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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극복하라 / 마 6:25-34 |

by 【고동엽】 2021. 12. 6.
염려를 극복하라
마태복음 6:25-34




무더운 여름철이 오면 더위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산으로, 바다로 시원한 곳을 찾아갑니다. 사람은 쉼을 얻고자 자연을 찾아갑니다.
마음과 육체가 쉼을 원하는 것은 삶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쉬지 못하면 육체가 아무리 쉬어도 쉼이 되지 못합니다. 마음이 쉬지 못하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걱정,
근심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도 마음에 걱정이 있는 한 쉼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의 세계에서 쉼을 배우게 하십니다.
옛말에 하나님은 아버지요, 자연은 우리 어머니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품속에 있으면 쉼이 있듯이 자연과 함께 있으면 쉼이 있습니다.
노벨 의학상을 받은 알렉시스카렐 박사는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피어있는 꽃 한송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삶의 큰 진리를 가르치면서 평안하게 살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모든염려와 걱정에서 쉬게 하십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은 마음에 눌리는 압박감입니다.
당시는 가난한 시대였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은 민중들에게는 큰 염려거리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문제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되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매주일 강단에 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까 피로와 긴장에 쌓인 가슴을 풀어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마음에 파도처럼 엄습하여 오는 염려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근심은 목을 조르고 동물이 목을 눌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근심에 대하여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하십시다.




근심은 비합리적인 것입니다(시시한 것이다).
인생은 먹고 입는 것, 소유하려는 어떤 것보다 소중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말은 '천하보다 소중한 목숨과 몸을 가진 사람이 시시한 것으로 마음을 빼앗기느냐'는 것입니다.


근심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28)
'자연 만물도 잘 살아 있는데 하물며 인간으로 걱정하느냐'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새들이 일을 안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염려를 안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참새처럼 먹고 살려고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들은 미래를 염려해서 저장하고 그것으로 안전을 찾지는 않습니다.
자연의 만물이 걱정을 않고 살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근심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근심으로 해결된 일이 없고 나아지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무려 500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염려는 무익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염려하므로 과거를 해결할수 있으며 미래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염려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두 가지 무서운 악입니다. 영혼을 병들게 하고 생명을 해롭게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염려는 거의가 다 이 문제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건강문제, 생활문제, 명예 등 모두가 내 삶의 문제입니다.
어떤 분이 말한대로 염려는 기한 전에 무는 장래의 가상적 곤란에 대한 이자라고, 장차 곤란이 오리라는 가상에 대하여 미리 이자부터 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염려는 강에 미치기 전에 어떻게 강을 건널까 하는 도강의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양식이 떨어지기 전에 밥 굶는 수고입니다. 병이 나기도 전에 입원하는 수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죽기 전에 장사하는 수고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근심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30)


근심은 영적이지 못합니다(염려는 비신앙적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이 세상에 불신자들은 근심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보살펴 주는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근심할 자격도 없고 근심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근심은 하나님께서 짐을 져 주시지 않으리라는 불신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근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근심은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정신적 살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근심은 죄인의 본성입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장 19-20절)
사람의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 가는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항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싸움을 선포할 때 당신은 결코 평화가 없습니다.
근심은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실패자로 만들어 인간을 불행하게 울도록 만드는 무서운 악이요, 신앙을 죽은 신앙으로 만드는 원수 마귀의 무서운 무기입니다.
'염려'는 헬라어로 '매림노'라는 말인데 이것은 '마음을 나눈다'는 말입니다. 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실패와, 좌절과, 열등 인생으로 만드는 병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나누이고 영적으로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살인마입니다.


염려는 건강을 해칩니다.


