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인의 길 (막 8:33-38)
임 영 수 목사
본문은 제자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본문이 있게된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어느날 제자들을 데리고 벳세다 25마일 북쪽에 있는 가이샤랴 빌립보 근방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지중해 해안에 있는 곳으로 가이샤라와 구분하기 위하여 헤롯이 자기 이름을 따서 그 지역 이름을 붙인 헤롯 빌립의 영토였습니다.
도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로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더 개인적으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12제자의 대변인으로 행동하던 베드로가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신 메시야 그리스도 이십니다." 라고 공개적으로 선언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히 경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메시야라고 베드로가 선언하고 나자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반 대중들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지상적 메시야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 대신에 오히려 그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고 유대 권력자들에 의해 배척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여 삼일 후에 다시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이해 하였지만 예수께서 예고하신 수난과 죽음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메시야"상과 조화 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항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항변을 들으시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 대한 인신공격이 아니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방법과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관점에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부지중에 사탄의 대변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무리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고나서 역설적인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 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도상에서 자의든 타의든 그리스도와 한번은 대면하게됩니다. 예수님 시대에서나, 오늘 우리 시대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간에 언제나 문제시되는 것은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서로 상반되는 이해와 기대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야적 사명과 성격과 그 의미가 숨겨져 있을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부인 없이 그를 따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생의 행복, 평안, 생의성취를 위해서 그를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이기적 관심과 지상에서의 안전을 부정하십니다.
본문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부정과 긍정이 있습니다. 부정으로는 자신을 결정적으로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부인은 자신의 인격을 부인하거나 순교자로서 죽는다거나 회의주의자들처럼 모든 것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깊은 뜻은 "오히려 자기중심성의 우상과 이기주의 적 동기에서 자신의 삶을 규정짓고 방향지으려는 모든 시도에서 벗어나는 것, 즉 자아 부정을 의미 합니다. 자아 부정이라는 말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모순이 있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심리학에서 상한 인격의 치유는 상실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아 상실'로인한 정서적 혼란으로 고통받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상실한 참 자아를 발견한 후 그 자아가 억압되거나 체면과 허세에 의해 위장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서 엄연한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숨기거나 포기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 어린시절부터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서 진정한 자기자신을 억압하고 숨기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의 눈치와 다른사람의 평가에 얽매어 그들의 비위에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는 자기부인의 삶이 있습니다.
두 번째 경제적 이해 득실에서 일시적으로 이득과 처세를 위해 자기자신과 주장을 숨기고 상대방의 뜻을 따르는 경우입니다.
세 번째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당당히 자기 주장을 표현하며 살아가다 인생의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주장과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부인은 세 번째 경우에 속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의 계획, 자신의 생의 성취를 위한 분명한 신념, 생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실 때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신의 신념, 인생관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 긍정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원래 유대인들의 상징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로마시대 형틀로써 그 상징을 통해 연상되는 장면은 강압에 의해 십자가를 지고 도시를 지나 자기 처형장소까지 감으로써 로마에 자신이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죄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이 전에는 반항했던 권위에 굴복하고 복종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에 예수께서 복종하신 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마땅히 응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숨겨져 있고 부활의 영광에서 밝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과 성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군합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너무 교리화 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문제가 언제나 왜곡되어 나타납니다. 교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고 평안을 누리다가 나중에 죽으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이 현실의 생의 여정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가야할 사항임을 우리는 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인생의 여정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과제입니다. 그 여정에서 끝임없이 자기 부인을 해가면서 그를 따라야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여정에서 전연 다른 방식으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 연방정부의 고위 관료이자 주서독 대사였던 아더번즈는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이였다고 합니다. 그는 중간정도의 키와 은빛 곱슬머리 그리고 파이프로 상징되는 그는 아이젠하워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이르는 수많은 대통령의 경제 자문관으로 활약했습니다. 그의 의견은 무게있게 다루어졌고 워싱턴 정가는 거기에 귀를 기우리군 했습니다.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아더 번즈는 유대인이었는데 1970년대에 백악관의 비공식적인 기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사실상 그 모임에서 아무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으며 매주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마무리 기도를 했는데 번즈는 거기에서 줄곧 면제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존경과 조심스러움 때문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번즈의 특별한 지위를 모르는 새로운 참석자가 모임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모임이 끝날 때가 되자 그는 아더 번즈에게 마무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모임에 이전부터 참석해 왔던 몇몇 사람은 놀란표정으로 서로 쳐다보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번즈는 곧 손을 내밀어 둥글게 둘러선 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그후 아더 번즈의 기도는 워싱턴에서 전설적인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선하고 단도직입적인 기도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기독교'를 향해 중요한 일침-정기적으로 반복할 필요가 있는-을 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도달한 자가 아니라 이생에 있는 동안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 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란 사실입니다.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기독교라는 세용어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첫 번째 용어가 두 번째로 그리고 세 번째로 진전되는 과정에서 두 방향 중 한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인격적인 것으로부터 비인격적인 방향으로 흐르거나 혹은 참신하고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제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종종 타락한-방향으로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 매력을 느끼더라도 '기독교'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거나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매우 많다."고 했습니다.
오스 기니스의 견해에 따르면 "물론 그 이유는 타락한 세상의 현실에 있습니다. 죄의 현존과 시간의 흐름이라는 두가지 요인 때문에 어떤 인격적인 관계나 영적인 체험도 자율적인 영속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각각은 계속해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유지하고 부채질 해주어야 불꽃을 본존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사라지고 맙니다. 영적인 부흥도 오래 지속 될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적용되는 자연적인 영적 소생의 능력의 경로는 몰락과 죽음을 향해 가거나 위축되고 추한 모습,즉 '형식주의적'이 됩니다. 반복을 하다보면 비범한 것도 평범하게 혁명적인 것도 일상적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자유롭고 신선한 반면에 '기독교'는 종종 형식적이고 죽은, 혹은 더 나쁜 것이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노병과는 달리 신앙의 낡은 표현 방식과 종교기관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다는데 있습니다. 그것들은 본래의 목적을 망치고 왜곡시키며 심지어 그 목적과 모순되는 산물로 땅을 가득 메우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지난 2000년에 걸쳐 온, 기독교 역사에는 너무나 많은 비 신앙적인 것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티셔츠에 이런 구절이 쓰인적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추종자들로부터 나를 구하소서.' "
오스 기니스는 말하기를 "다행스럽게도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에 따라 살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이들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그러나 슬픈 사실은 전반적인 교회사는 종종 교회가 그리스도의 모범에서 이탈하고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선전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정죄하는 악한 모습을 공공연하게 보여 온 이야기가 더 많다."고 했습니다.
"에라무스는 그의 동시대인에게 당시의 더욱 타락한 세대에 대해 이렇게 상기시켰습니다. '터키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면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는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킨 것이 너무나 놀라워서 나는 그 어떤 사람도 단념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 해볼만한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일입니다. 그 길이 바로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이것은 이 세속 사회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이며, 이 현실에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해 가는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 금년 한 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을 따르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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