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문제들을 극복하는 지혜/고린도전서 3-4장

by 【고동엽】 2021. 11. 28.
문제들을 극복하는 지혜
고린도전서 3-4장


우린 계속해서 고린도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가운데 그 첫번째 문제인 분쟁의 문제를 함께 같이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여러 가지 파벌로 분열되고 또 나누어진 그 분쟁의 원인을 몇 가지 원인으로 분석 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지도자를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어떤 지도자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그룹들이 나뉘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지혜를 높이고자 하는 그런 생각, 그래서 누가 더 똑똑한가, 누가 더 지혜로운가 이러한 사람의 지혜를 높이고자 하는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고린도교회 안에 나뉘어짐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 번째 원인이 분쟁을 초래한 세 번째 원인은 그 사람들, 특별히 지도자들의 역할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도자에 따라서 하는 역활이 다르다, 그 역할이 꼭 우열이 아니라, 누가 낫고 누가 나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우열한 사람이고, 누가 더 열등한 그런 차이가 아니라 역할이 다를 뿐이다, 역할이 다를 뿐이다. 역할의 차이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 그것이고 고린도 교회가 분쟁에 휘말려 들어간 중요한 또 하나의 원인이라고 우리는 지적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다루는데 그 3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그 바울의 충고는, 제안은 단순히 그 다양한 사람들의 역할의 차이만을 이해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문제들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넘어서서 이 모든 사역자들이 우리가 지도자이든 지도를 받는 사람이든 우리가 함께 일하고 있는 장, 이 교회 우리가 봉사하고 있는 교회가 정말 어떤 곳 이어야 하는가 라는 교회에 대한 이해, 교회에 대한 큰 그림을 바울은 그려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교회가 정말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교회가 어떤 일을 하는 곳 이어야 하는 것인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 이런 사람들의 불 필요한 분파나 또 그룹핑, 이런 것들의 문제는 극복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잇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교회에 대한 한 네 가지 그림을 바울이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마치 우리가 교회 안에서 생활 할 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에 대한 어떤 이미지, 그림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는 네 가지의 그림이 나옵니다. 첫 번째 그림으로 바울은 교회를 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가정, 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집. 두 번째는 밭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필드, 우리가 농부들이 일하고 있는 밭과 같다, 밭. 그리고 세 번째는 교회는 빌딩과 같다, 건물, 건축하고 있는 건물의 건축과 같다. 빌딩에 비유하고 마지막 네 번째는 성전, 템플과 같다. 네, 이것을 통해서 이 네 가지의 각기 다른 그림을 통해서 바울은 몇 가지의 중요한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집의 그림, 교회는 집과 같다. 이 집의 그림을 그리면서 문제 발생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분쟁과 분열이 초래되고 발생한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문제 발생의 원인을 다루고 있고요, 이게 1절에서 3절까지 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는 밭과 같다. 4절에서 9절까지 이 밭의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가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데, 어떤 시야를 가져야 되느냐 문제 치유의 시각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4절부터 9절까지 그 다음에 10절에서 15절까지는 문제 해결의 초점을 그 포카스를 어디다 맞추어야 하느냐 문제 해결의 초점을 바울이 제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0절에서 15절까지, 건축의 비유, 빌딩의 비유를 바울이 들면서 문제 해결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가를 바울이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성전과 같다, 템플과 같다, 성전에 비유하면서 16절 이하인데 이 성전을 통해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문제 해결의 경고를 던지고 있습니다. 워닝을 경고를 그게 16절 이하의 말씀 입니다.

