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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에 그 별을 바라봅시다(마 2:10)/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

깊은 밤에 그 별을 바라봅시다.

마 2:10

 

고독했던 여류시인 노천명씨는 '별을 바라보며 삽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별은 높은 곳에서 빛납니다. 별은 우리가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별을 바라보듯 마음속에 우러러 보는 이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별처럼 높이 바라보는 탁월한 인물을 우리는 스타(Star)라고 합니다. 현대의 대중 사회에서는 스타의 개념과 차원이 타락하고 저속해지고 말았습니다.

 

별은 영원의 상징입니다. 별은 이상의 심벌입니다. 별은 언제나 어두운 밤에 빛납니다. 별이 없는 방은 캄캄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상의 별이 사라질 때 우리는 어두운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팔레스틴의 밤은 깊었습니다. 작은 촌 베들레헴도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도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치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깊은 밤에 주의 영광이 두루 비치었습니다.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리라" 지금도 이 세상은 어두움이 땅을 덮었습니다. 캄캄한 세상입니다. 무지의 흑암이 아직도 이 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여 우주선을 발사하고 우주를 왕래하고 있지마는 아직도 인생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생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하러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헤매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두움이 만민을 가리웠습니다. 사람들은 어두워서 갈 길을 모릅니다.

 

예수님 나실 때 동방박사들은 이상한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올 때는 자기들의 생각대로 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새로 나시게 되면 으례히 유대 땅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나실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사실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았기 때문에 헤롯왕의 마음이 격동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어린애가 무참하게 학살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안내 배후에는 헤롯의 흉계가 따랐습니다. 무서운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 뵙게 된 것은 별의 인도 때문이었습니다. 그 별의 인도를 받을 때 아무런 위험도 없었고 결국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중에 '그 별'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 별은 우리를 인도하는 별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길이요' 한말은 '오직 나만이 그 길이다'는 강한 뜻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길 중에 한 길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길이십니다.

 

사람들은 연습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는 연습도 없고, 실패도 없고, 한 번 하심으로 완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태양광선을 가리우며 길을 인도하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밤 찬 기운을 덮어 주고 어두운 밤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르는 한 잘못된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이 땅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길을 잘못 들어 허덕이는 사람은 얼마입니까? 자기 생각대로 가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친걸음이니 다음을 생각지도 않고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신없이 터지는 금융사고와 예측할 수 없는 정부정책 때문에 도대체 나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회전반에 팽배한 불확실성으로 심리적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소위 철학원이라는 점 집을 찾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합니다. 이제는 인터넷 역술 사이트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300여 곳에 이르는 사이트가 300여 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역술 사이트인 사주닷컴(sazoo.com)에 하루에 방문자 수가 무려 3만 명까지 된다고 합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점 집을 운영하는 점쟁이는 "빚진 사람과 빚준 사람 사이에 어디로 가야 상대를 찾겠나? 어디로 가면 빚쟁이를 피할 수 있겠나?"를 물어오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렇게 어둡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하셨습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고 그 과정에서 겪을 상처와 갈등은 우리 사회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멍들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식으로 미래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큰 것 하나 먹어야겠다는 한탕주의가 범람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의 도덕적 해이가 그 사회의 생존 방식처럼 되면 그 사회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인 혼미를 일깨우고, 그 도덕적 파산이 가져올 위기를 경고해야 합니다.

 

복잡한 네거리에 신호등이 고장이 나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 혼란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의 도덕적인 해이, 혼란이 어디서 왔습니까? 깊은 밤에 신호등의 빛이 꺼져서 그럽니다. 주님 말씀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구실을 다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빛이 꺼져 있으면서도 꺼진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친구의 집에 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 가려하니 앞을 보는 친구가 등불을 하나 켜 주면서 이것을 들고 가라고 했습니다. 맹인은 오해를 하고 섭섭해했습니다. "너는 내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잘 알면서 내가 이 등불이 무슨 소용 있나?" 그때 그 친구의 말이 "너는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네 손의 등불을 보면 패해 갈 수 있지 않니?" 그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어 고마운 마음으로 등불을 들고 가는데 어떤 행인이 이 맹인을 부딪쳤습니다. 이 맹인은 화를 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내 친구가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서 내 손에 등을 들려 주었는데 당신은 나를 뭐로 알고 이렇게 일부러 부딪치는거요?" 행인이 하는 말 "당신 손에 등이 어디 켜 있어요?" 이 맹인은 자기 손에 든 등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심령 상태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등대 노릇을 하고 신호등 노릇을 바로 하면 이런 혼란, 이런 해이, 이런 부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내 책임입니다. 내가 목사 노릇 제대로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인이 교인 구실을 제대로 못해서 이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을 회개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하셨습니다. 진리의 빛, 사랑의 빛, 성결의 빛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밤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은 또한 슬픔의 세상입니다. 눈물과 탄식과 슬픔의 깊은 밤입니다. 무지는 슬픔을 가져오고, 죄악은 애통을 가져옵니다.