마음의 염려는 오직 우리 마음의 상태이기에 마음의 생각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한 의과대학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의사에게 오는 환자의 20%가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면할 수만 있다면 자기들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음식 때문에 위궤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좀먹는 근심과 염려 때문에 위궤양에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근심은 여자를 늙게 만들고 아름다움을 빼앗아 갑니다.
현대인의 두 가지 전형적인 병은 위궤양, 관상동맥혈전증인데 이것은 염려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장수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지금 우리들 마음속에 바라는 것은 염려없이 일생을 살고자 하는 것일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어야 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어린 자녀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있다면 자신을 귀한 존재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사실 염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심입니다. 의심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침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 노릇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 아버지 노릇까지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요, 우리는 종입니다. 모든 염려는 주인의 것이요, 종은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내가 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
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만일 하나님의 가장 귀한 생명을 주셨다면 그 목숨을 유지할 음식을 주시리라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주셨다면 입을 옷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책망은 믿음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의심하므로 염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너희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는 장래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둘째, 염려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33절)
언제나 생각이 나에게 집착되어 있는 한 염려나 근심이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상한 정체여서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강하게 달려드는 것이 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아예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염려가 그의 생에서 결코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하는 심정으로 봉사할 것을 찾는 자에게는 결코 세상 염려가 있을 리 없습니다.
꿀벌은 근심할 틈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는 자는 자기 문제로 고민하거나 염려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애틀의 프랭크 루프 박사는 23년간이나 관절염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는 불구자이면서 인생을 풍족히살 수가 있었으니 그 비결은 그는 남에게 봉사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병상에 누운 다른 불구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모아 가지고 그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불구자들끼리의 단체를 만들어 서로 편지로 격려하려 하였고 마침내 전국적인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매년 1만 4천여 통의 편지를 쓰고 방송과 집필로서 수천명의 병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목적 의식, 즉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세계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자기보다 더 의미있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자기를 바친다는 기쁨을 그는 가졌던 것입니다.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말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진리입니다.
항상 주기를 좋아하는 샘물은 계속 줄 것이 있고 생생하지만 고여 있는 도랑물은 썩어 악취를 내고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남에게 봉사하며 자기의 생을 나누어 주려고 하는 자는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지만 받으려고 하는 자는 불만이 가득합니다.
남에게 좋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것입니다. 남에게 장미를 주는 사람의 손에는 항상 약간의 향기가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욕설을 주기 위하여서는 내 입에 독을 품어야 하고 그 독은 자기 심장을 뛰게 하고 온 몸에 독기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염려를 없애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남에게 흥미를 가짐으로서 자기를 잊을 수 있고 남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를 일을 매일 하나씩 하자는 것입니다.
링컨은 "모든 사람은 그들이 행복하려거든 그만큼 남에게 행복스럽게 할 만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을 제거하는 일이나 행복을 창조하는 일은 오직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데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뉴욕 어느 고아원에서는 하루에 세 가지씩을 의무적으로 실천토록 했습니다.
첫째, 매일 아름다운 것을 하나씩 찾아 볼 것이요,
둘째는 매일 감사한 일을 하나씩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매일 선한 일을 하나씩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행복클럽이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오늘 일은 오늘로 족하게 내일 일은 내일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은 오늘뿐입니다. 한 날의 문제는 그날의 문제로 족합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오늘로 당겨서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내 내일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스스로가 염려할 것이요, 내일 일은 내일 자신이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저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어있는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백년을 못다 살면서도 다른 사람의 근심까지 모아 살고 있으며 살지 않은 미래의 것까지 가불하여 근심하며 살고 있습니다. 염려없이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 마음을 비우고 자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동물의 세례는 인간처럼 염려가 없습니다. 어떤 새도 이웃의 새보다 더 많은 둥지를 틀지 않습니다. 어떤 여우도 자기가 잠자고 있는 굴은 하나뿐입니다. 어떤 다람쥐도 도토리 창고를 짓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제비도 자기 집을 흙이 아닌 금강석으로 짓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의 불행할 것을 미리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내일 살아있지 못하면 네 것이 아닌 남의 세상을 위한 염려의 결과가 됩
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4)
내일 염려는 내일로 미루라는 것이 아니고 내일 염려는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랍비 시므온은 "평생에 나는 한번도 사슴이 무화과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고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없이 먹고 산다. 만일 나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그들이 걱정없이 먹고 산다면 나의 창조주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나는 얼마나 더 걱정없이 먹이시겠는가 그러나 나는 염려하므로 있는 것까지 부패시켰다"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의 일화가 있습니다. 타울러가 하루는 거지를 만나서 "친구여, 오늘도 안녕하십시오." 하고 말하니 "나는 하루도 안녕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행복하기를..." 하자 거지의 대답이 "난 불행하여 본 적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타울러는 놀라서 "그것이 무슨 뜻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거지는 "날이 좋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비가 와도 감사하고 먹을 것이 넉넉하면 감사하고 배고파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나를 기쁘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불행하지 않을 때 불행하다고 말해야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또 타울러는 놀라서 "당신은 누구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왕이오" 하고 그 거지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당신 나라는 어디 있소" 하고 타울러가 물었습니다. 거지는 "내 마음속에 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있습니다.


기도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염려를 기도함으로 없이할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짐을 덜어주며 나 홀로 있지 않다는 의식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나 홀로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날 구해줄 이 주 예수시니 오직 예수"


이제 우리는 한숨을 쉬거나 걱정하거나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당신의 축복을 헤아려보라는 것입니다.
헤롤드에보트는 식품상을 하다가 파산당하고 7년간 갚아야 할 빚을 지고 켄사스로 취직하러 힘없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앞에서 두 다리가 없는 앉은뱅이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손에 쥔 나무토막을 밀면서 오다가 헤롤드에보트를 보더니 "안녕하십니까? 참 좋은 날씨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에보트씨는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두 다리가 있고, 걸을 수가 있다.' 그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이 다리가 없어도 즐겁고 행복하고 신념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두 다리가 있으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 자신감이 생겨 가슴이 뛰었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돈 없다고 부자를 부러워하지만 두 눈을 10억불에 팔겠습니까?
두 다리를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손과 귀, 자녀 중 어느 것을 팔겠습니까? 당신이 가진 것을 계산해 보십시오.
삼성 그룹을 다 준다 해도 팔지 않을텐데 우리는 고마움을 모르고 삽니다. 가진 것에 관하여는 거의 생각지 않고 우리는 늘 갖지 못한 것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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