자, 차례로 생각 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집, 교회는 집과 같다. 이 집의 비유, 가정의 비유 3장 2절에 보시면 어린아이들 얘기가 나와요. 1~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 대함과 같이 한다. 집에는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죽 보시면 9절 말씀 다같이 보세요 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9절 다같이 시작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 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일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집이다 그랬어요,집이다. 자, 바울이 첫번째로 그리고 잇는 교회에 대한 그림은 집 입니다. 혹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어요. 패밀리, 가족이다. 우리 집안에 들어서면 집이 좀 집 다우려면 아이들이 있어야죠, 아이들, 아이들에게는 좋은 면이 있어요, 좋지 않은 면도 있고, 근데 바울은 한 마디로 여기서 그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를 집으로 비유 하면서 집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어디에 있냐면 이것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가 발생하고 있는, 직면하고 있는 문제, 분파의 문제가 어디에 그 원인이 있었는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이 말이예요, 그 교회 안에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 뭐 아이들의 좋은 면도 있지만 아이들의 나쁜 면도 있을 수 있어요. 아이들의 나쁜 면이 뭘까요? 네, 한 마디로 말하면 아이들은 관심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밖에 없어요. 나만 위해 달라는,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관심,자기 관심, 관심을 끌려고 소위 말하면 어텐션 씨킹 을 하려고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냥 아이들이 떠들고 소리치고 하는 것도 다 날 봐줘! 이 말 이예요, 날 봐줘! 내가 여기 있다. 나에게 시선을 돌려 달라. 응? 나를 좀 봐 달라! 이 자기 관심을 요구 하는 거 이게 아이들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자기관심, 또 하나 아이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 자기 말만 합니다, 남의 얘기를 안 들어요. 자기 말만 계속 아이들이 합니다. 자기 자랑하고 그렇죠? 자기 자랑하고, 아이들이 얼마나 자기 자랑해요, 자기 자랑하고 또 아이들 여러 아이들 모아 놓으면 뭘 합니까? 아이들이 사이 좋게 잘 지내죠? 아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싸워요. 그 한 마디로 말하면 바울이 아주 쉽게 얘기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왜 그런 분파 문제와 분쟁 문제가 왜 생기느냐? 그 대답을 바울은 단순하게 하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 특히 영적으로 얘기하면 영적으로 아이들과 같은 존재가 많이 있다. 3장 읽겠어요, 3장 1절과 2절 다같이 시작,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 하였음 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네, 여기 1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란 말이 나와요, 바울이 이들이 꼭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들은 자 라면 그리고 복음에 진지하게 응답한 사실이 있다면 그리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거듭난 사람들 이예요. 그건 틀림이 없습니다. 거듭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나 아직은 어린 아이예요, 어린아이, 어린 아이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다워야죠 어린 아이가 어린아이스러운 것은 하나도 우리가 비난할 바가 못 됩니다. 그건 당연 합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아이스러워야지 어린아이가 안녕 하셨어요? 그러면 얼마나 징그러워요? 아이는 아이 다워야되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느냐면 어른이 될 만한 시기가 되었는데도 계속 애들 같아요. 이 틴에이져가 되었는데도, 사춘기가 되었는데도,자, 청년의 연령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애들 같다는 거예요, 애들 같아요. 그러면 걱정하기 시작하죠 부모들이 야! 이건 큰일났다, 이거 문제다 이 말 이예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이 말 이예요. 사실 이거는 바울 사도가 오래 전에 성경 안에서 사용한 이런 표현인데 오늘날 19세기,20세기에 와서 소위 심리학자들 가운데도 성인 아동이란 말을 많이 쓴다. 어른아이. 어덜드 췰드런 이란 말, 어른아이, 어른인데 말이죠. 어른인데 어린 아이스런면이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 어른을 붙들고 그 어른을 다스리고, 어른을 지배하고 있다. 내 속에 있는 아이, 내가 어린아이 시절에 어떤 충격을 받아서, 고통을 받아서 그래서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죠. 그건 그 어른아이 어른 속에 어린시절에 배신 당하고 충격 받은 아이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 말이죠. 이걸 심리학자들은 내적인 아이, 혹은 어른아이, 성인아이, 어덜드 췰드런, 이런 말을 씁니다. 근데 바울은 영적으로 말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다. 다른 표현으로 육신에 속한자다, 육신에 속한자다 자,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요.