 

저는 오늘까지 살아오는 동안 일제의 압박으로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광복 후에는 38선의 슬픔, 6.25 한국 동란의 슬픔, 가족 분산의 슬픔, 민족 상잔의 슬픔, 쿠데타의 슬픔, 부정 선거의 슬픔, 군사 독재의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만일 제가 주님을 몰랐다면 어떻게 오늘까지 살아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마태복음 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그런데 이 글이 누구의 글입니까? 이 글은 예수님이 나시기 전 58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였었는데 오랫동안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를 당했다가 함락이 되어버리고 승리한 바벨론 군대의 횡포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 비참한 광경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참하게 전사당한 아들의 부모, 오랫동안 바벨로 군대에게 포위 당해서 결국 먹을 것을 공급받지 못해 굶어 죽은 자식들의 부모,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남긴하였으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는 부모들, 저희들의 통곡하며 애끓는 울음소리는 하늘을 진동케 했고 그 광경은 한 마디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먼 이방 나라로 끌려가는 슬픔, 포로들이 저 베들레헴 근방에 있는 라헬의 무덤 앞을 지나던 광경을 그려 놓은 글입니다. 이와 같은 슬픔의 주인공들, 눈물로 엮어진 역사의 주인공들을 낳은 어머니들의 슬픔을 한마디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정말 어려운 자리에 이르고 슬픔 가운데 빠지게 되면 위로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갑자기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 아내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있으며, 구 위로의 말이 남편을 잃고 앞이 캄캄해 하는 여인의 귀에 들리겠습니까? 뜻밖의 교통사고로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런 참변을 당한 사람의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동안 쌓아 올렸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일을 당할 때 무슨 말을 가지고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로의 말을 한들 그 말이 귀에 들리겠습니까? 고통과 슬픔이 너무 심하면 위로 받기를 거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기사를 쓴 대목에 이런 말씀이 있을까요?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모든 것이 넉넉한 사람들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슬픔과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모든 슬픔을 무색케하는 비통한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직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차 있는 역사 안에 사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슬픔의 주인공으로 오신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과 가난 그리고 슬픔 속에 죽으려 태어났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슬픈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안한 자리에서 슬픔을 바라보며 위로한 것이 아니고 슬픈 이들이 당하는 고난 속에 자기 자신이 뛰어 들어와서 함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 샘터를 하나씩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우리의 슬픔이 하나님께서 당하신 슬픔 안에서 무색해지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힘이 임해 오는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아니,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찾는 길은 오직 슬픔을 안은 채 슬픔 속에 빠지지 말고 저 말구유에 나신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마태복음 2장 10절을 보세요.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고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기 위하여 주가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깊은 밤, 슬픔의 밤에 그 별을 바라보므로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과 슬픔의 세계는 또한 절망의 깊은 밤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20세기의 상징은 '버섯구름'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핵무기가 폭발하면 공중에 그 불과 연기가 버섯모양으로 퍼졌다가 땅위에 쏟아져 내려 무차별하게 파괴시켜 버리고 맙니다. 핵무기는 과학문명의 자랑도 되지만 또한 현대 문명의 절망의 상징도 됩니다. 이 버섯같은 검은 구름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가기만 합니다.

