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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인생관은(고전 10:23-33)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8.

성도의 인생관은
고린도전서 10:23-33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한번 주어진 이 엄숙한 이생, 이 존귀한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을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요 수학자요 종교가였던 피타고라스가 말했습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20년정도 있으면 사람이 보통으로 150년은 살게 되리라고 과학자들이 장담합니다. 300년을 살아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보람있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의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이 고귀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인생관을 가질 때 나의 인생을 보람있게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때 올바로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을 때 올바로 살아가기가 어렵고 힘차게 실천하기가 힘이 듭니다. 이런 사람은 유혹 앞에 타락하기 쉽고, 시련 앞에 좌절하기 쉽고, 고난 앞에 낙망하기 쉽습니다.


초지일관 한 행동, 시종여일한 생활, 백절불굴의 태도, 칠전팔기의 의지는 모두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잠언에 보면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상이 없는 민족은 역사의 시련과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것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새 정신으로 새 생활을 힘쓰는 새 민족이 되어 새 나라를 건설하고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만물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새 사람은 무엇이고 낡은 사람은 무엇입니까? 새사람은 생각이 새로운 사람이요, 낡은 사람이란 생각이 낡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낡았다 해롭다 하는 것의 기준은 그 사람의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이 새로워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변화하려면 그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가끔 외국에 가보면 문명한 세계에 살면서도 20년 30년전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사는 분들을 만나는데 문명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봅니다. 외국에서 난 사람을 우리는 흔히 2세라고 하는데 말은 외국어를 하면서도 생각은 1세들과 다른 것 없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생각, 의식, 사상이 달라져야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사람이 바뀝니다. 사람이 바뀌면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왔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난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을 한 없이 아끼고 존중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 너의 생명, 우리의 생명이 그 지위가 높건 낮건, 재산이 많건 적건, 교육을 많이 받았건 적게 받았건, 남자 건 여자 건, 권력이 있건 없건, 하나님이 주신 감사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 무엇이 소중하다 소중하다 하여도 사람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천산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나의 생명이요 너의 생명이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 귀중한 생명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생명과 남의 생명을 천시하고 학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정적이고 허무적이고 저주적 생명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은 의무도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목적도 사명도 없이 내던져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허망한 꿈이요 무의미한 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성실하게 살고 진지하게 살만한 것이 못된다고 합니다. 도박을 하는 것처럼 되는대로 살고 아무렇게나 살아갈 뿐이라고 합니다.


헬라의 비극시인 소포클레스는 "안간에게 있어서 최선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차선은 하루 바삐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으로 허무적으로 저주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업신여기고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되는대로 살고 스스로를 타락과 저주와 불행의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명 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 속에 받아들이고, 나의 지혜와 정성과 능력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아 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꿈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문학가 로맹롤랭은 "인생은 엄숙하다"고 말했는데 그렇습니다. 20세기의 상자 슈바이처는 "생명은 존업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생명에 관한 엄숙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이런 마음과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중히 여기고 자기를 아끼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스스로 조심하여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 천하를 얻더라도 네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온 천하를 손에 쥔다고 해도 내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생명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온 천하라도 우리의 생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온 천하의 가치보다도 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더 높이 귀중히 보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무한한 잠재력과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분과 재능과 소질,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최대한도로 키우고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처럼 장사해서 남겨야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처럼 땅에 묻어두면 안됩니다. 구슬도 닦아야 빛이 납니다. 산 속의 금맥도 캐내야만 그 빛과 값을 나타냅니다. 산 속에 아무리 많은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다고 해도 캐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안에 빛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빛과 힘을 최고도로 발휘하고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요 목표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빛과 힘을 마음껏 발휘한 사람들입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아름답게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려면 부지런히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면서 정성껏 돌보고 가꾸어야 합니다. 저절로 풍성한 열매가 맺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비범한 재주도 내버려두면 녹이 쓸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소질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은사의 개발입니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땀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구성된다"고 말한 발명와 에디슨의 말은 너무 옳습니다. 이것은 에디슨이 사색에 의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그의 생활을 통해 얻은 진리입니다.


인류역사에는 위대한 천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천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천재는 요행의 결과가 아닙니다. 천재는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사안일속에 허송세월을 하거나 편안한 잠에 취했을 때 천재들은 밤이 새도록 피땀의 수련과 노력을 쌓았습니다. 백련천마(百鍊天麻)란 말이 있습니다. 백번 연습하고 천번 갈고 닦는다는 말입니다. 남이 한번 하면 나는 열번하고, 남이 열번하면 나는 백번하는 끈덕진 노력 속에서 천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걷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자만이 향상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사도바울을 훌륭하게 생각합니까? 그는 푯대를 향해 달음질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굉장한 도권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높은 데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실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를 풍성하게 기른 다음에는 사회와 동포를 위해서 보람있게 써야 합니다. 은사는 쓰기 위해 받은 것입니다.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쓰지 않는 은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특색은 활동에 있습니다. 활동은 문자 그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많이 활동하면 많이 활동할수록 그는 힘차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게 활동하면 적게 활동할수록 그는 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활동의 정도가 살아가는 정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산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활동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힘차게 활동하고, 죽은 것은 전혀 활동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활동이 전혀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창조적 자기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저다운 빛이 있고, 저다운 향기가 있고, 저다운 개성이 있고, 저다운 노래가 있고, 저다운 은사가 있습니다.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고 발휘하는데 인생을 살아가는데 의미와 보람과 가치가 있습니다.