자, 이제 그들의 삶을 누가 인도 하십니까? 성령이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라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았지만 성령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좇아 사는 사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부터 다룹니다. 로마서 8장을 여러분이 집에 가서 자세히 읽어보시면 육신을 좇아 행하는 사람,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 인데도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성도인데도 두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을 좇아 살고, 어떤 사람은 성령을 좇아 산다. 육신을 좇아 살면 죽는다, 성령을 좇아 살아야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 이런 어린아이,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사람들, 어린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거기서 뭐가 생기겠어요? 싸움이 일어나고, 시기가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고,분파가 일어나고, 서로 자기 잘났다는 자랑하고, 예, 이런 현상들이 생기죠. 해답은 뭡니까? 해답, 한 마디로 말하면 해답은 뭐예요? 어떻게 하면 해답 이예요? 자라나면 되요. 어린아이를 벗어버리고 빨리 자라나면 되요.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벗었다. 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거 아니예요. 나중에 고린도전서 13장에 가서 뭐, 뭐하면서 무슨 애기 하면서 사랑 얘기를 하면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 진짜 사랑 할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 이예요.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서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벗는다, 벗어 버린다. 어른스러워야 된다. 이제는 장성한 사람답게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뭐냐? 교회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적인 교회 아이들이 있는 것이 당연해요. 근데 교회가 평안 하려면 어떻게 되요? 어른들이 많아야 되요, 어른들이 많고 아이들이 적어야 되요. 그런데 애들이 많고 어른들이 조금이면, 시끄러운 소리들이 끊임없다 말 이예요. 계속 시끄러워요.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린아이가 자라나는 성숙하는 집이어야 된다. 교회에서 말씀 받고, 기도하고, 성령충만하고, 깨닫고 이러면서 뭐에요? 어른이 되어 가는 거예요. 우리가 성숙한 어른이 되 가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오래 지나가는데도 변하지 않아요. 변하지 않는단 말 이예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문제예요. 우리 교회에도 아이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적으로 말 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있어요,없나요? 뭐 있는 거야 어느 교회나 다 있죠. 당연해요. 좀 많은 거 같애요, 적은거 같애요? 좀 많은 거 같죠? 여기 저기서 소리가 좀 들려오면 그건 많이 있는 거예요. 적지 않게 있는 거예요. 사실 우리 교회가 여러분이 알다시피 역사가 아주 짧은 교회 입니다. 역사가 짤막해요. 그러니까 여러, 다른, 다양한 교회의 배경을 가진 분들이 빠른 시일 안에 몰려 왔습니다. 급 성장을 했습니다. 그건 축복 이예요. 확실히 축복 이예요. 그러나 축복과 동시에 저는 우리 교회가 안고있는 독특한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그것을 알아요. 사실, 더 이런 모습으로 발전 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건 뭐냐면, 내가 유명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차근차근 우리 교회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서서히 차근차근 교인들이 영적 성숙의 길을 걸어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행히도 그건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니예요. 빨리 모여 왔어요. 여러 군데서 모여 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특별히 어린아이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왔다 말이죠. 그건 축복 이예요. 앞으로 변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근데 변하지 않으면 문제란 말이죠, 변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한국 교회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짤막한 시간에 많은 다양한 교회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한국 교회의 짤막한 축도라고 생각해요. 작은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자, 우리 교회 와서 은혜 받고, 성령충만 하고, 말씀 공부하고, 변하고, 성숙한다. 우리 교회의 사명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이루어 지지 않으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하면서도 변하지 않아요. 아이의 모습, 자기 잘났다는 소리 계속하고 말이지, 그리고 나를 봐 달라 자기관심, 관심이고 나를 봐 주세요. 재롱 부리고 말이죠, 안 봐주면 어떻게 해요? 가서 박아 버리고, 공격하고, 막 두들겨 패고, 소리 지르고, 그래 저는 두 가지로 기도해요. 늘 기도가 뭐냐면, 하나님! 우리 교인들 좀 변하게 하옵소서. 제가 여태까지 한번도 발표하지 않은 저만의 기도인데 저는 이런 기도도 해요, 변하지 않으면 나가게 하옵소서,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변하지 않으면 나가게 하옵소서 변하지 않고 계속 있으면 이게 고통 이예요. 이런 사람들이 계속 고통 이예요. 그건 우리 교회의 영적 분위기, 공동체 형성에 있어서 굉장히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가 있어요. 그게 나가란 소리는 아니예요. 그러니까 나가기 싫으면 여러분, 이 한 가지 밖에 없어요. 나가지 않는 방법, 제 기도의 나가시옵소서에 포함되지 않으려면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살아 남는 방법, 뭐 밖에 없어요? 변화되고 자라나야 되요. 바뀌고 자라나야 되요. 그래서 저는 바뀌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고 계속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러면 제가 계속 그 사람 이름을 불러 가며 기도 할 거예요, 앞으로 집중적으로 하나님 나가게 하옵소서, 나가는 일이 생기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물론 이건 나가시란 얘기는 아니예요. 그러니까 뭐예요. 변화 되야 해요. 빨리 성장을 해야 되고 성장하고 정말 변해야 되요. 그래야 교회는, 교회는 성숙을 경험하는 가정이 될 수가 있어요. 어린아이들이 참 부모의 보람이 뭐예요? 아이들이 시간이, 세월이 흘러 가니까 의젓해 졌어요. 그걸 바라보는 부모의 흐믓함을 생각해 보세요. 이제 자라날만한 나이가 되도 계속 중학생이 되어도 고등학생이 되어도 대학생이 되어도 속썩이는 자식을 둔 부모의 아픔을 아시죠, 그게 영적 지도자의 아픔 이예요. 그래서 교회는 뭐냐 첫번째 교회는 집과 같다. 근데 어떤 집이냐? 어린아이가 자라나는 집 이어야 한다.성장하는 어린 아이들이 성숙할 수 있는, 성숙 해야 우리는 그런 어린 아이적인 요소, 유아기적 요소들을 극복하고 우리는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성숙한 공동체가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 하십시오. 믿으십니까? 여러분? 네, 집 이예요.

