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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에 대한 기독교적인 바른 이해./ 딤후 2:20-21 /

by 【고동엽】 2021. 12. 5.

貴賤에 대한 기독교적인 바른 이해.
딤후 2:20-21.

성경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의 원인은 욕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데 또 성경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욕심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과 같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욕심 그 자체가 아니라 잘못된 욕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욕심에는 두 종류의 욕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버려야하는 욕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버려서는 안 되는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버려야만 하는 욕심은 죄와 세상에 대한 욕심이고, 버려서는 안 되는 욕심은 의와 하나님에 대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와 세상에 대한 욕심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의와 하나님께 대한 욕심의 결국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두 욕심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죄와 세상에 대한 욕심을 갖게 되면 의와 하나님께 대하나 욕심이 없어지게 되고, 의와 하나님께 대한 욕심을 갖게 되면 죄와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와 하나님께 대해서는 별로 욕심이 없고,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세상에 대해서는 욕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야 하는데, 거기에는 관심과 욕심이 없고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만 관심과 욕심이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아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같은 세상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 기도가 지나쳐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욕심이 커지게 되고 그 때문에 결국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짓게 되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사망의 삶을 산다고 하는데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제가 참으로 좋아하고 귀히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와 질그릇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 네 그릇을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다시 분류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에 대한 말씀과 금그릇과 은그릇 그리고 나무그릇과 질그릇을 이야기하면 자동적으로 금과 은그릇은 귀한 그릇이고 나무와 질그릇은 천한 그릇이구나 하는 판단을 즉각적으로 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貴賤에 대한 판단 기준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면 귀한 것이고, 일단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 천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한 그릇이 되기 위하여 죽어라고 돈을 버는 것입니다. 사람도 돈이 많으면 귀한 사람이 되고, 돈이 없으면 천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귀천에 대한 판단과 이해가 전혀 우리들과 다르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천에 대한 판단 기준은 돈이 아니라 깨끗함입니다. 그리고 그 깨끗함의 목적은 쓰심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그릇이 귀한 그릇이 아니고 깨끗하여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고,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은 천한 그릇입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나무와 질그릇 같아 보여도 하나님이 쓰시면 귀한 그릇이고, 세상 사람들 보기에 금그릇과 은그릇 같아 보여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은 천한 그릇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욕심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깨끗한 그릇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욕심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있지 아니하고 금그릇과 은그릇과 같은 존재가 되는 데에 있습니다. 금그릇과 은그릇과 같은 존재가 되는 데만 관심이 있고 욕심이 있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는 별반 관심과 욕심이 없다는 데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과 그 다음 주일에 걸쳐서 안수집사와 권사 선거를 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를 놓고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한지 모릅니다. 이런저런 저를 불안하게 하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장로 선거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번 장로 선거는 큰 시험 없이 잘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시험에 들 뻔도 했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잘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선거를 잘 넘어 갈 수 있었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집사 선거와 권사 선거에 넘어지게 되면 얼마든지 교회가 큰 시험에 들게 되고 우리처럼 뿌리가 약한 교회는 그 때문에 하루아침에도 교회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을 선거할 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교회의 직분을 세상적인 계급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욕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지나쳐서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는 금그릇 안수집사와 권사는 은그릇, 서리집사는 나무그릇 서리집사도 아닌 일반 교인들은 질그릇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 그리고 안수집사와 권사는 귀한 그릇으로 이해하고 서리집사와 일반교인들은 천한 그릇으로 이해하고 은근히 교회 안에서 그 그릇과 자리를 놓고 경쟁합니다. 그리고 은근히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그와 같은 경쟁심을 유발시켜 놓고 충성경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충성경쟁을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면을 통하여 우리 한국은 많은 성장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하고 신앙적인 바른 성장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성공을 하였으나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성숙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직분을 계급과 명예로 이해하고 욕심을 부리고 경쟁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금그릇과 같은 사람이 되는가 은그릇과 같은 사람이 되는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벌써 큰 교회가 되었고, 세상적으로도 벌써 이름이 알려진 제법 유명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은 인간적으로 명예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교회는 장로선거와 집사 권서 선거 때 아주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거 때만 되면 불안해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금그릇이 되느냐 은그릇이 되느냐에 대한 욕심과 관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무슨 그릇으로 쓰시던지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 드리고 자기는 무슨 그릇이 되든지 깨끗하고 헌신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는 데만 관심과 욕심을 가지고, 선거와 직분에는 큰 관심 없이 초연할 수는 없을까요? 장로와 집사 권사가 되었다고 그 자체를 자랑스럽게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장로와 집사와 권사가 되지 못했다고 섭섭하거나 서운하게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리와 주어진 자리에서 그냥 묵묵히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교회 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금과 은을 귀히 보고 나무와 흙을 천히 보는 것은 세상적입니다. 장로와 집사를 높고 귀하게 보고 일반교인은 낮고 천하게 보는 것은 신앙적인 생각과 자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무와 질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이 싫어서 그것을 사양하고 피할 때, 그래서 하나님이 나무와 질그릇을 통하여 담고 싶어 하시는 것을 담지 못해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실 때 기꺼이 자기 자신은 나무와 질그릇으로 드려 마음껏 하나님이 쓰시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귀한 것입니다.