자기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는데 인생의 행복이 있습니다. 시인은 시를 쓸 때 삶의 기쁨을 느낍니다. 왜요? 시를 쓰는 것이 시인의 창조적인 자기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성악가는 노래를 부를 때 생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살아가는 보람을 느낍니다. 학자는 학문을 연주할 때 행복합니다. 등산가는 산에 오를 때 즐겁고 운동선수는 운동에 열중할 때 가장 기쁨을 느낍니다.


그들이 왜 기쁩니까? 모두가 창조적 자기 표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여성교육에 일생을 바친 전이화대 총장 김환란 박사는 그의 일생의 만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아주 귀한 말입니다. 인생을 성공한 사람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김환란 선생은 자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전력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어도 한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의 말년에 쓴 편지 디모데후서 마지막 부분에 보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의 살아온 일생을 잠깐 돌이켜 보면서 한 말 "관제와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호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인생의 개선가가 아닙니까?


그는 전력투구의 자세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구시합을 할 때 투수는 스트라익을 넣기 위하여 또 승리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공 한 알을 던지는데 온 지혜와, 온 정성과, 온 능력, 온 기술을 집중시킵니다. 이것이 전력투구입니다. 인생을 전력투구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충실감과 보람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성공한 사람, 사회에 큰 일을 한 사람은 모두가 전력투구한 사람입니다. 위대한 승리는 전력투구의 산물입니다. 나의 생명을 완성하다는 것, 나의 생명을 실현하다는 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내 생명을 최선을 다해서 살 때 권태니, 허무니, 불안이니, 태만이니, 불만이니, 낙심이니 하는 어두운 감정들은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전력투구하지 않는 데서부터 그런 어두운 감정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는 부정적인 자세와 긍정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을 자기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내가 나를 마이너스의 측면에서 봅니다. 나는 지방출신이다. 나는 일류학교를 못 나왔다. 나는 머리가 신통치 않다. 나는 특별한 재능도 없다. 우리 집안도 별볼일 없다. 나는 무능력자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다. 나 같은 것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다. 나는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자세는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어두운 심정이 됩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위축되고 좌절감에 사로 잡혀 삽니다.


인생에서 자신감과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는 섦의 의욕을 잃고 전지의 기력을 상실하고 말아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될 일도 안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리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내가 나를 플러스의 측면에서 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소중한 사람이다. 주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절망이나 불가능은 없다. 이와 같은 삶의 긍정적인 자세는 자기를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소망과 용기로 심신이 부풀어오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낙심이나 위축 좌절감 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희망과 확신, 그리고 용기를 갖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의욕이 솟구치고,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고,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은 절대로 내게 손해 되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서도 늠름하게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소망의 등불이 있고, 확신과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어떤 어려운 역경도 돌파하고, 커다란 고난도 극복하고, 무서운 시련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소망은 강한 용기요, 새로운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강한 용기와 새로운 의지를 가지고 고난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우리에게서 모든 공포를 쫓아내 버립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소망은 생명에 이르는 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생관을 갖느냐 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가 달라집니다. 가령 여기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보람도 없고 사는 의미도 없는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성실하게 살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는 되는대로 살고 아무렇게나 행동합니다. 삶의 의욕도 없고 무슨 일을 해도 성의와 열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하고 약속을 해도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무계획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상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높은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분투 노력하는데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생애를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한 자세로 신의와 책임을 지키면서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행동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생활에는 확고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가치를 창조하려고 힘씁니다.


그러니까 허무주의자의 삶의 자세와 이상주의자의 삶의 자세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관이 우리 삶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인생관은 우리 삶의 나침반이요, 생의 길잡이입니다. 성공한 사람,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모두가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한민족,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그 국민의 인생관과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번영과 부강의 상징이 되고, 세계를 지도하는 위치에 서게된 것이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국민에게는 청교도적 개척자의 인생관이 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빈곤과 쇠퇴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향락주의적 인생관에서 유래하는 바가 큽니다. 그들은 인생의 목적이 주색잡기에 있다고 보고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기를 즐기는 타락적, 퇴폐적 인생관이 그들의 사회를 가난하고, 뒤떨어진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한 민족이 번영하려면 그 민족의 인생관을 옳게 건설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행복하려면 그 사람의 인생관이 옳아야 합니다. 인생관은 한민족이나 한 사람의 정신적 지주요 마음의 대들보요, 생활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그 나무는 힘차게 자라납니다. 사람이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의 인생관이 건전하고 착실해야 그 민족은 부강과 번영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해서 스웨덴의 석학 구너뮈르담(Gunner myra)은 "국빈론"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아시아의 빈곤은 자원이나 자본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지역 주임의 불합리한 생활태도와 인습적인 사회제도에 기인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귀담아들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가 가나하게 될 결정적인 요인은 주민들의 의식구조와 정신자세와 인생관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능률, 비활동, 비합리의 악을 없애고 능률과 활동과 합리의 생활기풍, 사회윤리를 일으켜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국민의 인생관을 개조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관이 무엇입니까? 인생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냐? 성경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부정적이고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긍정적이고 이상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민족과 국가에 공헌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 의미 있고 보람되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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