첫 번째 그림, 두 번째 그림은 뭐냐 밭이에요, 밭. 여기서 바울은 밭의 이미지를 가지고 문제를 치유하는 시각을 강조 합니다. 자, 고린도교회 안의 이런 분쟁을 우리가 잘 해결하고 치유하려면 어떤 시각을 가져야 되느냐? 제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우리가 주변 사람들을 볼 때 우리가, 우리는 모두가 함께 일하는 동역자다. 교회는 뭐냐? 함께 어우러져 일하는 밭 이다. 한 마디로 그게 대답 이예요. 우리 다양한 은사를 가진, 다양한 재능을 가진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하는 뭐예요? 밭과 같다.필드, 밭과 같다. 그것이 바로 교회다. 이것이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두 번째 이미지의 밭 이예요 밭. 자,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바울은 여기서 뭐라고 부르고 있느냐? 독특한 단어를 씁니다. 동역자 들이다. 그 9절 우리는 다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동역자 들이다. 우린 하나님의 동역자 들이다. 특별히 바울은 여기서 두 명의 지도자를 특별히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 6절 다같이 읽겠어요,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절,6절 5절에서6절 함께 다같이 시작,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예를 들어서 바울은 자기 자신과 아볼로의 얘기를 해요.바울의 역할을 뭡니까? 바울은 사도였습니다,사도. 지금으로 말하자면 선교사예요. 사도의 기능이나 역할이 뭐냐면 기는 곳마다 복음을 전해서 소위 처치 플랜팅, 교회를 개척 했어요. 그래서 교회를 설립합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설립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져요. 바울이 그 역할을 했어요. 바울은 강력한 리더쉽을 가지고 많은 곳에 교회를 세웠어요.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또 누구냐 하면 아볼로 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볼로는 뭘 잘 했어요? 성경에 능통한 자다. 그랬어요. 성경 교사 였어요. 아주 성경을 잘 가르치는 분 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 에게서 은혜를 아주 많이 받았어요. 은혜를 많이 받다 보면 어떤 사람은 아볼로가 최고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우리 교회는 바울이 세웠지, 바울이 최고야! 이렇게 자꾸 갈라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이나 여기서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지도자들의 문제가 아니예요. 지도자들은 갈라지지 않았어요. 바울이 자기의 어떤 뭐 갈라진 편에 섰었다면 바울이 뭐냐 바울이 스스로 얘기를 할 수가 있겠어요? 바울은 안 그래요, 바울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파를 만든단 말 이예요, 사람들이,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이 최고다, 어떤 사람은 아볼로가 최고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거예요, 그래 나는 어떤 역할을 했느냐? 나는 심었지 않느냐, 고린도 교회를 심었어요. 아볼로는 어떤 역활을 했어요? 와서 성경을 잘 가르쳐 가지고 물을 주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입니까? 6절에서 중요한 분은 6절에서 중요한 분은 정말 중요한 분은 바울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니고 누구라는 것 이예요?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이 어떻게 했다. 자라게 하셨다. 아무리 바울이 심었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어도 하나님이 도우심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없었다면 바울의 설교가 아볼로의 가르침이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겠느냐? 여러분! 아무리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 설교를 해도 여러분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성령의 역사 때문 이예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함께하심, 믿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세속적인 웅변과 설교에 차이가 있어요. 성경 가르침과 세속적인 가르침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말 잘하는 사람은 야! 말 잘 한다. 참! 좋은 소리다. 우리 영혼이 어떤 감동을 받고, 우리가 변화를 체험하고 우리가 달라지고 이건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안 되요. 궁극적으로 우리 은혜를 주시는 분, 우리의 영혼을 바꾸시는 분, 우리의 영혼을 자라게 하시고 성숙시켜 주시는 분, 그 분이 여러분 하나님 이라고 믿으십니까? 제일 중요한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 이시죠. 사람은 뭐예요? 다 동역자에 불과해요. 더불어 함께 일하는 동역자에 불과해요.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다 일반이다. 8절 자, 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다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동역자 사이에 더불어 함께 일하는 밭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끼리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는 뭐냐면 이거예요. 자기 일에 성실하면 되요, 자기 일에, 그리고 상 받을 수 있도록 자기 일에 열심히 일하면 되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 일만 하고 남의 일, 남의 부서 일 돌아다니면서 다 참견하고 가십하고 돌아다니는 사람 있어요. 