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창세기 18장 19절에 나옵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너와 너의 후손을 택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의와 공도라는 말이 앞에서 언급한 미쉬파트와 체데카입니다. 한글 번역 성경을 보시면 의와 공도, 공의와 정의 등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동일한 단어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선택한 목적은 이 땅에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구한말에 기독교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36년 동안 식민지배를 받고 해방되자마자 분단이 되고 5년 후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는 비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비극의 역사에서 많은 신앙인들이 이 땅에 대한 소망을 접고 죽은 후 천당만을 소망했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에도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는 목적을 죽은 후 천당 가는 것에 두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강조하신 것처럼,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대한 모든 관심을 접고 죽은 후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 곳곳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는 도구로서 각자가 쓰임받기를 결단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라고 모든 관심을 접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죽은 후 천당만을 사모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정, 사법, 언론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아름답게 이뤄지길 갈망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선택하신 목적은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의와 공도는 미쉬파트와 체데카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그들만을 빼내어 내세로 끌고가기 위해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오늘날로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한 목적은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드러내길 원하시는 겁니다. 그 모습은 미쉬파트와 체데카를 구현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종교의식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직, 거룩, 진실함, 사람들을 존귀히 대함 등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온전히 잘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부르심 받은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왜 선민으로 부르셨죠? 이스라엘만을 선민으로 부르시고 구원해주시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민족은 심판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들을 버리신 건가요?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은 이스라엘이 먼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됨을 통하여 세계 만민을 하나님 앞으로 견인해 오기를 기대하신 겁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스라엘은 선민으로 부름 받았는데, 그 핵심은 만민을 위한 선민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만민을 배제한 선민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선민입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거룩한 하나님 백성됨을 통하여 세계 만민을 하나님 앞으로 견인해 오기를 기대하신 겁니다. 이스라엘은 만민을 위한 선민으로 부름받은 목적을 망각했습니다. 그 결과 배타적 선민사상에 빠져버립니다. 선민으로 부름 받은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임하고 선민으로 부름받지 못한 이방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임한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게 된 겁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이방 백성들의 구원에도 관심이 있다, 그들도 회개하면 그들도 용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보여주는 본문이 요나서입니다.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배타적 선민사상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요나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미쉬파트와 체데카,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직, 진실, 거룩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우리가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름답게 현실로 구현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당신의 백성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부름 받은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가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임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 부르심의 목적을 망각하고 배타적 선민사상에 빠져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은 넘쳐나지만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라고 그 목적을 질문받게 되면 대부분 “나를 사랑하셔서”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왜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답변을 합니다. 이런 대화가 계속 돌고 돕니다. 이 대답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구원하셨다, 사랑하셨다는 확신은 강력하지만 나라는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 삼으신 목적은 이 땅 가운데 미쉬파트와 체데카를 행하라, 구원하신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직, 진실, 거룩을 드러내라고,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교회 공동체로 우리를 불러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라고요?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온전히 선포하고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일궈냄으로서 하나님이 오늘날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아름답게 증거하라고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그 목적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이런 성찰과 반성과 돌이킴과 분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 6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유일하게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이 독처하는 것입니다. 나 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홀로 살아가던 아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창조하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2장 18절에 나옵니다. 돕는 배필, 여러분 오늘날에도 목사님이 결혼식 주례하실 때 우리 신부는 신랑의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여러분은 돕는 배필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돕는 배필의 역할을 잘 하는 것이죠?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돕는 배필은 히브리어 언어를 보며 ‘에제르 크네크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뜻은 반대하며 돕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대신한다, 세 번째는 대등한 관계에서 돕는다 입니다.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에게 돕는 배필을 허락해 주십니다. 아내만 남편의 돕는 배필이 아니고 남편도 아내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친구를 왜 만나게 하신 겁니까? 부모와 자녀를 왜 만나게 하신겁니까? 교인을 서로 왜 만나게 하십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관계에서 돕는 배필의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하는데 돕는 배필의 첫 번째 의미는 반대하며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속에 이미 인간이 실수할 수 있는 존재, 넘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흙이라는 말은 부서지기 쉽고 넘어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매일 매순간마다 다짐하고 결단하지만 자신의 다짐과 결단조차 지켜내지 못하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결단하지만 그 다음날 똑같은 죄악 가운데 넘어지게 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친히 흙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넘어지기 쉽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가 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넘어지면 심판하기를 즐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을 오래 참으시고, 인자와 긍휼이 충만하시고, 자비가 충만하시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지게 되면 다시 일어나길 기대하십니다. 열 번을 넘어져도 열 번을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존재로 결단하길 기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다며 언제 심판을 받습니까?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끊임없이 허락하시는 회개의 기회를 거부했을 때 우리 인간은 심판을 받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깨지기 쉽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돕는 배필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을 진짜 돕는게 뭐겠습니까? 이 잘못된 생각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반대해야 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이를 반복하지 않도록 반대하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돕는 배필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나옵니다. 초대교회는 땅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의무적으로 땅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땅이 있는 사람이 땅을 판 후 일부만 바쳐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팔았는데 아까우니까 일부만 바쳤습니다. 그냥 베드로 사도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일부만 바치고 혹시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이것이 땅을 판 전부냐고 물으면 전부라고, 마치 모든 것을 헌신한 것처럼 말하자고 부부가 입을 맞춘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가운데 누군가가 먼저 이런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만약 아나니아가 ‘여보, 우리가 땅을 판 돈을 다 바치는 것은 아까우니까 일부만 바칩시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물어보시면 전부를 다 낸 것처럼 말합시다’ 라고 마했을 때 삽비라가 진정 돕는 배필이라면 이 제안에 대해 반대해야겠죠. 이게 돕는 배필입니다.
