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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요 11:17-27)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6.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11:17-27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축하하는 이 기쁜 부활주일에 다시 사신 우리 주님의 능력과 영광 그리고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위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이 완전히 숨을 거두신 것을 확인하고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넣고 돌로 막고 인봉을 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습니다. 예수님 생전에 '이 성전을 헐라 사흘 안에 다시 지으리라'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무덤에 누워 계시지 아니하시고 그가 말씀하셨던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설명할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기적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믿는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다음 열매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부활을 믿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도 마지막 부분에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바로 사느냐, 얼마나 사람답게 사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도덕이 있고 윤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에게는 도덕이나 윤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너무 분명한 것이 있는데 사람은 한번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당면한 현실 문제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나이가 많아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도 불의의 사고로, 또는 불치의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이럴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충격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랑하던 사람을 장사지내고 무덤에 묻고 돌아서게 될 때 우리 머리 속에는 인생의 전문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 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성경에 있는 말씀처럼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수 있을까? 죽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베다니라는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나사로라는 오라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에서는 예수님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전도사업을 도왔고, 주님이 피곤하실 때는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쉬시곤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 가정을 사랑하셨고 이 가정 역시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주님,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습니다."라고 알려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칩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들다니? 그렇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도 병이 듭니다. 고통을 당합니다. 풍낭을 만납니다. 실패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아뢰면 예수님이 당장에 달려오시리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연락을 받으시고도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병든 나사로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있은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 당한 이 가정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문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가 주님을 맞으러 나아갔습니다. 주님을 뵙는 순간 슬픔이 북받쳐 오른 마르다는 원망 섞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하실 줄 아나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르다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 말씀을 들은 마르다가 무엇이라고 응답했습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하실 수 없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때 마르다는 슬픔 속에서도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도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26장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12장 2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오 있겠고 수육을 받아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들도 있을 것이라"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까?

 

부활이 가능합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신앙고백 위에 서지 아니할 때 다른 말은 더 할 것이 없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되었고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던 때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나는 이제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하실 줄 믿나이다"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우리의 몸을 지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활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는 두 종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파요, 다른 하나는 사두개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지금으로 말하면 소위 정통보수파요, 사두개파는 말하자면 자유주의 신학파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고 다른 모든 책은 성경으로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모세 오경에서는 부활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떤 사두개파 사람하나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부활에 대한 진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부활을 믿으신다고 하셨는데 가령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얼마를 살다가 그만 죽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풍속대로 하면 자식이 없이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이 형수와 같이 살다가 자식이 없이 또 죽었습니다. 형수는 그 다음 동생과 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여자는 일곱 형제와 같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 다음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로 같이 살겠습니까? 아주 묘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너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모르는 도다. 이 다음 부활하게 되면 천사와 같이 될 터인데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소리가 다 무슨 소리냐? 왜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느냐?"고 반박하시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모세오경에 부활이 없다고 했는데 출애굽기에 보면 가시덤불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 않는냐? 가시덤불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한신 말씀이 무엇이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끼리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영혼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장례식을 치루신적이 없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도 보는 대로 무덤에 간지 나흘 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일시적인 부활입니다. 이것은 부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자기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셔서 모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후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시면서 이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고 하면서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순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죽은 자들이 다시 썩지아니할 것으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부활한 몸은 물론 이 몸을 기초로 해서 부활하겠지만 지금의 이 몸과 같은 몸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 보면 "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경한 몸으로 다시 살리라" 했습니다. 빌립보 3장 21절에 보면 "위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부활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몸으로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몸까지, 우리의 인격 전체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육체만도 아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합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인간 전체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의 문제는 비록 관념이 희미하긴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종교에서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사상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황천에 간다는 희미한 사상이 있습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저 먼 나라로 간다고 해서 유명한 왕의 묘에는 큰방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시체를 땅에 묻기 전에 시체의 입에 돈을 한입 가득 넣어 주는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역시 사람이 죽으면 강을 건너서 딴 세계에 간다는 사상이 있기 때문에 뱃사공의 뱃삵을 내야 하니까 돈이 필요 할 것이라고 해서 생긴 풍습이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나 로마의 유명한 시세로 같은 이는 철학적 견지에서 인간의 영혼은 불명하고 반드시 살아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유물론자나 무실론자는 말할 것 없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막연하게 나마 인간의 내세와 영생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내세와 영생을 믿습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살고 이t는 이 우주는 이성적인 우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치에 맞는 우주입니다. 무리한 우주가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이 있고 모든 것에 지혜가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견지에서 보면 사람이 세상에 잠깐 살기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높은 이상과 큰 포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과 포부를 이 세상에 살면서 다 이루고 간 사람이 있습니까?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생활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아무래도 인간에게는 내세가 있고 그 내세에 가서 인간의 포부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과학이 발전하면서 소위 물질 불멸의 원리를 믿게 된 것입니다. 물질이란 것이 형태는 변하지만 물질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가령 솥에 물을 끓이면 물이 없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이 수증기로 변했을 따름입니다. 양초에 불을 켜면 양초는 녹아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양초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양초에 있는 탄소와 공기중의 산소가 결합해서 탄산가스로 변한 것뿐입니다. 이것을 화학적 변화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으로된 이 몸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무덤에 묻혀서 시간이 흐르면 썩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얼마 후에는 한줌의 흙과 물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혹시 화장을 하면 탄산가스와 한 줌의 재만 남을 것입니다. 이것은 화학적 변화 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은 후에도 모양만 변한 것이지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죽으면 없어집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남아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이 상선벌악의 원리가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오히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괴롭히고 손해를 주고 핍박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상선벌악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내세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인간 이성의 요구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만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 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이런 원리가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내세와 영생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시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도저히 우리의 한정된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런 문제들을 확실히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대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것이 많도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목적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오래 산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만은 아닙니다. 이 우주에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참된 생명을 우리도 얻는 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면 그때 이미 영생을 다시말 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 순간 영생을 얻었습니다. 미래에 있을 일이 아니고 과거에 이미 있은 일입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 영생을 얻은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우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영원한 하늘 나라에 가서 계속 장성하고 계속 발전하고 계속 온전케 되어서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육신의 장막을 떠나는 그 즉시로 영원한 집에 거하게 되는 진리를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육신은 어떻게 됩니까?

 

당분간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무덤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날에는 이 육체까지도 부활해서 영혼과 육체가 합해진 인격전체가 구원을 얻어서 온전한 인간이 되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게 영원무궁한 축복의 생활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후 6세기 기독교가 처음으로 영국에 전파될 때 영국은 작은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때 였습니다. 구중에 노덤부리아 라는 작은 라라에 에델백스라는 왕이 있었는데 오에게 어떤 전도자가 찾아와서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사는 축복을 받는다고 전했습니다. 에델백스는 저녁에 신하들을 모아 놓고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이 예수를 믿을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시오?' 라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더니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여름밤이어서 창문을 열어놓고 있었는데 참새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와 한바퀴 돌고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재상이 "이제 그 참새를 보니까 캄캄한데서 이 밝은 방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캄캄한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 참새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도 어디서인지 왔다가 어디론지 가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종교가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면 이런 종교는 믿어야 된다고 사례됩니다." 그때 에델백스 왕과 모든 신하들이 W3O상의 말을 옳게 여겨 그때부터 이 노덤부리아 나라가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제일먼저 회개하고 예수 믿기로 작정한 나라가 이 노덤부리아 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가르쳐 주는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생을 믿습니다. 그래서 금생과 내생에 무한한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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