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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믿읍시다 (벧후 3:1-7)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 우리 주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악자들을 최후로 심판하시고 경건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데 대한 확실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 바가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 교리를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위치와 태도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대에 항거하고 변질된 죄악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처신해야 할 일을 권고하고 나서 지난 시간 생각한 대로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신다”는 위로와 위안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지금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것을 알려 주는 것도 다 좋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들처럼 고난을 받으라고 권고하는 것도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이 박해를 당하였고 지극히 혹독한 시련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 속에서도 확고부동하게 견디어 내고 지속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토대 위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나 알맞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계속해서 시간은 흐르고 있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습니다. 모든 표적들과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전파되고 있는 것과 전혀 반대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이와 같이 계속해서 참고 견디어 내라고 요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아마 오늘만큼 이 주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필요를 느낀 때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과 복음의 약속들과, 그리고 특히 역사의 진행과정과 이 세상에 있는 생명의 최후의 결과에 관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모든 것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의 형편이나 입장이 오늘에 있어서는,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한층 더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나타나는 모든 것이 여기 이 성경 속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같이 생각이 되고 또한 이 모든 반대는 오늘 소위 여러 가지 과학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단호하게 반항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사도 베드로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가 첫 번째로 이야기한 것은 이 전반적인 문제는 근본적이고도 결론적으로 믿음의 문제임과 동시에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종말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고,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 종말이 어떻게 오는가 하는 데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가장 믿기 어려운 일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용서의 교리와 속죄에 관한 교리는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 때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과 세상의 파멸과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전반적인 사상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육신의 생각으로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사람들에게 그것은 결국 설명할 문제도 아니고, 논의할 문제도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성경 자체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편지에서는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모든 중심적인 문제 가운데서 계시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든가를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시란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순간에 사람들을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는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조롱자인 사람들,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계시에 대해서 생각하고 질문하여 그 설명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계시의 영역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것은 실제로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의 능력으로서는 결코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의 생활에 관한 성경의 전체적인 관념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 자체는 기적적인 것이고, 무에서 만물을 만들어 낸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인 것입니다. 물론 자연인은 그것이 매우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지난 한 세기 동안 베드로의 가르침이 거절당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연인은 우리가 어떤 일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하고 만물은 어떤 것에서부터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화론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를 풀지 못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 문제가 어디서 기인되었으며 그 문제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비록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어떤 의미에서 그 진화론은 창조의 어떤 근본적인 부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진화론은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모든 문제 중에서 단지 하나의 실례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육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믿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실례를 바로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베드로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대홍수에 대한 경고와 소돔과 고모라의 불의 심판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그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성경은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도 그렇습니다. 모든 예언은 육신의 생각으로는 지극히 환상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나사렛 동네의 목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은 그 시대의 합리적인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어리석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어리석었으며 그들은 이 말을 하는 사람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이같은 일은 정확히 시대의 종말에 대한 교리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 세상의 파멸과 새하늘과 새땅이 생기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행했던 일이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비웃으며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이것들이 당신이 말하고 있는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처음과 같이 그냥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누가 뭐라 해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과 최후 심판에 대한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다른 모든 중요한 교리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계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데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 중심적인 이야기가 다른 여러 가지 보증되는 이야기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입증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이같은 조롱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해 줌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고 우리의 믿음을 강건하게 해 줍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 자체가 저들에게 큰 위로와 위안이 될 것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그 말씀을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사람이 많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그 사람들은 성경의 예언을 확증해 주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과 신약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주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견해는 세상이 종래 완전하여질 때까지 세상은 점차로 진보하고 있고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신약 성경이 예언하고 있다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런 잘못된 견해를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에 이 세상과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발전하고 진보한다면 현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믿음마저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을 보세요.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거의 2천년 동안 전파되어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라면 더욱 강하게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위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에 생명력이 있다면 어떻게 2천년 간의 긴 역사 속에서도 오늘 정도밖에는 안되겠습니까? 2천년이면 전세계가 기독교화되고 복음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대해 수긍하는 사람이 많이 있고,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해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진정한 대답이 있습니다.