구약을 보시면 이런 돕는 배필의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한 자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한 번도 이스라엘이 원하거나 기대했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불편해하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듣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예언자의 메시지야말로 진정 이스라엘을 살리고 돕는 것입니다. 이런 돕는 배필의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한 자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돕는 배필과 연관된 것이 창세기 3장의 원죄사건입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하와가 선악과 아래에 홀로 있을 때 뱀이 다가와서 하와를 유혹했고, 하와가 그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었다, 그리고 선악과가 너무 맛있어서 하나를 더 따서 자기 남편 아담을 찾아가 아담도 먹게 하였다, 이것이 1900년 이상 기독교 역사에서 창세기 3장을 해석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서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게 되면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3장을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재해석의 핵심은 뱀이 와서 인간을 유혹할 때 아담과 하와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절, 4절, 5절에 보시면 뱀이 말을 할 때마다 ‘너희’라고 하는 복수이인칭을 사용합니다. 복수이인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뱀의 말을 듣는 존재가 두 사람 이상이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6절에 보면 하와가 먹고 나서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함께’라는 것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임’입니다. 우리가 임마누엘할 때의 그 ‘임’입니다. ‘임’이라는 단어는 어깨가 부딪힐만큼 가까운 곳에 있을 때 사용합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이라는 넓은 공간에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깨가 부딪힐 만큼 가까운 곳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뱀이 와서 인간을 유혹할 때 뱀은 계속해서 하와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하와가 유혹에 넘어지고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그리고 하나를 더 따서 아담에게 줍니다. 그 현장에 아담도 있었는데, 아담은 처음부터 침묵, 묵인, 방관을 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아담은 계속해서 돕는 배필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기 3장에 나와 있는 선악과 사건은 2장 18절의 돕는 배필의 역할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실하게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제대로 해내길 기대하십니다. 돕는 배필의 역할을 제대로 행하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만 이 사람이 행동하는 바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지 그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만이 사람들을 진정 도울 수 있습니다. 아담은 돕는 배필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였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의 죄악이었던 선악과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왜 따먹었느냐” 이때 죄의 중요한 특징이 등장합니다. 아담이 이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였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죄를 범한 것은 자기인데,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책임을 “당신이 나에게 준 이 여자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하와에게 묻습니다. 하와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뱀에게 떠넘깁니다. 죄의 중요한 특징은 전가성입니다. 죄의 전가성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죄를 범하고 나서 그 죄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죄는 4중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죄를 범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셨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 버립니다.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두 번째 죄는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그러나 죄를 범하고 나서는 당신이 나에게 준 이 여자 라고 하면서 하와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떠넘깁니다. 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세 번째 죄는 자기 자신과도 분열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자기 모습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죄는 자기 자신과도 분열을 일으킵니다. 네 번째 죄는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죄를 통해서 땅은 인간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인간은 또 그 땅을 경작하기 위해 날카로운 농기구를 만듭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기 자신과도 분열을 일으키고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4중 파괴성입니다. 이 죄의 4중 파괴성이 회복되는 것을 구약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이런 구원의 삶을 이스라엘이 누리기를 하나님은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출애굽의 삶,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구원의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이방 백성들과 동화되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상실하였습니다. 그것이 구약이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번 한주 여러분이 거주하시는 삶의 모든 현장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 속에서 돕는 배필의 역할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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