금그릇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필요합니다. 큰 집 즉 하나님의 집에는 금그릇도 필요하고 은그릇도 필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금그릇과 은그릇을 부정하는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저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고지를 정복하라고 설교합니다. 다시 말해서 금그릇과 은그릇 같은 사람이 되라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저의 설교를 오해합니다. 그래서 반대로 나무와 질그릇 같은 사람이 되라고 설교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고지를 정복하라 설교를 하고 금그릇과 은그릇 같은 사람이 되라고 설교하는 까닭은 그 자체가 귀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금그릇과 은그릇을 통하여 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사역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는 것을 사사로운 욕심으로만 이해하고 무조건 그것을 버리게 한다면 그래서 신앙이 좋고 실력도 좋은 사람을 다 나무와 질그릇이 되게 한다면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어야 하고 은그릇도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하여서는 금그릇도 필요하고 은그릇도 필요하고 나무와 질그릇도 필요합니다. 목사도 필요하고 장로도 필요하고 안수집사도 필요하고 권사와 서리집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장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집사와 권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로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권사와 집사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와 같은 직분을 뽑는 선거에 뽑힐 것이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뽑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 선거에 뽑히지 못할 때 시험 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선거에 뽑히지 못하여도 전혀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선거에 뽑히지 못했다고 시험에 드는 사람은 직분을 인간적인 명예와 계급으로 이해하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금그릇과 은그릇과 같은 사람이 되는가에만 의미와 가치를 두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이번 선거에 뽑히지 않게 되면 교회를 떠나든가 아니면 그동안 하던 봉사를 그만두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조용히 교회를 떠나든가 봉사를 그만 둘 수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 교회에 대하여 불평과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 남아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가 다 여기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문제가 여기서 생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교회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위하여 깨어 기도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시험에 들지 않는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 시험 들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일부는 믿음이 좋아서이지만 대부분은 교회와 하나님께 대하여 별로 관심과 욕심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교회에 당장 눈에 띄는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저들 자체가 이미 교회의 큰 문제꺼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금그릇과 은그릇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문제이고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에 관심과 욕심이 있어서 금그릇이 되느냐 은그릇이 되느냐, 나무그릇이 되느냐 질그릇이 되느냐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어떤 그릇이던지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일에 쓰임만 받는다면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같은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와 같은 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욕심은 어디에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관심과 욕심은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는데에 있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기뻐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는 것입니다. 소유가치가 높은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가 높은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가치로 따지고 평가합니다. 금그릇이 되고 은그릇이 되는 것을 욕심내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가치는 소유가치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로 따지는 것입니다. 존재가치는 존재목적대로 쓰임 받을 때에만 발생합니다. 우리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금그릇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그릇 중에 대부분은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그 자체만 자랑하고 즐길 뿐 그 그릇으로 하나님을 담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나무 그릇과 질그릇 같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들의 대부분도 대개는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금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은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차별한다고 생각하지만, 교회와 목회자가 자기를 피라미 취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저들이 귀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저들의 관심 또한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는 그 자체에만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설교를 통하여 貴賤에 대한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바른 이해를 가지게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별것 아닌 쓸데없는 것에 욕심을 가지지 아니하고 정말로 가치 있고 의미 있고 귀한 것에 욕심을 내며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그릇과 은그릇 나무그릇과 질그릇을 불문하고 여러분들 모두가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그릇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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