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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시편 14편)

by 【고동엽】 2021. 11. 29.

포로 된 자를 돌이키시는 하나님, 포로 된 자는 어리석은 자가 다스리는 나라에 속해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나라 이것이 바로 포로 된 자의 땅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수련회를 통해서 무신론의 영토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포로 된 자의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심할 수 없는 영토로 신앙의 영토로 우리가 그들을 회복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어리석은 자가 이 세상에 중심 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사무엘상에 나오는 나발을 가리킵니다. 나발은 누굽니까? 사설경비업체였던 다윗의 군대에게 경비를 받고 용역의 혜택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이 먹을 것을 좀 달라 체불된 임금을 달라고 했을 때 나발이 말하기를, 나발 뜻은 어리석다 부패하여 악취가 난다 나쁜 냄새가 날 만큼 어리석다 이런 뜻입니다. 그 나발이 이르기를 요즘 주인을 속이고 도망쳐 다니는 나쁜 하인들이 많다더니 너희들이 바로 그런 꼴이구나 그러면서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쳐서 죽습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믿고 마음대로 행하는구나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믿고 도무지 그 행동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 이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은 19세기 20세기 와서 가장 큰 사상의 줄기입니다. 19세기 20세기 사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무신론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을 수 없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했던 것은 전부다 유대인들의 사상에 덧입어서 다윈, 프로이드, 마르크스 세 사람, 보통 우리가 19세기 20세기 무신론 시대를 연 세 사람은 다윈과 마르크스, 프로이드 이 세 사람이 전부다 유대인인데 이 세 사람이 하나님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가 이 모양일 수 없다, 이 모양 이대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무신론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까지 부패할 수 없다 그게 무신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뭐라고 했냐면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은 세상을 부패하게 한다 어느 것이 더 앞입니까? 세상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이 부패해지고 행위가 가증스러워지고 도덕적 무정부 상태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의 결과 그렇게 세상이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세상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결국은 뭡니까? 지금 19세기 20세기 무신론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현혹시키는 무신론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도록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방치하고 계신다.


로마서 1장 24절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여러분 그 세 절 안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내어 버려두심. 하나님이 우리를 내어 버려두시면 윤리적 도덕적 무정부주의 상태에 빠집니다. 주인이 없다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치하시는 목적은 무신론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십니다. 그런데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그 자체가 벌써 심판의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신론을 믿고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심판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결론을 내리는 결과 그는 심판의 저주 아래 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믿지 않고 하나님이 계심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사람은 너무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수 믿은 사람이 늦게 믿은 사람보다 사실상 훨씬 복된 겁니다. 그게 참 희한합니다. 오래전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뜨거움은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항상 콸콸 흐르는 강과 같은 강물은 아니지만 매번 흐르는 시냇물 같은 신앙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대개 보면 엄청 착합니다. 오래 믿은 집 자녀가 대개 참 착합니다. 신앙이 오래된 집안일수록 그 자녀들이 성품이 착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너무 성자급으로 생긴 사람들 보면 4대째 예수 믿은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백화점도 포인트 제도를 하는데 백화점도 많이 사면 포인트 해서 상금을 주는데 신앙은 포인트 제도가 없겠습니까? 오래 예수 믿고 신앙의 선을 많이 쌓는 가정은 그 자녀가 복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이미 하나님이 쳐 놓은 올무와 덫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20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 하는 이 무신론 사상을 저항하려면 하나님이 없다고 했을 때 오는 도덕적 무정부주의 상태 이것을 견딜 수 없어 답답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신론에 저항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무신론에 저항할 수 있습니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세 형제입니다. 