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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그 이후 출29:43-46

by 【고동엽】 2021. 12. 6.
구원, 그 이후 출29:43-46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 이후에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중요한 신학적 해석을, 아래 설교가 잘 보여줍니다.
프린트해서 여러 번 읽어야 하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핵심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구원 그 이후’ : 성막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29:45~46


출애굽기의 목적은 위 본문 속에 분명히 나와 있다.
우리는, 출애굽기는 제목이 ‘출애굽’이라서
자꾸 노예생활에서 탈출해서 해방(구원)을 얻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나 왜 그 일이 일어났으며,
그 일이 가지는 목적의 전체가 무엇인가는... 자칫하면 놓치기 쉽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었다. 위 본문


▲성막의 목적 : 그들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 되심
그래서 출애굽기에 가장 많이 할애된 내용은 ‘성막’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①구원해서
②자기 백성을 삼고, 당신을 경배케 하며,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끔 하는
목적을 위하여 그들에게 출애굽(구원)의 역사를 베푸셨던 것이다.


바로의 종으로 비참함, 곤고함 가운데 살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바로)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크신 두 가지는
바로 율법과 성막이다.


①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 백성들의 질서를 위함이요,
②성막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만들게 하신 것이다.


출25~31장까지는,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세밀한 부분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부분이고,


출35~40장까지는 백성들이 그것을 지시받은 대로
어떻게 세밀한 부분까지 말씀에 맞추어 지었는가 하는데 길게 할애되고 있다.


그것이 출애굽기 후반부에, 성막에 관해 장황하고 길게 할애하고 있는 이유다.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 원하신다.


▲순종해야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
성경은 성막이 얼마나 아름답고
그래서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는가 하는 감상에 젖지 않는다.


즉,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시고 임재하시는 것은
순종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시한 그대로 짓고, 명하신 규례대로 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성막을 통해 그들과 임재, 동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진실하심을, 즉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작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백성들이 ‘순종’해야 일어난다.


하나님이 베푸신 어떠한 은혜도
그 수혜자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다.




◑사도 요한의 ‘구원 그 이후’ : 붙어서 열매 맺음


▲출애굽기의 성막=요한복음의 가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5~8


포도나무의 가지는 독립적일 수 없다.
나무에 붙어있어야 그 생명의 기운을 누릴 수 있다.
그 가지에 열리는 포도나무 열매는 포도나무가 만든 것이지, 가지가 아니다.
열매는 그저 가지에 달릴 뿐이다.


그래서 나무에서 분리된 가지는, 새삼스런 형벌을 가할 필요가 없다.
분리된 자체로 형벌을 받게 된다.
즉, 말라져 버리게 된다.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그래서 요15:8절에서 보듯이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은 가지의 책임이고 의무이기 이전에,
그렇게 함으로써 나무의 영광을 나누는(나타내는) 것이 된다.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가지에 맺히는 열매로 인하여 그 나무의 영광이 드러나며
그것은 동시에 가지의 영광이다.


순종이라는 것은, 우리가 열매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적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의 존재의 위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의미나 가치를 스스로 창출할 수도 없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지만
저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고, 그 영광이 나타난다는 차원에서,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와 동일한 의미로)
출애굽 사건, 그 핵심 목적인 성막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심으로써(나무에 붙어있음으로써)
그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과 구별됨으로써


(보호자가 되시고 복을 주시는 저들의 필요에 답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당신의 어떠하심이, 그 거룩하심과 그 영광이
온 세상에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아들이 전교 일등 하면, 그의 부모가 영광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의 차별성을 자랑함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주 되시고, 구원자 되시고,
높으심과 그 충만하심이 가득하신 창조주, 구원주, 아버지, 하나님이 되신다.


우리 성도는 가지로서
그 분께 붙어있음으로 말미암아, 즉, 교제함을 통해서
나 자신이 열매 맺는 삶을 살 뿐만 아니라,
그런 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이며,
-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사도 바울의 ‘구원, 그 이후’ : 교회의 충만,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3~6


▲창조와 구원의 궁극적 목표
- 그의 은혜의 영광, 즉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것
이것이 ‘창조와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른 별명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것을
기억하자.


즉, 예수 안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때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이, 오직 ‘구원’에만 매달리고,
신구약 성경에 관통하는 중요한 사상인
‘구원 그 이후 -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을 간과하는데 대해
설교자의 안타까움이 흐르고 있다.)


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역사는
이미 출애굽 사건과 성막을 통해 예언되고 예표된 것이다.


출애굽에서 저들과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렇게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그 영광을 입은 자녀에게도 역시 영광이다.
자녀의 영광=아버지의 영광, 이것이 우리 구원의 이유이며, 구원 이후의 목적이다.
('구원'이란 개념 속에 '구원'은 물론이요, '구원 이후'도 포함된다.)