그러면 안 되요. 자기 일에 성실해요. 자기 일에 상 받도록 하면 되요. 아 여기서도 주의할 것이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요. 두 가지 극단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뭐냐 하면 지기 일은 열심히 해요, 근데 그 밖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또 자기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 자기 교회 안에서도 자기 부서 일을 잘 하기 위해서 말이죠 다른 사람을 욕하고 다른 부서를 막 깍아 내리고 그런 사람 있단 말이지. 부처 이기주의, 교회 안에서도 부처 이기주의가 존재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일은 하나도 안하고 남의 일만 계속 돌아 다니면서 참견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이기주의가 아니고 무서운 사람입니다. 자기 일은 안하고 남의 일만 참견하고 돌아 다니는 사람, 뭐라고 그럴까요 공산당 같은 사람, 허허, 계속 뭐 자기 것도 없고 남의 것을 계속 거 다른 사람들을 참견하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 바울은 여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비단 고린도 교회 뿐만 아니라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교회 생활의 마땅한 태도를 가르칠 때 빌립보서 2잘 4절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빌립보서 2장4절 찾아보세요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네, 2장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첫 번째 원리는 자기 일에 성실해야 되요. 자기일 아주 열심히 해야 되요.그러나 내가 시간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일을 어떻게 해요. 도와 줘야 되요. 도와줘야 되요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줘야 되요 그런데 요청에 따라서 도와 줘야 되요.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줘야 되요. 왜냐하면 우리는 공동체 이니까. 결국은 네 일과 내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교회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것이 마땅한 자세예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자가 되야 된다. 그게 동역자 예요, 동역자, 그렇죠? 그게 동역자예요. 더불어 함께 일하는 것. 그래서 우리 밭이 풍성한 수확이 있고 우리의 밭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포도원이 되고 우리의 밭이 주님 보시기에 풍성한 열매가 있고 그래서 교회란 곳은 어떤 곳이 되야 되냐? 교회는 함께 더불어 일하는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같이 일할 수 있는 뭐예요? 밭이어야 한다, 밭이어야 한다 그것이 두 번째 이미지에요.

자, 그 다음에 이번에 세 번째 보겠어요, 세 번째 교회는 빌딩과 같다, 건물과 같다 빌딩에 비유 합니다. 바울이 세 번째 이미지를 건물의 이미지를 이 고린도전서 3장에 등장시킨 중요한 이유는 문제 해결의 초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문제 해결의 초점을 어디에 있느냐 왜 나누어 지느냐, 왜 분쟁이 이느냐 그럼 우리가 앞으로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되느냐 문제 해결의 초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3장10절과 11절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3장 10절과 11절 다같이 시작,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둔 거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자, 교회는 건물과 같아요, 근데 하나의 건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뭡니까? 한 건물이 제대로 세워져 나가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뭐 같아요? 터가 제일 중요하다. 첫 번째 강조가 제일 중요한 강조가 뭐냐면 바울이 터를 강조해요, 터, 기초 파운데이션,기초, 기초가 제일 중요해요. 이 언젠가 설교 하면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미국에 저 뉴욕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들이 뉴욕에 제일 많이 있어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또 트윈빌딩, 월드 트레이드, 세계 무역센타가 있는 쌍둥이 빌딩, 아주 큰 그리고 수 없이 많은 고층 건물들이 든든히 뉴욕 맨하탄에 아주 높이 하늘을 찌를 듯 수 많은 건물들이 함께 서 있을 수가 있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기초가 든든해요. 거기 아주 바위에요. 밑이 아주 견고한 바위에요. 기초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기초. 자, 교회를 하나의 건물에 비유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면 기초가 중요해요 교회가 세워지는 터 기초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교회의 터요, 우리 인생의 터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파운데이션, 우리의 터전이다, 우리의 기초이다. 바울은 이렇게 강조해요. 그러면 이 기초 위에서 우리가 빌딩을 건물을 지어가요.이제 자재에 대해서 말합니다. 어떤 자재를 가지고 세우느냐? 여기 여러 가지 자재가 나와요.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여러 가지 그 자재들이 등장합니다. 