큰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그리고 한 사람은 사생아입니다. 까라마조프라는 사람이 보통 사람의 아들들하고 똑같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 까라마조프입니다. 까라마조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무신론이 만일에 우리 지배적인 사상이 된다면 인간은 어떤 악행이든 저지를 수 있다 이 명제 하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쓴 소설입니다. 무신론이 우리 인간의 지배적 사상이라면 인간의 마지막 종국은 도덕적 윤리적 무정부주의 상태다 이것이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둘째 아들 이반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아들은 죄 짓고 회개하는 유다와 같은 스타일이고 둘째 아들은 극단적인 무신론적인 지식인입니다. 그래서 소설 속에는 이반이라고 하는 이 사람이 하는 말이 거의 도스토예프스키가 비판하려고 하는 그 시대 지식인들의 사상입니다. 그 사람이 만일에 하나님이 없다하면 모든 악행은 허용될 수 있다 모든 가증스러운 살인행위도 허용될 수 있다 이 이반이라는 사람이 소설 내내 전개하는 주제입니다. 그랬을 때 그 셋째 아들과 조시마 장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힘이 약한 유신론자입니다. 이반의 논리에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조시마 장로 셋째 아들은 이반이라고 하는 둘째 아들의 논리에 힘이 많이 부치기는 하지만 입으로는 이기지 못하지만 삶으로 광채를 발하는 사람이 조시마와 셋째 아들입니다. 입으로는 무신론자가 이깁니다. 그러나 삶의 광채로 무신론자들의 마음을 녹이는 사람이 누구냐면 하나님을 믿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무신론자들과 말로 이길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 모든 악행이 가능하다는 것이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방치해놓은 버려두신 상태입니다. 버려두시면 어떻게 됩니까? 행위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버려둔 상태입니다. 이 신적인 방치, 버려둔 상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뽑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방치해 버려야 마땅합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선택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유발할만한 어떠한 공로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 무신론적인 세례를 받고 태어난 사람들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고 또 3절입니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2절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이게 바로 무신론의 위험함입니다. 무신론적 가정의 위험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의 가정 중에서 의롭고 착한 사람이 나올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인류에게 공헌할 만한 모든 위대한 사상 중에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과 관련되지 않은,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도무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이 사상은 파괴적이고 잔혹하며 그것은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다 라고 믿어버리는 그 사람의 삶의 주변은 가증함의 냄새 부패한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섞여 있기 때문에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 합니다. 왜? 수가 적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요소요소에 있고 그래서 악인은 의인의 덕을 보며 살고 있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본즉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을 찾습니까? 도덕적 무정부주의 상태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저항하는 상태의 사람이 찾습니다.


여러분 최근에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매트릭스2가 나왔습니다. 매트릭스라는 것은 이 거대한 세계를 통제하는 큰 컴퓨터 지능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컴퓨터입니다. 컴퓨터 왕입니다. 매트릭스는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고 명령하는 컴퓨터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적인 존재로 군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매트릭스가 지정하는 그런 이미 프로그램으로 내장된 그 매트릭스라는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인간을 저항군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저항군입니까?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 하지 않고 자유에 대해서 예민한 자각을 가지고 감정에 대해서 예민한 자각을 가진 사람이 저항군으로 나옵니다. 지금 오늘날 매트릭스 사회입니다. 오늘날은 돈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탐닉하는 인공지능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돈과 쾌락을 보면 정신없이 뛰어들도록 명령하는 거대한 컴퓨터의 코드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면 안 될텐데 하고 돈과 쾌락과 정욕과 소비 이런 것이 다 아닌 줄 알고 저항하면 매트릭스 컴퓨터에 저항하는 저항군이 됩니다. 그런데 저항군이 바로 메시아적 기대를 가집니다. 동굴같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거대한 매트릭스가 다스리는 곳에서 동굴에서 살면서 그 동굴 이름이 시온입니다. 매트릭스는 한 마디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을 짬뽕해서 만든 영화인데 메시지가 있습니다. 