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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시는 하나님(창 18:1-14) / 임영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2. 3.
이루시는 하나님
(창 18:1~14)


임 영 수 목사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본문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약속을 확인하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나타나셨다.”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시간 아브라함의 삶의 단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어귀에 앉아 반수면 상태에 있었습니다.


졸린 상태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고 보니 웬 사람 셋이 자기의 맞은쪽에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깜짝 놀라 장막어귀에서 달려 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손님들은 아브라함의 호의를 받아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곧 바로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라에게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 자신은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


다가 하인에게 주어 그것을 잡아 요리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만든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았습니다.


이러한 준비는 그 시대 유목민 사회관습으로는 최상의 차림이었습니다. 손님들은 아브라함이 마련한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먹는 동안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장막 안에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생리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하느냐?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그 사람들이 떠나려고 일어서서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데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얼마쯤 걸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며, 땅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의 웃음과 더불어서


하나님 앞에 약속의 대상으로 서 있는 아브라함 실존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우리의 신앙의 자리가 얼마나 세상으로부터 반감을 사고 힘겨운지를 가늠케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은 인간의 이성과 이해를 초월하여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사라가 받아들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신앙은 규범적이고 상식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적 차원을 뛰어넘어서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잉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닫혀진 미래 가운데서 순응하며 지냈습니다. 자신들의 불모의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현재적 상황의 한계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독자들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된 선포, 약속은 자신의 소망 없음을 저항하는


자가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8:14)라는 반의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이러한 질문은 절망 가운데 지내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절망과 의문을 일축하고 해소하는 물음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이러한 논박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증과 단언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묻고 계십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일으키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은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결단을 요구합니


다. 현재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그대로 머물든지, 아니면 약속을 주신 분을 신뢰하고 소망의 지평으로 올라서든지 하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우리의 결단을 요구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결단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전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은 대답을 기다리는 열려진 물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미래를 바라보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지 않고는 닫혀진 미래가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새로운 미래입니다. 그 미래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만 가능함으로 바뀝니다.






답변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니오,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로 답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모든 것에 변화가 없고 안정적으로 희망이 없는 삶을 엮어갈 뿐입니다.


그러나 “예, 당신은 하나님으로서 당신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웃음으로 답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네가 웃었지”라고


묻습니다. 그때 그들은 도망치듯이 “아니오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웃음으로 답한 것은 아직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떤 변화도 없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일의 성취가 인간의 답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홀로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두렵고 의문에 싸여 있을 때 하나님은 홀로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이후에 아브라함과 사라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 가운데에서 성취된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고백을 해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리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아브라함의 후손의 역사 가운데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1:37)고 고백하며 주어진 약속에 대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 또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희망의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신앙 안에서 가능한 것은 비단 아이의 출생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과 함께 이루어 나가는 제자들의 구성,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제자 공동체의 구성도 하나님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막10:27)라는 고백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책임을 지고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의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의(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의로운 일의 시작이 하나님에게 있듯이 또한 그 일의 끝남도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심판 또한 하나님의 의(儀)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우리 가운데 시작과 끝이 모두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시작과 끝의 결정이


인간처럼 하나님의 변덕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부족함 속에서 채워지지 않음에 대해 하나님의 자리를 의심하면서 다른 길을 찾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고 의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당신께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해가면서 희망 가운데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족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재의 부족함, 채워지지 않음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약속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자를 받아들이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섬김의 자리를 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을 바라며, 분열의 현장에서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러한 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능력이나, 힘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며, 그 약속을 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 욕망의 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 약속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랑, 평화, 정의입니다. 이러한 일을 시작하신이도 하나님이시며,


그 일을 이루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결핍,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자로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 가운데서 겨자씨와 누룩과 같은 일을 행합니다. 그들이 그러한 일을 시작하게된 동기가 그들의 야망, 욕심이 아닙니다. 그러한 희망의 씨앗을 떨어트린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씨앗이 열매 맺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상처와 분열로 매우 일그러져 있는 한 가정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가정의 형제들을 볼 때 그들의 치유, 화목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저는 그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저의 기도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가운데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저의 기도를 가능케하는 것은 그 가정의 식구들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그들을 온전케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희망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 약속을 읽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탄의 자리인 절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희망에 참여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북의 화해와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희망의 국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며 작은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기도와 행동은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현실에서는 전연 찾아볼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희망의 말씀에서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루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희망의 행동을 하게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실존 전체를 일으켜 세우고 희망 없는 현실 가운데서 열려진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무기력, 분열, 미움, 시기, 질투, 다툼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저주스러운 삶에 종지부를 찍고, 서로의 우애, 격려, 돌봄, 화평의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체념 가운데서 자신의 안정과 평안만을 추구하며 살게하지 않고, 체념과 무기력, 자기연민의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의 희망의 지평에 올라서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에게 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주기도문 내용이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생각이시며, 그의 뜻이며, 그가 이루어 가시는 새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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