12절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로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자재가 등장하지만 여섯 가지 자재가 등장하지만 크게 말하면 두 가지예요. 둘로 나눌 수가 있어요. 불에 견딜 수 있는 것, 불에 견딜 수 없었던 것, 자, 불에 견딜 수 있었던 것 뭡니까? 금, 음과 보석 그건 불 질러 봐도 그대로 있어요. 견고해요. 그러나 불 한번 지르면 금방 타버리는 것 없어지고 발 것 뭡니까? 나무나 풀이나 짚, 자, 이것들은 무얼 말합니까? 대답은 그 다음절에 있어요, 13절에 보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 인데 공력이란 말이 나와요, 공력. 공력이란 말이 업적이란 말 이예요 업적, 사역, 월크스, 행적, 결과, 우리행동의 결과를 말 하는 거예요.우리가 자, 그 기초 위에, 터전 위에, 교회의 터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고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결과 그 결과들, 결과들 결국 두 가지 예요. 하나님이 인정 할 수 있는 것, 남을 수 있는 것, 하나님 앞에 인정되지 못할 것,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불 한번 질러 버리면 다 타버릴 것, 결국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없는 삶을 산 사람들, 봉사 열심히 한다고 교회서도 막 열심히 했지마는 하나님이 나중에 너 인정할 수 없다. 그건 나를 위한 봉사로 인정 할 수 없다. 이렇게 말씀 할 수 있어요. 그건 너 위해서 한 거지 네 이름 낼려고, 네 자랑 하려고, 너 폼 잡으려고 한 거지, 나를 위해서 한 거냐? 불 타버리는 거예요, 다 아무것도 없어요.상 받을 수 없어요.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구원은 받아요. 그래도 하나님이 구원 그 자체 까지도 문제 삼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이게 다 타버려도 남는 것 하나 있으니까, 뭐가 남아요? 터가 남아요, 터가, 자, 우리의 구원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의지하고 주님 영접 했으면 그 예수님 때문에 구원은 받았어요, 그러나 구원은 받았지만, 주 앞에 인정 될 수 있는 삶, 인정 될 수 있는 봉사,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뭐 한다고는 했지만, 부지런히 돌아 다녔지만, 열심히 한 거 같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도 인정 할 수 없으면 끝나요. 차이가 뭘까요? 차이가 동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동기. 우리 봉사의 동기.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봉사에 있어서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 문제가 아니라 봉사의 질이 문제다. 봉사의 퀄러티가 문제다. 교회서도 많은 일을 하는 거 그게 꼭 좋은 거는 아니에요, 봉사의 질이 중요해요 질, 어떤 질. 내가 봉사 할 때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느냐, 아름답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뭐 온갖 일을 다 하고 돌아 다녀요. 그래서 온갖 부서에서 문제를 다 일으켜요.주님 앞에 전혀 인정될 수 없는 거. 주님은 봉사의 퀄러티예요, 퀄러티,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냐,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의 향기를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정말 주님 한 분을 높이기 위해서 했느냐 이거죠. 주앞에 남을 수 있느냐, 그 공력이 불타면 15절에 해를 받는다 했어요. 상상하진 마세요, 이 해가 어떤 해인진 몰라요. 카톨릭에서는 이런 구절을 지나치게 해석 해 가지고 나중에 연옥의 논리까지 끌고 가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진 않아요. 어쨌든 혼난다, 이런 사람 혼날 날이 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래서 주 앞에 서는 날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사람이 많다 그랬어요, 부끄러운 구원.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자라나던 수원의 동네에서 한번은 막 한참 놀고 있는데 꼬마 친구들이 와서는 야! 가자 그래요, 어딜 가자고 그러니까 목욕탕에 구경가자고, 목욕탕에 불 났대요, 그래서 막 좇아갔습니다. 우리가 꼬마들인데도, 여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남탕이 아니라, 그래서 부지런히 꼬마들이 달려갔어요, 꼬마들이 뭘 안다고 열심히 달려 갔어요. 달려가 보니까 진짜 불이 났는데 목욕탕에서 불 나고 난 다음에 사건이 수습된 다음에 도착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불행하게도, 그래서 그 절호의 찬스를, 그 놀라운 광경을 제가 보지 못 했어요. 그런데 말은 들었어요. 사람들이 막 벌거벗은 채로 튀어 나왔다는 거예요. 거기서 벌거벗을 채로 튀어나왔어요, 그거 봤으면 참 가관이었을 거 같아요. 근데 그 벌거벗은 채로 튀어 나온 사람들 일단 목숨을 구했단 말이죠. 그러나 나온 다음에 일단 목숨을 구하고 나온 다음에는 뭘 느꼈을까요? 수치감, 이거 어떻게 하나, 이거 뭘로 나를 가리우나, 나를 말이죠.. 꼭 이다음에 말이지 천당 가서도 그럴 사람들이 있단 말이예요. 구원은 받았어요, 턱걸인 했어요. 턱걸이 구원. 예수 믿으니까 구원은 받았는데 주님 앞에 부끄럽고 황송하고 죄송해서 어쩔줄 몰라할 인생들이 많다. 봉사의 퀄러티가 없었다. 질이 없었다. 정말 그 동기가 잘못되었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 앞에 돌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 없었다. 이건 집을 잘못지은 것이다. 집을 잘못 지었어요. 터는 제대로 잡았는데 집을 잘못 지었어요. 자, 바울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교회란 뭐냐. 유일한 기초, 든든한 기초, 우린 다 그분을 만났어요. 유일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견고한 빌딩이어야 한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는 유일한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빌딩이여야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아름답게 봉사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아름다운 봉사를 바칠 때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교회를 이뤄가는 거란 말이죠.