무신론적 사회가 가지는 이 가증스러운 요소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이 피해를 깊이 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찾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두루 살피사 의인에게 자기가 복을 주시는 의인 자기를 향해 전심으로 찾는 사람을 찾고 찾으사 자기를 찾는 그 사람을 그 시대의 샘플로 복 주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무나 이 세상이 죄악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가 무신론의 시대에 저항군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사람들이 하나님 편이 없습니다. 다 치우쳤으되 함께 더러워지는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예민하게 느끼는 지각이 있는 자들을 찾아보시고 계십니다. 왜냐면 그를 찾아서 그를 무신론 사회가 지배하는 매트릭스 같은 사회에 저항군 만드시기 위해서 반역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참 여기서 고독이 느껴지죠? 하나도 없다는 말이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 찾는 자가 없도다 하나도 없구나 이 말은 우리가 신앙하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잘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는 지점은 이런 세상 한복판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여러 종교 중에 하나를 선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교를 선택할 수 있고 기독교를 선택할 수 있는데 여러분이 아버지가 기독교를 선택했으니까 나는 우연히 기독교 선택했다 이게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했습니다. 이 무신론 시대에 저항군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한가지로 더러워지고 치우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는 이때에 하나님을 찾아서 목이 마른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 목 마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윤리적 무정부 상태를 견딜 수 없습니다, 이렇게 너무 많이 기도하면 기독교 우익 세력이 됩니다. 이렇게 너무 많이 하면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 이 모든 버러지 같은 녀석들을 다 쓸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를 잘못하면 악령을 받아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죄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쏴 죽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 텍사스에 많이 있다고 합니다. 죄인들을 하나님 대신 벌주는 그런 총 가진 민중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 무신론 시대에 저항군이 되어서 목마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지각을 갖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이 무신론 포로의 땅에서 내 백성 좀 구원해주십시오, 오늘날 여러분이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 모두 단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일에 모일 때 믿는 사람이 단결해서 믿지 않는 사람이 올 때 우리 속에 보이지 않는 일치감이 있어서 이 믿지 않는 사람을 포로된 땅에서 돌이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써야 합니다. 목적 있게 애를 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점에서 여러분이 좀 목사의 마음이 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되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 믿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나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강제로 붙들려 다녔지만 사실상 우리 자녀들 우리 대학생 청소년들 거의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에 노출되어서 익숙하기는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 특히 우리 교회 자녀들 거의 성경을 모릅니다. 거의 모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ABC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사실상 우리 자녀들은 무신론자입니다. 제가 바쁜 일정에서도 청년 대학생들을 만나는 이유는 우리 청년 대학생들 카페를 들어가 보면 글 수준을 보세요. 이건 중학생 수준의 글들입니다. 맞춤법도 엉터리지만 글 수준이 똥개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너무 질이 낮습니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냐면 우리 교회의 청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또래가 전부다 그렇게 놀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글들을 읽으면서 절망합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한 글도 제대로 정신 차린 사람의 글이 없고 이 시대의 문화에 그 화류에 둥둥 떠다니는 의식의 부편들입니다. 그 중에서 읽을 만한 글이 한 줄도 안 나옵니다. 제가 그래서 큰일났다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확실히 신앙을 가르칠 만큼 신앙이 굳세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감화시킬 만큼 신앙이 좋으려면 엄청난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내가 교회 다닌다고 해서 절대로 우리 시대 우리 아이들의 시간의 9할을 장악하는 현대 문화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칩수 있습니까? 엄마, 아버지가 자녀에게 만나는 접촉빈도는 10%도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손 안에서 쓸 수 없는 그런 대중문화에 뜰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시간나면 들어가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뿐만 아닙니다. 대부분 청년들이 거의 같은 수준입니다. 마음씨는 착하지만 이 거친 세상을 이겨낼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착하기만 할 뿐 능력과 돌파력과 추진력과 파괴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뚫고 나갈 만큼 그리스도의 기백이 없는 겁니다. 그게 문제인 겁니다.