◑교회란 무엇인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0~22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 해 계실 때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가는(지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교회’라 부를 때는
조직된 기관, 신앙의 공동체를 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는 명칭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이라 했을 때,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을 지칭하는 것과 같다.
이 구약 ‘이스라엘’의 신약적 지칭이 ‘교회’이다.


‘교회’와 비슷한 말로 ‘성도’, ‘신자’가 있다.
*성도 - 믿지 않는 자와 구별해서 쓰는 말.
*신자 - 신앙고백으로 예수를 믿는 자를 가리키는 말.
*교회 -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된 자’를 가리키는 의미. 엡1:22~23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1:22~23


▲그리스도와 묶여 있다.(연합)
위 엡1:22~24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와 각 신자가 연합되어있다는 뜻이다.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어서 둘을 분리할 수 없다.
머리와 몸이 연합되어있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생사와 화복을 같이 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로 쓰는 말이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강림하시고,
저들의 삶과 상황에 함께 하시는 약속의 실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면,
신앙공동체로서 조직된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생각할 때도
바로 이런 개념의 공동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교회)를 당신과 묶어서
(출애굽기에서 보듯이)
종 되었던 애굽에서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구해 낸 그의 백성들을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묶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때 연합된 교회에서는 충만이 나타난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4-19


어떤 충만인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한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만물 충만이니라 엡1:23
이 말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충만이다.




즉, 하나님과 연합해 있으니,
자연히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성품이 교회(성도)에게 전이되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격, 사랑, 은혜, 능력 등 이런 것들로 충만해 진다.


▲믿음의 ‘적극적’ 의미
우리가 교회로 부름 받은 것은(구원 받은 것은)
구원에서 부정적인 부분만 말고 (죄, 위기, 영벌에서 구출함-구원-만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져 있으면,
당연히 내게 그 분의 충만이 전이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으로 끝나지 말고,
구원 이후에...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포도나무에 가지가 한데 묶여 있듯이,
출애굽기에 성막이 백성들 가운데 거했듯이,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와 몸이 한데 묶여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충만, 열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가지, 몸, 교회로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영광을 나타내신다.


▲왜 이런 강조를 해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구원이 ‘부정적 차원’에서 구원,
즉 ‘억압과 비극으로부터의 해방’에서만 끝나고
구원 받은 후에는
내가 주를 위해서 해야 할 일(헌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연합, 충만, 임재 개념을 빠뜨리고, 막바로 '봉사, 헌신'으로 들어가는데...


물론 헌신해야 한다. 그렇지만, 헌신이전에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인하여 충만해지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일들을 목적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구원 받는 자로서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한다는 봉사와 헌신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일에 앞서)
너무 일찍 자기 소원이 되어서,
본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가는 것에 비례해 나타나야할
세상과 구별(성화)에 무관심하고


세상의 가치들(윤리 도덕적 차원의 선행, 봉사)로서
자기의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나타내려 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잘 못 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일반적 가치(윤리, 도덕)속에서의 더 나은 존재로서의 싸움으로
그 방향성과 중요성을 빗나가게 하면 안 된다.


성도가 구원 받은 이후에
하나님과 붙어있음, 성막의 임재,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충만해지는 등의
이런 원리에 더 강조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보다, 사회봉사, 선행, 교회봉사 등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신학적 잘못이라고 설교자는 지적하고 있다. 그것들도 필요하지만 말이다.


▲쉽게 얘기해서, 교회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되는 일을 위하여
서로 격려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요
함께 하여 훈련하는 공동체로서 일차적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서로 사랑하고 용서가 잘 안되는 존재들이다.
그 사랑, 용서가 교회 안에서도 잘 안 되는데, 밖에 나가서야 오죽하랴!
그래서 교회는 ‘일차적으로’(윤리 도덕적 봉사에 앞서) 이 일을 위하여 있다.


즉, 충만, 임재, 붙어있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유지, 성화시켜나가야 한다.
이런 것 제쳐놓고, 일부터 하려고 뛰쳐나가니... 종종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교회에 오시면 다른 이야기 하지 마시고,
자기 신앙의 정진을 위하여 교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집중하셔야 한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시라!


▲세상의 평가에 동요되지 마시라!
그런데 세상은 교회를 평가하는 것이
'생명과 진리'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평가한다.


세상은 교회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종교인이니까, 우리보다 나아야 될 것 아니냐!’ 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세상보다 나아야 한다.
그러나 성도가 가지는 윤리 도덕은, 생명과 진리로부터 나오는 윤리 도덕이다.
이에 반해 세상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은, 생명과 진리와는 무관한 것들이다.


우리가 저들보다 더 나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윤리 도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는 윤리 도덕이다.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윤리도덕이다.


