여정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자기 의지로 뛰쳐나온 애굽의 삶을 환상적으로 그린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힘있게 걸어가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향가나안이 아닌 환애굽을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창조적인 고난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우리 존재가 새로워지려면 창조적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여러분, 어린 아기들을 보세요. 넓은 의미에서 동물들 가운데 성장속도가 가장 느린 것이 사람입니다. 초식 동물들 보시면 새끼로 태어나자마자 1~2분 안에 서고, 5~6분이 지나면 뜁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나서 3개월 이상 천장만 쳐다봅니다. 1년 정도 되어야 걸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놀랐던 것이 뭐냐면 어떤 아이도 한번에 몸을 돌리거나 한번에 일어나 걷는 아이는 없다는 것입니다. 수백번 몸을 돌리려고 하다가 실패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가 없습니다. ‘아이고 몸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지 않으셨나보다. 그냥 천장만 보고 살자.’ 이런 아이가 있습니까? 아니요, 한 명도 없습니다. 수백번을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이들은 또 다시 의지를 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돌립니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모든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수백번 실패해도 또 한 번 의지를 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어린아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더 용기백배해지고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고 한 번 실패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도전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출애굽을 꿈꿨습니다. 자신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어느날 하나님이 전세버스를 몰고 오셔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타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이스라엘은 버스에 타서 편안하게 자고 있으면 하나님이 손수 운전하셔서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해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미 가나안 땅에 지어 놓으신 주택, 경작해놓으신 농장 이런 것들을 받는 출애굽을 기대한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발로 애굽을 뛰쳐 나오고 자신들의 의지로 가나안으로 걸어가길 원했고 그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던 7부족들과 용기 있게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길 원했고 그 땅에서 자신들의 의지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의지를 이스라엘은 내지 못했습니다. 조금 힘들고 어려우면 과거로 회귀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출애굽은 하였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출애굽 1세대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수기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으로 용기있게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모세는 지파별 대표 한 명씩을 뽑아서 총 12명을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40일 동안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땅,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용기를 내자고 합니다. 나머지 10명은 거기에는 거인들의 후손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 땅을 절대 정복하지 못한다 라고 보고를 하며 이스라엘을 낙담시킵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의 보고가 아니라 그들을 낙담시키고 우리는 절대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보고한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수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10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에 비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에 그 보고를 수용했을까요? 아닙니다. 왜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의 보고가 아니라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수용했냐면 그 10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자신들이 듣고 싶었하던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냥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10명이 와서 우리는 절대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해, 살기 위해서는 애굽으로 돌아가야해 라고 이야기 하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후에 이스라엘에 무수히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했는데, 참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참 예언자는 거부하고 거짓 예언자는 환영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거짓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고 싶어했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멸망의 때에도 심판을 앞두고도 거짓 선지자들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평화를 설교했습니다. 얼마나 듣고 싶은 메시지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던 참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듣기 원했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은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1세대부터 드러난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에 대한 소망은 있었지만 향가나안의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약속의 땅을 밟지도 못하고 광야 여정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민수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애굽 1세대가 경험했던 광야는 우리 인생의 여정과 동일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가 혼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돌봐주시고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이스라엘은 매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주셨습니다. 목이 마를때마다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셨습니다. 무더운 대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추운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돌보셨습니다. 아말렉 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와주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고 하는 하나님 임재 경험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는 하나님 임재의 경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부재의 경험으로도 가득한 곳이라느 겁니다. 하나님 부재의 경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 같은, 이제는 더 이상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은 경험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좌절되고,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아프고, 친했던 이들이 나에게 등을 돌리고 뒷담화를 하고, 힘겹게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는데 통과하자마자 더 큰 터널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등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까 싶은 것이 하나님 부재의 경험입니다. 광야는 하나님 부재의 현장입니다. 늘 목이 마르고,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적들이 사방에 있고, 길은 늘 험난합니다. 이처럼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가 혼재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부재의 순간에 하나님 임재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 임재와 부재의 경험이 공존합니다. 어떤 신앙인도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늘 하나님의 임재만 경험하고 있다 라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 인생의 반 정도는 어둠입니다. 깊은 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 같은 부재의 경험을 누구나 하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마치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은, 떠나신 것 같은 부재의 순간에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를 기억하는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동안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에는 내가 하나님 부재의 상황에 처해있지만 그동안 나에게 은혜 베푸신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부재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하나님의 은헤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 부재의 상황에서 너무 흔들린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만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 부재의 상황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울 때,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할 때, 이 하나님 부재의 순간에 우리에게 베푸셨던 은혜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부재의 순간을 능히 돌파해 내는 것이 신앙인의 내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마지막에 보시면 슬로보핫 딸들의 문제제기가 민수기 27장과 36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아버지가 죽고 나면 아버지의 재산을 아들들만 물려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슬로보핫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습니다. 슬로보핫이 죽고 나자 딸들이 문제제기를 합니다. 율법에 근거해보면 아버지가 죽고 나면 아들들만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아들은 없고 딸들만 있는 이런 상황에서 딸들인 우리들도 유산을 물려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슬로보핫의 딸들이 정당한 문제제기를 했을 때 하나님이 이를 들으시고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하십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있을 때는 아들들이 물려 받지만 아들들이 없을 때는 딸들이 물려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 다음에 36장에는 므낫세 지파 남자들의 문제제기가 나옵니다. 슬로보핫은 므낫세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므낫세 지파의 남성들이 문제제기 한 내용은, 딸들이 유산을 물려받았을 경우 만약 딸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과 결혼하게 되면 물려 받은 재산을 가지고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우리 지파의 재산이 다른 지파로 가게 되는거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한 지파의 재산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므낫세 지파 남자들이 딸들이 재산을 물려받게 되면 이런 위험성이 있다고 문제제기를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또 한번 새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그 내용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 받은 딸들의 경우에는 같은 지파의 남성들과만 결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한번 주신 말씀이 기계적으로 항상 고정화 된 것이 아니고 새롭게 변화된 상황에서 정당한 문제제기에 걸맞게 새롭게 변화 발전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 신학에서 계시의 발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고정화 된 것으로 이해하면서 어떤 상황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때로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주어진 맥락과 상황, 배경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과 배경에서는 적절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상황의 변화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변화에 걸맞게 당신의 말씀을 새롭게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을 계시의 발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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