마지막 네번째 이미지. 네번째 이미지는 뭡니까? 성전입니다. 교회는 성전이다. 단순히 빌딩일뿐만 아니라 그냥 빌딩정도가 아니라 성전이다. 이 마지막 성전의 이미지를 통해서 바울사도는 여기서 문제해결의 경고를 합니다, 경고.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심각한 경고를 합니다. 자, 경고, 16절, 1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너희란 말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예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한사람 한사람이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모시고 있는 우리는 성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전일 뿐만 아니라 성전인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서 큰 성전을 이룹니다. 그것이 교회. 마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한장의 벽돌처럼 우리가 모여서 한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니예요. 교회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교회의 진정한 이미지는 뭐냐? 내가 개인적으로 성전일 수 있는 이유는 내안에 거룩하신 하나님,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가 거룩한 교회, 거룩한 성전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 가운데 거룩하신 성령님이 거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이것이예요. 그렇다면 그 교회가 교회다울려면 그 거룩함이 유지되어야 해요. 그때 비로소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어요.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 전체를 통해서 성전에 성전됨을 위협할 수 있는, 성전의 거룩성을 깨뜨릴 수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것을 종합해 보면 두가지예요, 두가지. 첫째는 분쟁적인 요소, 분쟁적인 요소. 우리가 서로 나눌려고 하는 분쟁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가끔 보면. 분쟁적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 있으면 거룩한 교회가 상처를 입어요. 그 다음엔 부도덕한 사람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 개인적으로 그 삶이 부도덕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때 교회가 또한 상처를 입어요. 교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그래서 어떻게 성전일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마지막 이미지를 통해서 바울이 강조한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뭐냐, 교회는 마땅히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한다.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한다. 그럴려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 이 성전을 이루고 있는 개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주앞에 얼마나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 17절의 경고를 다시 한번 보세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여기 두가지 단어를 보세요. 더럽히면 멸하신다. 더럽히면 멸하신다. 여기서 멸하신다는 것은 교회를 멸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 한사람, 특별히 교회 거룩성을 깨뜨리고 있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가 있다. 그 사람을 징계할 수가 있다. 그것은 교회의 명예와 교회의 거룩함과 영광이 보존되기 위해서 때때로 하나님은 교회의 영광을 더럽히고 있는 사람을 옮겨갈 수가 있습니다. 옮길수가 있어요. 저는 그런 대표적인 사건이 아나니냐와 삽비라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아나니야와 삽비라.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뭐 좋은 일 했어요. 헌금 했어요. 헌금하고 막 자랑했어요. 난 재산 다 바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 바친게 아니예요. 그 뭐 별로 심각한 사건 같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두 사람, 부부를 다 생명을 거둬가셨어요. 좀 지나친 사건이 아니예요? 좀 지나치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그러나 초대교회가 막 형성되는 시점에 있어서 아마도 하나님은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아주 본격적인 레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 문제를 그냥 쉽게 넘어가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다루셨어요. 이 얼마나 그 당시 많은 교인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었겠어요. 더럽히면 멸하신다. 뭐 한사람이 더럽혀졌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 전체가 교회가 없어지거나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가 없는 교회예요.