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세속에 물들게 됩니다. 무신론자들의 언어에 물들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논리가 그들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그들의 심령을 뿌리째 흔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각을 잃어갑니다. 무신론자들 사이에 있으면 점점 하나님을 찾고 싶은 지각, 기도하고 싶은 지각이 점점 퇴화됩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싶은 지각이 퇴화되는 것은 무신론적인 접촉을 계속 할수록 죄를 한 번 저지를수록 점점 하나님에 대한 민감도는 떨어집니다. 여러분께서 만일에 한 번 큰 죄를 지으면 몇 년 동안 받은 은혜를 순식간에 망각할 수 있는 그렇게 힘든 것이 죄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백성은 무지합니다.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죄를 행하면 하나님을 부를 힘을 상실해 버립니다. 죄를 행하지 못하고 죄 짓고 싶은데 못 지으면 내가 복수하고 싶은데 복수 못하고 있으면 그 힘이 하나님 부르는 힘으로 폭발하는데 내가 내 욕망을 다 분사시키고 분출하면 하나님을 부를 힘을 딱 상실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젊은이들도 왜 하나님을 부를 힘이 약하냐면 그들이 사는 삶의 현장이 완전히 거의 무신론의 쾌락바다, 정욕의 바다, 음란의 바다 인터넷 생각 자체가 그렇게 몰려가기 때문에 이들이 경건한 하나님을 찾는 지각의 사람 앞에 노출되는 빈도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 청년 대학부가 앞으로 한 세대 후에 교회의 미래들입니다. 10년, 또는 20년 후의 교회의 미래들인데 여러분도 눈이 있으면 잘 보시길 바랍니다. 일산두레교회는 교회가 작아서 아직까지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큰 교회에 가보면 이것은 큰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 계명을 범할 때마다 죄를 한 번 저지를 때마다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힘은 그만큼 없어집니다. 아우성치는 기도는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민감하게 느끼는 영적 지각력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보시길 바랍니다. 5절에 죄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은 두려움과 공포와 전율로 음습하십니다. 심판의 때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각을 정상적으로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엄청난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벼락을 치듯이 치십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의인의 세대, 하나님을 찾는 지각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세대라는 말은 일평생 동안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일평생 동안 또는 의인의 공동체안에 계속 시냇물이 흐르듯이 졸졸졸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좀 간증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두려움 없이 간증해야 합니다. 신앙 있는 여러분들은 주일에 와서 그 입을 그냥 쉬면 안 됩니다. 한 줄이라도 가르치고 가셔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초등학교 1학년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중에는 5학년도 있고 6학년도 있기 때문에 유치원생 같은 교인이 오면 한 줄이라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설교 들었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안 되면 가르쳐주고 이런 식의 신령한 위계질서가 우리 교회에 자발적으로 서야 합니다. 그래야 됩니다. 의인의 세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만민이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동반함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은 죄 짓고 하나님 앞에 교만한 얼굴로 살면서 하나님이 없다 즉 무신론 사상은 행위 때문에 가능합니다. 행위를 통해서 무신론은 시작되고 죄악된 행동, 하나님 앞에 거칠 것 없이 사는 그 도덕적 재갈이 풀어져버린 그런 삶이 무신론을 완성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 살피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점점 경건하게 살면서, 그러나 경건하게 사는 그들의 삶 속에는 일평생 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맛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분명하게 두 가지 길로 갈 때 무신론적인 세대, 무신론의 지식, 무신론의 문화, 무신론의 이런 풍속이 지배할 때 저항군, 유신론자, 하나님을 찾는 지각의 세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수련회가 바로 유신론자의 신학, 하나님 계심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믿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치던 사람들을 사랑과 신령한 힘으로 감화감동 시키는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수련회는 성령충만 없으면 치를 수 없습니다. 성령충만은 새로운 일을 앞두고 사명을 앞두고 누리지 못하면 도저히 치를 수 없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왜 성령충만 받아야 합니까? 2박 3일 동안 우리는 믿지 않는 형제자매들의 마음속에 결정적인 신앙이 생기도록 성령충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냉담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심령 속에 뜨거운 불을 지피기 위해서 먼저 믿은 우리들은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순절 120문도가 간구했지만 3000명이 혜택을 보는 그런 일이 이번에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합시다. 포로의 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형제자매들이 돌이키는 그래서 우리 함께 축제로 즐거워하는 수련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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