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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빌 3: 12~16) / 임영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빌 3: 12~16)

 

 

인간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 사람이 자신의 생을 잘못 선택하므로 인해 결국에 가서는 그 사람 자신도 파멸하고 그 사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사례는 특별히 종교, 정치 영역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초기 기독교도를 궤멸시키기 위해 선두에 나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중단시키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가장 악명높은 박해자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사울은 "나의 나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유대인으로 주후 5-10사이에 소아시아 길리기아도의 수도 다소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여,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철저한 유대교 신앙의 훈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청년 때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시의 석학 가말리에 아래서 율법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는 열렬한 유대교도로서 바리새파에 속하고, 율법에 기초한 엄격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도들이 율법을 경히 여기고 성전을 무시하는 일에 분개하여, 그리스도교도 박해에 가담하여,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처형에 입회했습니다. 다시 그는 그리스도교도 박해를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는 유대 청년 사울의 마음에는 유대교에 대한 충성심과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적대감이 그의 피를 끓게 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그리스도교도들을 마음대로 체포하고 처형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아 정신없이 다메섹을 향해 질주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길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막은 극적인 장면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의 장면을 요약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는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있었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메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일어나서 '곧은 길'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으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많이 끼쳤는지를, 많은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주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유대교와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적 신앙에 대해 충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사울이 자신의 적대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왜곡된 길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길을 중도에서 가로 막았습니다.

 

사울의 길을 막은 것은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길을 막은 분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리스도교도들이 믿는 신앙내용은 모두 조작된 거짓된 이야기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사울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사건에서 사울은 그가 박해하려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그가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의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 행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꾸지 않으면 않되었습니다. 바울이 이해한 하나님은 매우 경직된 하나님, 유대인만의 하나님,인간과는 매우 먼거리에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된 하나님은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깨달은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메섹 길을 가로막은 예수가 사울 자신에 대한 꿈, 비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울의 생의 주인이 사울 자신이 아니고 그의 다메섹길을 중단시킨 부활하신 주님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사울의 생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분이 사울 자신이 아니고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안에 있는 것이 그의 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다메섹 사건을 계기로 사울에게는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생의 모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험은 사울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을 어느 시점에서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인 바울은 본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그가 이세상에 있는 동안 그 어느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러한 생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바울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성취했다 자인할 수 있는 순간은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 어디에 도달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에서 시작된 새로운 생의 모험을 해가는데 오직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는 13-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성숙된 사람의 태도라고 말합니다. 혹시 그렇지 않고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바울은 어찌했든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갈 것을 빌리보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

 

 

 

우리는 본문에서 신앙생활에 관한 매우 소중한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먼저 본문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은 하나의 모험이요, 경주입니다. 그런데 그 경주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 모험의 경주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 가운데 우리의 미래, 꿈, 목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독교에 입문해서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기독교 신앙 밖에서 살아온 생의 모험의 길이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체면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중단되고 새로운 의미의 생의 모험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도저히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매우 세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심지어 실패나 실수를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그 다음은 주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되는 이 모험의 경주에는 어느 순간에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안에 있는 목적에로 부르심만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 가운데 있는 생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그 부르심에로 향해 달려가는 길에는 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장애물들을 통해 깨우치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저의 경험에서도 확인해가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목사로서 살아오면서 이정도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순간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세상적인 경쟁에서 비교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순간은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계속 삶이 재구성되는 순간은 여러번 있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평가에서 큰 교회 짓고, 사람 많이 모이고, 헌금 많이 걷히고, 목사가 학위 받고, 총회장 정도 되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시인하는 믿음의 공동체라면 한 순간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순간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신을 속이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 자람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음은 이 모험의 경주에 반드시 적용되고 지켜져야할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일입니다. "

 

 

 

뒤에 있는 것들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업적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달려오면서 이룬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 그의 사랑, 그의 은혜를 일깨워 주는 징표는 될 수 있어도 그것에 안주할 수 있는 업적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업적에 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시는, 그의 부르심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개인이나, 공동체는 생명력을 잃게됩니다.

 

 

 

업적에 안주할 때 인간적인 교만과 자랑이 많아지게 되고 그리스도 대신 인간을 앞세우게 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리에 있게 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경주가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의 부패는 교회밖 요인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교회내의 요인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생활에서 성숙은 자신이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거기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와 태도가 성숙입니다. 그러한 성숙된 사고와 태도는 언제나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이루어가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적인 목표와 업적의 자랑과 안주는 교회를 타락시키고 부패케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금년으로 13주년을 맞게 됩니다. 13년동안 우리는 열심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붙잡힌바 된 그것을 붙잡으려고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업적을 돌아볼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진 부르심의 상을 바라봅시다. 그 상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초대받고 있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영광된 미래를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다시 모험의 경주를 시작하여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다시 본문을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곳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찌했든지, 우리가 어느단계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로 나아갑시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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