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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 있는 교회(행 2:37-47 )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8.

생명력 있는 교회

사도행전 2:37~47

 

 

 

오늘은 우리 갈보리교회 열여섯번째 생일임과 동시에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이하의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과 우리 갈보리교회에 임하시기를 바라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신 것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니밍 원수들에게 잡하시기 전날 밤에 제가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으로 위로 하시고 부탁도 하시면서 분명하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장차 너희를 떠나지만 너희로 하여금 고아와 같이 외롭게 두지 아니할 터잉 내가 가면 반드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 보혜사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상상 계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사신후 40일간을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도 영양한 제자들을 따라 불러 놓으시고 분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주신 말씀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다락방에 다 같이 모였습니다. 모일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흥 동안 계속해서 함께 기도 했습니다. 열흘만에 오순절 아침을 당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그리고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뿐만아니라 혀와 같은 불이 모든 사람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상한 현상과 더불어 그 당시에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한사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게 되니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탄생하게 된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주님의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가 이날부터 시작이 된것입니다. 이 날로서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세례요한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자"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삼손도 성령이 함께 할 때 능력을 얻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울왕도 성령이 함께 할 때 능력있는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왕도 어린 소년시절에 성령이 함께해서 온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워 떠는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물매돌 하나로 쳐 죽였습니다. 솔로몬왕도 성령이 함께 할 때 지혜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바가 있었습니다. 가령 이사야 44장 3절 말씀을 보세요. "대저 내가 갈한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음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엘서 2장 28절에도 "그후에 내가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구약시대의 결론을 지은 세례요한도 마가복음 1장 8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3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무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등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가하였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말하면 현재분사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은 옛날 오순절 그때만 임하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임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온 우주적 이니다.

 

요엘 선지가 강조했던 것을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바 있습니다.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성령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임하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38,39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회개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중에 하루 3천명이 회개하고 에수를 믿어 세례를 받게 된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계속적인 축복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자의 받을 성령을 가르려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G.C.Ryle 감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금글자로 인쇄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말씀이 그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 심령 속에 흐를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이 얼마나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특별한 축복, 우주적인 축복, 계속적인 축복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성령은 그저 예수 믿게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세요.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 할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무슨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다들은 자기들이 들은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라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에 만족해 하신 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은 베드로 자신이 생각해서 한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신앙고백을 하는데 이것은형식으로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신당을 고백하는데 의미가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크게 나누면 두가지로 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육에 속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로 이런 사람을 Carnel Christian 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기는 하지마는 아직도 육신에 속해 있어서 마음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평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기는 하지마는 언제나 근심과 걱정 미움과 시기 불안과 공포속에 삽니다. 어떤때는 죄를 범하고 마음아파하고 고민합니다.

 

다른 하나는, 영에 속해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영어로 Spiritaol Christian 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말할것도 없고 언제나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랑이 충만합니다. 기쁨이 가득합니다. 언제나 평안하게 살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삶에는 성장과 발전 그리고 승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아니 교회도 죽은 교회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생명력이 없으면 죽은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사데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했습니다. 중세기의 교회를 보세요.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수호자며 지지자라는 것을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외형적으로 중세기 이상 왕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야 사람축에 들었고 기독교인이 아니면 직장을 가지기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왕성해 갔습니다. 문자그대로 기독교의 황금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중세교회의 내적으로 말할 수 없이 부패해졌고 무력하게 되어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어 죽은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왜 암흑시대입니까? 교회가 그렇게 왕성했는데 왜 어두운 시대였습니까? 교회는 많았고 전국민이 기독교인이었지마는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이 없으니까 빚을 잃게 되고 교회가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 세상은 어두워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의 수호자는 세상의 권력자인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교회의 수호자가 될 때 교회는 생명을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교회를 옹호할 때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번성하고, 활개를 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모습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 권력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의 장식품으로 생각하게 쉽습니다. 교회를 이용하려 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 행사에 교회의 성직자를 세워 복을 빌게 합니다. 아마 내년이 대선이 있는데 그 동안 안오시던 분들이 또 찾아 올것입니다. 한표라도 더 얻어보려고 할 것입니다.