오늘 세계는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이 세계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말한 곳은 없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말세에는 위험한 일이 닥쳐 올 것이며, 이같은 조롱자들이 나타나고, 이 세상은 복음을 비웃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신약 성경이 전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종말이 있기 이전에 무서운 배교가 있을 것이며 이 세상은 이렇게 복음을 비웃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태나 상황으로 인해서 약하여지기보다는 더욱 그 속에서 분명하게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확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성경이 다른 어떠한 가르침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인간과 세상을 바로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대의 무서운 특징 자체가 성경 말씀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 조롱자들의 상태와 상황을 한층 더 폭로하고 있는데 그는 우리에게 확실한 사실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다시금 그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조롱자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만물이 처음과 같이 그냥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교리가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런 어리석은 태도를 어떻게 폭로하고 있습니까? 사도는 우리에게 확실한 사실들은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합니다.
오늘 소위 성경의 고등 비평가들은 구약 성경의 고등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성경을 너무 비판해 온 나머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성구(聖句)별로 구분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이 주장하는 구약의 메시지라고 부르는 것에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여전히 고등 비평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지만 구약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소위 성경의 고등 비평가들은 구약의 많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령 구약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의 신화로 여깁니다.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과학적 지식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전체의 이야기(신화) 속에는 종교적인 가치가 담겨져 있으며 기꺼이 그 종교적인 원리와 가르침을 붙잡고자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그것을 신화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이 장에서 주장하는 것과 아주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전반적인 문제가 그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데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노아의 대홍수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베드로의 주장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장하는 것은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기적이란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성경 역사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 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구원은 행동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시고 행동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구약의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대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구약 사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그대로 믿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하여 오해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인격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구약 역사의 이런 사실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이와 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조롱자들의 이 그릇된 주장이 어떻게 여러 가지 근거에 따라 이미 밝혀졌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사실에서 한 가지 완전한 주제를 골라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조롱자들을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옛날에 사람들이 스스로 죄악과 허물에 빠져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상을 심판하사 파멸시킬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방주를 지어 자신과 가족들을 구하고 사람들에게 경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제조하면서 앞으로 닥쳐올 파멸과 대홍수에 대해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노아의 경고를 늙은이의 망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미친 사람, 정신나간 사람으로 생각해서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온세상이 물에 잠길 것이라”는 노아의 경고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렇게 안정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세요. 저 아름다운 산들과 깊은 계곡, 그리고 언덕을 보세요.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이 모든 것이 갑자기 파멸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면 다 파멸되기를 바래서 저주하고 악담하는 것입니까?”라고 그때 사람들은 노아의 경고에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노아를 어리석다고 하면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비웃음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대홍수 심판은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오만한 자신과 확신이 완전히 어그러졌으며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구약 성경을 잘 읽어보면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온에서 평안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에 관한 아모스 선지자의 엄중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그 민족에게 닥쳐올 파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가서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모스가 자기들을 놀라게 하려는 줄 알고, 방법치고는 서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시온에서 평안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파멸이 닥쳐왔을 때 그들이 시온에서 평안히 살고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육적으로 살고,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종의 경고를 비웃고, 무시하던 것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구약의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어보아도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그와 꼭같은 메시지를 반복하여 강조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 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6-30)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눈을 감는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이미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무지는 고의적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 세상을 파멸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세상도 파멸하실 것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조롱하는 사람들이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사실들은 엄숙한 경고로 그들을 대항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는 까닭은 그들이 역사에 대해 눈을 감고 이미 일어난 일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주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잊은 것입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창조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이 있으라 말씀하시면 그대로 있게 되는 그러한 능력입니다. 그것이 이 우주 배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대홍수를 명하셨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것은 조롱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 세상은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징벌하기 위하여 보존하고 계신 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1절 말씀에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라고 했는데 진실한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실한 마음은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섞이지 아니한 마음, 조롱하는 사람들의 마음과는 반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은 기적을 믿고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저는 여러분이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을 보존하여 그와 같이 조롱하는 일이나, 그러한 가르침에 섞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지극히 조롱거리로 생각하는 그런 태도와 입장을 택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노아 시대의 믿음 없이 산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괴한 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계시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근본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온세상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곧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입니다.
여러분, 심판은 틀림없이 속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우리가 이 두 가지 위치에서 어느 쪽에 속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육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난하고 조롱하는 마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한 마음을 허락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세상적인 데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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