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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한복음 4:46-54)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러한 기적을 보면서 주의 할 것은 기적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니까 다시 배가 고픕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얼마 있다가 또 죽었습니다. 기적은 기적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는 이렇게 많은 기적들에 기록되어 있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병들고 죽는 것은 우리가 사단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든 자가 나음을 받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를 가두어 두고 있던 사단의 권세가 물러가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사단의 권세에 매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두 번째로 기적에는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예로 들면, 여기서 떡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보리떡이 오 천명을 먹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분은 온 인류의 영적인 배고픔을 채워주는 떡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기적은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행하셨던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맨 마지막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 번째 기적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기적의 목적은 "그를 믿으니라. 그와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입니다. 기적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을 살펴봅니다.
사람마다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다양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나는 오늘부터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 이렇게 결심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 궁금해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교양강좌 삼아 나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인이 자꾸 교회 가지고 하니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이야 못 들어주겠는가." 그래서 나온 분도 있습니다. 또 순전히 장가가기 위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분도 많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밀린 빚 받으러 왔다가 예수 믿게 된 분도 있습니다. 빚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빚 독촉하러 교회에 나오다가 예수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 다 팔아먹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회개하고 사람노릇 해야겠다., 이제부터 효도를 해야겠다." 그래서 왔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배가 고파서 왔습니다. 배가 부를 때는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배가 고파지니까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굶어죽지 않으려고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정당한 동기를 가지고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왔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왕의 신하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왕을 보필하는 직책이라면 이 사람은 상당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이 정도쯤 되는 지식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세상에 그런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 어디있느냐? 그런 말로 안 되는 이야기는 하지도 말아라." 이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47절을 보면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하였습니다. 아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고난은 변장을 하고 찾아온 하나님의 천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딸이 믿지 않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그 믿음을 다 버리고 10년 동안을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주일날이면 가족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고 주말이 되면 여행을 떠났습니다. 처녀 적에 교회에 다니느라고 즐기지 못하던 세상 즐거움을 마음껏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좋다는 병원을 찾아다니고 약을 사다가 먹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들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을 찾아서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왜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데려가시는 것입니까?" 목사님은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당신은 그런 일을 만나야만 하나님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여인은 마침내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소에는 듣지 못하던 하나님의 음성을 고통 가운데서 크게 들을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칼을 들고 마중 나오신다 해도 나는 그 분의 발아래 내 몸을 던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만날 때에 주님을 찾으십시오. 설령 주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신다 해도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든지, 어떤 무서운 죄를 지었든지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온 왕의 신하는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간청합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만 하면 죽어가던 내 아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 49절을 보면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였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기 전에"라는 말입니다. "죽기 전에"라는 말은 의사에게 하는 말입니다. 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의사들이 "이미 늦었습니다." 하면서 시트로 얼굴을 가리우는 장면을 보게됩니다. 아무리 용한 의사라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죽기 전에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게 "죽기 전에 오십시오."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을 단지 의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해 볼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있는데 그에게 열 두 살 먹은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병들어 죽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집에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데 도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사건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그 사이에 그만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 야이로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는 틀렸구나. 이제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봐야 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는 죽은 아이에게로 가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떠나갔던 영혼이 돌아왔습니다.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유한하나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내려오소서."라는 말입니다. 빨리 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안수기도라는 것이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새해 첫날에 목사님이 전 교인에게 안수기도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아픈 사람도 안수기도, 대학입시를 보는 학생도 안수기도, 군대에 가는 청년도 안수기도, 이렇게 안수기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심지어는 어느 농촌교회 교인이 소가 병이 들었다고 목사님에게 안수기도 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안수기도를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안수기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안수기도는 효과가 100%이고 그냥 기도는 50%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주일 아침 예배를 대예배로 불러왔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대예배가 어디 있고 소예배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안수기도, 그냥 기도 이렇게 구분해서는 안됩니다. 다 똑같은 기도입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 화가 난 나아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요즘 말로 하면 안수기도를 해 줄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홍콩에 와서 당황한 일이 하나있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가면 의사가 "입을 '아'해 보세요." 그리고 이마 한번 짚어보고는 약을 처방해 줍니다. "아니 주사도 안 놓아줍니까?" 그러면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쳐다봅니다. 빨리 약이나 타 가지고 집에 가라고 합니다. 홍콩 의사들은 여간해서는 주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주사를 놓아라 놓지 말아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의사가 더 잘 압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식대로만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는 것만으로도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이 말씀만으로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꼭 안수기도를 받아야 한다, 꼭 어느 기도원에 가야 한다, 꼭 누구에게 기도를 받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버리십시오. 이런 생각 때문에 이상한 기도원이 생겨나고 무슨 성령수술이라는 것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성령께서 수술하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평범한 것이 중요합니다. 평범한 것이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은혜를 받으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여러분들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가장 평범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간청하던 왕의 신하에게 예수님께서는 "가라. 네 아들이 다시 살았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왕의 신하는 같이 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라. 네 아들이 다시 살았다."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같이 안 가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너 혼자 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송구스러운 비유가 되겠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목사를 찾아와서 "목사님, 제 아들이 병이 났는데 와서 기도해 주십시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서 옷 입고 나오십시오." 그러는데 제가 "그냥 집에 가십시오. 다 나았을 것입니다." 해보십시오. "아멘" 하고 그냥 가시겠습니까? 아마 제 욕께나 하고 다니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신하의 태도를 보십시오. 50절의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믿고 갔다고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의심을 다 내어 버렸습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 가야한다는 생각도, 가서 손을 얹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이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방식을 버리고 주님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방식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 문제는 이렇게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 대신에 "하나님. 이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본문 52절을 보면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계시던 가나와 왕의 신하의 아들이 앓아 누워있는 가버나움은 걸어서 다섯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고 하신 시각이 칠 시라고 했는데 칠 시는 오늘로 하면 오후 1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후 1시에 가나를 출발했다면 저녁때면 넉넉히 가버나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왕의 신하는 그날 저녁에 집으로 가지 않고 그 다음 날에야 집에 돌아갑니다. 아마 가나에 온 길에 하루를 묵으면서 다른 업무를 보고 갔을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이 살아난 것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초조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아들 걱정을 다 잊어버리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 말씀을 100% 믿었습니다.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니 그런 줄로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그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모든 의심과 염려와 걱정을 다 떨쳐버리시고 온전한 믿음으로 큰 은혜를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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