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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에로의 도정(벧후 1:3-7) / 임영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2. 3.
완전에로의 도정 (벧후1:3-7)
임 영 수 목사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좋은 사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에나 그 사회에 다 좋은 사람만이 있지는 않습니다. 나쁜 사람, 즉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실패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실패한 원인이 가정, 친구, 사회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정, 친구로 인해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가정교육, 학교 교육을 중요시 합니다. 가정, 학교에서 좋은 사람 되는 교육으로 윤리, 도덕과 같은 교육을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이 행동 규범은 어느 정도 형성시키지만 생각과 마음까지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방법은 우리 인간의 방법과는 다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좋은 사람이 되는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목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 가도록 돕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본문에 근거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어도 육신의 정욕, 유혹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고 패배, 좌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능력은 그러한 패배와 좌절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그것이 길가에나, 돌작밭에 떨어지면 싹이 나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지면 싹이 나고 자라는데 필요한 수분, 영양을 공급 받기 때문에 잘 자랍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데 필요한 생명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귀하고 참된 약속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시는 좋은 사람에 대한 계획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시는 희망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 와 아멘(고후1:20)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유혹과 타락으로부터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의 유혹과 타락으로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그러한 데서부터 지켜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가는 그 길 자체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가는 참된 삶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일이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는 약속을 받았고, 이미 거기에 참여 했고, 그렇게 되어 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 새로운 삶을 정성스럽게 실현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벧후1:19)과 같이 빛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삶에 참여해 가는 사람들은 세상을 밝게 하고, 패배,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은 모두 여덟 개의 단계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마치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등산을 해본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한 때 등산을 즐겨본 적이 있습니다. 등산을 할 때에는 반드시 어느 산 어떤 정상을 오르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떠나게 됩니다. 그 산에 도달해서 산을 오를 때 중요한 원칙은 출발지점을 바르게 선정하는 일입니다. 잘못된 출발지점은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가는 과정도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 제시된 여덟 단계에서 정상에 해당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는 첫 지점이 믿음입니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여덟 개의 단계 전체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을 사도 베드로가 제시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정상의 봉우리로 인도하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정상에로의 출발점은 믿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으로 시작의 출발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결심, 신념, 지혜, 지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새로운 삶은 그 근본 출발점이 우리 자신이 아니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새 삶을 약속으로 주셨고, 그것에 참여케 해 주셨고, 그렇게 되어 갈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중요합니다. 새 삶의 집을 지을 때 그 기초가 우리의 자아가 아닌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새 삶에 실패하는 원인이 그 시작이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 세상적인 것들에 그 기초를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한 의존은 유혹, 시험, 시련의 풍랑과 홍수가 밀려 올 때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으로 시작된 새로운 삶의 다음 단계는 덕입니다. 덕을 옥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토양이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 거기서 충분한 수분을 흡수해서 씨앗 속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시작된 새로운 삶은 하나님께서 의도 하신 그 새로운 삶을 실현해 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게 됩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믿음 안에서 솟아 나오는 하나님의 샘,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편 23편을 지은 시인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3)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힘을 공급 받아야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정상까지 오를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이 지식입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 지식은 사물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안목입니다. 잘못된 지식, 편견, 아집은 정상과는 전연 다른 곳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올바른 지식은 정상에로 가깝게 인도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지식은 정상에서 점점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에게 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실재에 다가가는 안목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왜곡 되게 보고,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재에 바르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실재에 바르게 다가가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다음이 절제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정상에로 오르는 길에는 절제가 절대 필요합니다. 절제는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선택이 유행, 광고,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절제는 지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올바른 지식이 있는 사람이래야 올바른 선택이 가능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시대의 유행이나,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절제는 어렵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다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절제는 모든 것을 다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선택할 줄도 알고 포기 할 줄도 압니다. 그것을 절제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식에 절제를 더 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은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정상에 오르는 사람에게는 절제 다음에 인내가 절대 요구됩니다. 거룩한 정상을 향해 오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기 때문에 지구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부득이 해서 할 수 없이 주저앉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자발적으로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내에는 외로움도 있고, 고독도 있고, 어떤 때에는 나 자신만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과 같은 초조감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양의 옛 성현의 글 가운데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도道를 찾아가는 젊은이의 촌스런 고집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화려한 나비가 되기 전 험상스러운 애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듯 자기의 근거를 파들어가는 구도자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얼핏 보면 그들의 차이는 얼마 안되는 것 같으나 나비가 될 때에는 그들의 차이는 한없이 클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도를 찾아가는 젊은 이의 모습에서 진정한 인내의 표상을 보게 됩니다. 촌스런 젊은 이에게는 나비가 되는 그 순간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믿고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그의 삶은 촌스럽고, 유행에 뒤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해서 가는 길은 진정 자신의 길이며, 나비와 점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인내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대하시고 신뢰하시는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과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 자꾸 가까이 가게 됩니다. 이것을 경건이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인내 가운데서 경건의 삶을 표현해 가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인내에는 경건의 삶이 수반됩니다.






이러한 참된 경건에서 형제자매의 사랑이 나옵니다. 그래서 경건 다음에 형제 사랑을 말합니다. 여덟 개의 덕목에서 형제 사랑이 일곱 번째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정상이 사랑입니다. 등산에서 마지막 정상에 올라서 밑을 내려다보면 세상을 보다 넓게 보게 됩니다. 하나님 성품의 정상인 사랑의 봉우리에서 피조 세계를 보면 그 전보다 넓게 보게 됩니다. 그 전에는 나 자신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좀더 넓게 보면 내 형제 정도는 볼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사랑의 정상에 오르면 나 자신이나, 형제를 넘어서 북한에서 굶주리고 있는 나의 동포가 보이고, 여기저기서 질병과 굶주림,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웃이 보입니다. 그리고 황폐해져가는 세상이 보입니다.






사랑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변을 맴돌지 않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에 자유롭게 됩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사회적 책임의식과 자기 이웃의 어려움에 대한 직감을 발달시켜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과 피조물 전체에 영적인 사랑을 주게 됩니다. 정상에서 다시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사람에게로 다가갑니다.






“사랑은 믿음의 열매이며, 새로운 삶의 질을 의미 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흘러나와 자신을 새로운 향기로 채우고 그가 만나는 모든 것으로 퍼져 나갑니다.”






사랑은 여덟 개의 등산의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 여덟은 항상 완전과 완벽함, 즉 영원함을 뜻합니다. 이 여덟에는 무한, 영원, 신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삶은 자유하고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가득 채워지고 거룩하게 된 삶을 묘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가정에서 부모는 하나님의 성품에 모범을 보이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며, 자녀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가도록 돕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가정은 하나님 성품의 열매를 맺게하는 밭입니다.






하나님의 정원인 이 세상에는 이 정원을 돌보고 가꾸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 가는 좋은 정원사(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일꾼들이 많을 때 사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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