 

성직자로써 권력을 등에 지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데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맞게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생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교회는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름뿐이고 실상은 죽은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주님께서 보실 때 너무 인위적인 것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권력자가 전적으로 교회를 후원하게 되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무엇을 하던지 권력자의 처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교회로서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교회는 생명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안 살수가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실 때 '살았다하는 이름만 있었지 실상은 죽은교회'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살았다하는 이름'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겉모양은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굉장한 조직 물샐틈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명이 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노름이 되면 그것은 살았다하는 이름뿐입니다. 이것은 비극중에 비극이니다. 주님의 교회가 있다고 하지마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그런 교회는 사실 세상에 있으나 마나한 교회입니다. 아니, 오히려 있어서 썩은 냄새만 피은 결과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라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죽은 교회는 부패합니다. 더럽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교회의 생명력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생명력은 성령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한 초대 교회는 세상 적인 표준으로 보면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할 때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 생명력 있는 교회는 성령이 충만할 교회입니다.

 

그러면 생명력 있는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1. 생명력 있는 교회는 서로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네 제자인줄 알리라"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서로가 시기하고 미워하고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착잡한 심정으로 마지막 만찬을 나누려고 어느 집에 모이게 되었는데 누구하나 나서서 발을 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동료 제자들은 말할 것 없고 선생님의 발을 씻으러 하지 않고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인이나 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여러분,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떠다가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딱아 주셨겠습니까? 제자들의 분위기가 이 정도였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누가 좀더 좋은 자리, 좀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까 하는 것 때문에 신경전이 날카롭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새 계명을 주셨지만 새 계명은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니까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히 받고 나니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이 마음속에 강같이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해 같이 빛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변하고 나니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들, 보아노게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품이 불같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쳐서 멸해 버려야 속이 시원하리라고 생각하던 요한도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믿음의 자녀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권면하게 된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기분에 안 맞으면 칼을 들어 내려치는 다혈질적인 성품의 소유자 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할찌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도 바울도 무슨 일이든지 사랑가운데서 행하라고 권면하면서 믿음도 있어야 하고 소망도 꼭 필요하지만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여러 가지 있지만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생명력 있는 초대교회는 세로가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역사를 연구한 요세푸스는 초대교회를 연구하다가 탄성을 질렀습니다.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가를"

 

초대교회에 권력자가 있었던 것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재벌이 있었던것도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대학자가 있었던것도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성도가 서로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랑이 굶주린 무리들이 그 사랑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모여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 교회처럼 성령충만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생명력 있는 교회는 사람들이 두려워 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게 된 초대교회는 생명력이 약동하는 교회로 태어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강하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권주의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어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다가 심문을 하면서 공갈도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로 말하면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그 분위기가 너무 험해서 도저히 자기가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조차 어려워 두려워한 나머지 어린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오순절 때 성령층만히 받고 나니까 완전히 변했습니다. 비겁하던 베드로가 강하고 담대한 주님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 당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가 참여한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을 법정에 세우고 "너희가 도대체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하며 이적과 기사를 행한 것을 추궁했습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 주신 일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뭐하고 대답했어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생겼습니까? 성령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생명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세상이 교회를 업신여기느냐 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두려워하면 세상은 교회를 업신여깁니다.

 

교회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나쁜 일을 하면서 교회를 의식하게 되어야지 나쁜 일을 하면서 교회더러 축복해 달라면 안됩니다.

 

3. 생명력 있는 교회는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갑니다.

 

오늘주신 말씀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논에 모른 심는 때입니다. 세네개의 모를 심으면 여름 지나는 동안에 20개 30개로 퍼져서 곡식을 맺습니다. 살아 있으면 번식합니다. 죽은 것은 썩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에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 간다는 것은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날마다 구원받은 사람이 더해 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빌립을 통해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게 된 것처럼 예수를 모르고 사망가운데 있던 심령들이 여러분을 통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정원의 나무를 보니까 생명력이 왕성한 나무는 기계가 무성하게 터집니다. 그런데 간신히 살아있는 나무는 가지가 퍼지지 못합니다. 내 심령의 나무는 어떤 상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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