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인 성도들 가운데 부도덕한 사람들이 있으면 교회가 상당한 상처를 입어요. 저 저러네요. 목사 한사람이 잘못해봐요. 얼마나 그것이 세상에 잘못된 이미지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실추시키는지.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예요. 전 어제 굉장히 가슴 아픈 전화를 하나를 받았어요. 이민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 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그분의 여동생이 우리 교회를 나오시고, 또 제가 그 교회를 가서 집회를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대로 그분의 이야기를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자세한 스토리를 객관적으로 들어본 것은 아니고, 전화로만 들었기 때문에 혹시 그것이 전체의 진실을 대변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슴아픈 이야기 였습니다. 이 목사님 어머님이 아프셔서 한국에 잠깐 나오셨는데 그동안에 그 목사님을 싫어하는 교회 장로님 한분이 목사님 사임했다고 발표한 거예요. 교회에서. 그 목사님이 잠시 그 어머니 아픈 동안에 한국에 나와있는 동안에 목사님은 교회 사표냈다, 발표를 해버린거예요. 그 사임조처를 다 해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에 나왔다 들어가니까 모든 절차가 다 밟아져있었어요.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이예요. 그러나 그러더라구요, 이 목사님은. 목사님,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그만 두라는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가 그분들을 잘 섬기지 못했고, 그분들이 변화되지 못했으니까 제 책임이죠. 그래서 그 사표를 그냥 받았들였데요, 이분은. 받아들이고 정식으로 그럼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통고를 했어요. 근데 그 이튿날 아침, 그렇게 그 일을 주도하셨던 장로님이 그 이튿날 아침 사표를 허락하고 목사님이 받아들이신 그 이튿날 아침에 이 장로님이 그냥 이 세상 떠나셨어요, 갑자기. 무서운 사건이죠. 무서운 사건이예요. 심장마비로 갑자기 떠나버렸어요. 근데 목사님이 그러더라구요. 저는 그러나 그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교회가 더 훌륭한 지도자를 갖도록 저는 깨끗이 정리하고 한국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전화드립니다. 어저께 제가 전화받은 전화예요. 무서운 일이예요, 그런 일은. 지금도 얼마든지 아나니야 삽비라 사건, 지금도 일어날수 있는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지키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교회를 영광스럽게 만드느냐, 교회를 아름답게 만드느냐, 교회를 거룩하게 만드느냐. 이것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책임이예요. 우리 대부분이 아름다운 성도가 되고, 우리 대부분이 거룩한 성도가 되고, 우리 대부분이 영광스러운 성도가 되면, 그때 비로서 교회는 영광스러워지고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교회는 거룩한 교회가 된다. 교회는 바로 이 거룩한 성전이다. 바울은 이 큰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예요.
지금 갈라지고 아파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시시콜콜한 해답을 제시하기 보다 이 큰 그림 네개를 보여주는 것이예요.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느냐? 첫번째로 뭐예요. 교회는 집이다. 가정이다. 어떤 집이예요? 아이들이 부지런히 자라나야할, 아이들이 부지런히 유치함을 벗어나서 자라나야할 집과 같은 곳이 바로 교회다. 두번째는 뭐예요? 교회는 밭이다. 어떤 밭이예요? 나란히 사이좋게 동역자가 되어서 일해야 할 곳이 바로 교회다. 세번째는 뭐예요? 교회는 유일한 기초, 영광스러운 기초, 예수그리스도란 기초 위에 견고하게 함께 세워져가야할 건물이다, 빌딩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뭐예요? 교회는 거룩한 성전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평생 교회를 섬길 때 오늘 바울이 묘사해준 교회의 이 귀한 네가지 그림을 가슴에 품고, 아름다운 교회, 거룩한 교회, 그리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만드는 일에 참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귀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습니다. 마땅히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말씀으로 교훈을 받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 한사람이 우리 교회를 아름답게 할 수도 있고, 추하게 할 수도 있고, 우리 교회를 거룩한 교회로 할 수도 있고, 그 거룩함에 상처를 입히는 자도 될 수가 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 모두 성숙하고 변화되고 자라나야겠다는 교훈, 그리고 하나님 그리고 종래 그가 그 거룩함에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사람이라고 느낄 때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 우리는 이 엄숙하고 뼈아픈 교훈을 오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교훈으로 또한 받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한국교회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해 주옵소서. 우리교회가 또한 그런 교회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