세상은 그런 데(십자가)까지 가지 않는다.
먼저 자기 앞가림부터 하고, 그 다음에 윤리와 도덕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 싸움에 우리가 실족하기도 하고 도전을 받기도 하는 것은,
성도가 남들보다 더 나은 뿌리와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물론 우리가 많이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도전을 입막음하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서 맺는 열매,
그런 열매로 인하여 변화된 나,
생명과 진리가 뿌리가 되어 나타난 열매가 아닌


기독교를 지키고 싶고, 우리가 갖는 신앙의 고급함을 확인시키고 싶은 일념에서
세상 앞에 그들보다 나은 선행(사회책임)을,
그들이 매기는 잣대로 만든 순위에 우리가 최고 위치를 점하려는 욕심으로
기독교를 증명하려고 하면, 거기에 매달리다보면,
우리는 말라버린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처럼...


생명과 진리가 없는 윤리, 도덕이나 선행 등 어떤 가치도,
사람의 영혼을 두드리지 못한다.


생명과 진리가 있어야만
사람의 영혼에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회책임도 중요하고 교회가 꼭 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임재, 붙어있음,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을 드러냄을
먼저 우선해야 하며
그것이 우선되지 않는 사회책임이나 봉사는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설교자의 주장.




▲기독교가 세상 윤리 도덕보다 더 고차원적인 이유 : 생명을 낳는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잘 보시면
그 하는 신앙고백에 비해서 일반적 성도의 삶의 모습이 형편없는데,
그의 사람을 통해서 어쨌든 열매가 맺힌다. 전도의 열매가 맺힌다.
자기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낳는다.


아무리 고급한 철학과 세상지식을 갖고 있고, 고결한 도덕성과 인격성이 있어도
그것은 결단코 생명을 낮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를 변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복들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의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확인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윤리, 도덕적 사회책임도 마땅히 해야 한다.
그러나 혹시 우리가 그들보다 못 하다는 말(루머)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저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생명 나눔, 영혼구원)들을 하기 때문에
결코 기죽을 필요 없으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생명으로 이웃과 생명을 나누는 이런 일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한다.
내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접목되어 있으면, 순종할 때, 자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는
엡3:14-19 의 말씀은 이렇게 감격의 고백으로 연결된다.


▲바울의 찬송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3:20~21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그의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사실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불렀다.


즉, 우리를 당신과 묶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우리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작정, 허락된 구원의 경륜을 확인하게 되자
그의 결론은 넘치는 찬송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사회책임이 우선적이지 않다.
믿음의 공동체이고 우리가 고백하는 고백과 우리에게 허락된 약속들을
우리 자신들에게 충만케 하기위해 허락된 기관으로 교회를 이해해야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보다 더 사회 봉사적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면 안 된다. 물론 빛과 소금으로서 사회봉사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더 우선할 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교회는 사회적인 봉사를 해야 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그렇게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충만해야한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고, 교회(신자)에게 요구해야할 일이다.

우리는 이런 도전을 기독교 역사 내내 해보았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을 포기하고 나와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다니는 이 유혹을, 이 시험을,
기독교가 역사 내내 받아온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말라버렸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무엇인가?
‘교회를 위하는 것’이다. 골1:24
성도들이 각각 ‘온전한 교회’로 서도록 수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는데 끝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교회(우리)를 당신과 묶으셨다.
그 일에 바울이 수고하며 받는 괴로움(남은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했다.


이것이 출애굽기의 주제다.(이 설교는 출애굽기 강해)
요한복음, 에베소서도 마찬가지!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구원해내어서 그 한 가운데, 그 백성들 가운데
그들의 삶과, 존재, 여정 속에 저들과 함께하므로 (하나님과 백성을) 하나로 묶으셨다.
이것이 바로 성막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제사장 국가로 부름 받았는데,
그들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무슨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시위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실과 삶이 ‘다름’으로 인하여,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로 구별, 율법으로 구별, 거룩함으로 구별함으로 영광을 나타냄)
이것이 오늘날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의 다름이요, 구별이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로 허락되었고,
우리가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늘로 아직 불려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 거룩함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혼자 쉽게 낙심하고 넘어지는데,
그래서 서로 붙들어주고, 서로 교회로 든든히 서 가도록 서로 격려함이 필요하다.
즉,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
이 일은, 골1:28에 의하면 ‘완전한 자로 세움’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1:28


이것이 교회(성도)가 가지는 책임이며, 우리에게 허락된 말할 수없는 신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신 그의 창조주, 구원자, 아버지로서 가지시는
기쁘신 뜻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다.


여러분 각자가


남은 여생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느 지경까지 인도함을 받는지 기대하시며
그런 신앙생활이, 세상 앞에서 성도는 다르다! 라는 항복을 받아내시며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증거되고 영광을 받으시며
여러분에게는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자의 인생이 되시길 바란다.


구원은, 한 번 구원 받은 사실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 구원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괴로움이나 족쇄가 아니라, 즐거움과 특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영광과 생명과 충만함을 부여받고
또한 나를 통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렇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그 목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근간이다.


<인터넷 설교 정리, 07.04.01. *원제목: 출애굽기 38회, 출29:43-46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http://blog.daum.net/bible3/11154880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박지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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