 

전세계 인류의 간절한 바람은 무엇입니까? 세계 평화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나 평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비극입니다. 지금도 성지 근방의 포성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아직도 도처에 어두움의 세력이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문자 그대로 절망의 깊은 밤입니다. 이 절망의 깊은 밤에 그 별이 빛납니다. 그 별은 소망의 별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왈츠라고 하는 사람이 그린 '소망'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둥근 지구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혼자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눈은 수건으로 싸매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 가슴에는 하프를 안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 하프의 줄이 거의 다 끊어져 있습니다. 오직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다 끊어지고 남은 한 줄의 하프를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합니다. 그 여인의 뒤에는 별 하나가 유난히도 빛나고 있습니다. 이 별은 소망의 별입니다. 이 줄은 소망의 줄입니다. 이 그림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집니다. 사업이 실패합니다. 직장에서 퇴출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납니다. 여러 가지 믿던 줄이 하나 둘 끊어집니다. 그러나 소망의 줄 하나만 붙잡을 수 있다면 그 소망의 줄 하나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면서 능히 모든 절망적인 상황을 이기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소망을 가리켜 영혼의 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 큰 바다를 항해 할 때 어떤 때는 큰 폭풍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닻을 큰 바위에 내리게되면 아무리 풍파가 높아도 우리 심령의 배는 떠내려가거나 깨어지지 않습니다. 큰 바위에 내린 닻은 소망의 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소망이 끊어져 낙심과 절망의 파도에 휩쓸려서 인생의 배가 파선 당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많은 사람이 소망의 기초를 잘못 두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의 기초가 물질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돈은 그의 전부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돈이 없어지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살까지 합니다. 권력도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시편 기자는 "나의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물론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도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역사 평론가들은 20세기를 환멸과 절망의 세기였다고 평했습니다. 20세기에 과학 문명은 많은 발전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세상이 되었습니까? 과학이 발전하면 평안히 살 것이라고 소망했던 이 세상이 20세기에 와서 정말 추악하고 무서운 짐승만도 못한 세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맹목적으로 소망하던 사람들이 환멸과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지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가의 정책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환멸의 비애뿐입니다.

 

여러분, 오늘 전세계 인류들은 불안과 환멸, 그리고 실망의 깊은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을 둘러보고 아무리 땅을 내려 다 보아야 인류의 소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류의 참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라도 우리는 땅만 보지 말고, 사람의 하는 일만 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그 별, 소망의 새벽 별을 바라보십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소망으로 삼으면 어떤 실패, 어떤 타락, 어떤 환란, 어떤 슬픔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깊은 밤에 소망의 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므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새 은총을 입어 소망 중에 사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 어두움과 슬픔과 절망의 세계는 또한 사망의 깊은 밤입니다.

 

이 세상은 불의의 사고가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만도 4만 5천명이라고 합니다. 매년 세상을 떠나는 분이 100만 명이라니까 매일 2,740명이 세상을 떠납니다. 뇌일혈이나 심장마비같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심각한 일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수가 있습니까? 하루하루를 나의 마지막 날 인줄 알고 사는 생활밖에 지혜로운 생활이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마는 이 설교가 제게 마지막 설교가 될 런 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어떤 개인에게 있어서는 이 예배가 마지막 예배가 될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죽음의 깊은 밤이 언제 찾아올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날이 내 일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한다면 하지 않을 일도 있을 것이고, 가지 않아야 할 곳은 가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죽음의 깊은 밤, 일 할 수 없는 깊은 밤이 오기 전에 할 일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이 오기 전에, 내가 조금 있으면 주님을 만나게 될 터인데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아직까지 회개하지 못한 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 생각하고 제일 먼저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자기의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임종하시면서 미쳐 회개하지 못했던 죄를 다 회개하시고 천국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정말 축복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런 기회가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회개할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산다고 하면 내 삶에서 회개해야 할 것은 온전히 회개해야 합니다.

 

혹시 분한 일이 있어도 성경 말씀과 같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형제간에 어떤 일로 인해서 마음으로 담을 쌓고 있으면 다 헐어버리고 화목해야합니다. 그리고 내 책임이 무엇이든지 그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여러 가지 책임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그 책임 성실하게 감당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 할 수 없는 깊은 밤이 오기 전에 더 힘써 일 할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이 올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을 써서 하던지 말로 하던지 남길 말, 유언이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 유언이나 유서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도 유언을 써서 봉해 놓고 세상을 떠난 후에 보라고 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구에게 무엇을 부탁하셨습니까? 다른 말 부탁할 것이 많이 있겠지마는 예수 잘 믿으라고 할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 죽음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분명치 않은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니다. 그런데 '주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이 깊은 밤에 이 기쁜 소식이 들리십니까? 빛 되신 주, 기쁨의 주, 소망의 주, 생명의 주를 만나기 원하십니까?

 

깊은 밤에 그 별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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