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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믿음 (막1:1~8)

by 【고동엽】 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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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요한의 믿음  (막1:1~8)

지난주간 아프간 피랍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려했던 일이 참담한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이번 봉사단의 단장으로 분당샘물교회 청년담당 사역자였던 배형규 목사가 살해된 것입니다. 42살의 젊은 나이로 척박한 땅 아프간에서 세상을 떠난 배형규 목사는 그를 아는 여러 지인들과 친구들이 고백한 것처럼 봉사를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한민족복지재단에 소속되어 세계 여러 나라의 어려운 현장을 다니며 일한 사람입니다. 금년 4월에도 방글라데시를 다녀왔고, 이번 아프간의 일정이 끝나면 다시 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어려운 사람을 섬기고 도와주는 봉사의 일에 앞장선다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주일이면 샘물교회의 300여명의 청년들의 영혼을 사랑하며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했고, 이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신기하게도 그가 태어난 42번째 생일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어난 것도 그의 뜻이 아니었듯이, 죽는 것도 하나님의 정한 때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주어진 모든 사명과 달려갈 길을 달리고, 믿음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는 것도 믿음으로 살고, 죽는 것도 믿음 안에서 마칩니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바로 그 길을 따라 배형규 목사는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남아 있는 우리에게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남은 생애동안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이 부르시기까지 믿음 안에서 생을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니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한 믿음, 우리는 그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 오늘은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과연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첫째, 검소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언급한 ‘여러 선지자들’을 소개하기 위해 지금까지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들을 연대기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사야를 시작으로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 학개, 그리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까지 보았습니다. 말라기 이후 성경의 역사는 400년이라는 공백기간이 지나갑니다. 이 기간동안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어쩌면 메시야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간절함을 더해준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의 문을 열면서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잇는 다리역할을 감당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을 성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말라기를 마지막으로 구약이 끝나고, 다시 신약이 시작되면서 세례요한이 등장했고, 세례요한이후에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선지자의 역할이 없어지고 사도들과 기록된 말씀으로 기독교역사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마지막 선지자로 부르는 세례요한의 삶과 모습을 신약성경은 자세히 소개합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그를 소개하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세례요한의 모습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6절입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강조합니다.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한 구절을 통해 세례요한의 여러 삶과 모습을 연구하고 추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삶입니다. 세례요한은 유력한 제사장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시 제사장의 가문은 부귀와 영화를 얻는 막강한 자리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얼마든지 부유하고 넉넉하게 살수 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장성한 뒤에 선택한 길은 결코 부유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광야로 나가 약대 털을 입고, 가죽띠를 둘렀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박한 생활, 검소하게 산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삶이고, 생활이며, 나아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참 귀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한결같이 모두가 검소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치하거나 낭비하며 살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없어서 검소하게 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그 시대에 부유하고 넉넉한 길로 가고, 얼마든지 편안하게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지 않고 참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오늘 성경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참 귀한 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경우는 더 검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고, 모든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주님께서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생애와 삶은 늘 소박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며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주님은 전도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검소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있는 것, 남은 것은 어려운 사람과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삶이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검소하고 소박한 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사치해 진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실용주의라고 하는 현대 사조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더 낭비가 심해졌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보다 버리는 음식이 더 많다고 지적합니다. 우리 나라도 한번 입고, 아니 한번도 입지 않고 버리는 옷 때문에 환경오염이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내 것이 아니면 막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독한 개인주의가 점점 굳어지면서 내 것은 소중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세례요한의 삶은 너무도 본이 됩니다. 초창기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주도했던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검소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이 더 사치하고, 낭비한다는 지적도 받습니다. 비단 물질과 관련한 검소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의 낭비가 없어야 하고, 인격의 사치를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검소한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세례요한처럼 검소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기는 사라지는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세례요한을 소개하는 가장 분명한 표현이 3절에 나왔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를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기 표현대로 세례요한은 한마디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이요 믿음입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고 소리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야말로 사람중의 사람일진대 결코 그를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소리라는 표현합니다. 또한 그는 말도 아니고 소리라는 것입니다. 말과 소리는 다릅니다. 말은 의미가 전달되고, 좋은 말은 어떤 사람보다 오래 기억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잘 박힌 못처럼 새겨지는 것도 다 그 이유입니다. 우리는 말이 가진 놀라운 힘을 압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활동과 사역에서 말은 모두의 심장을 두드리는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도 아니고 소리입니다. 말과 소리는 무엇이 다릅니까? 말은 남지만 소리는 사라집니다. 세례요한은 이처럼 사람도 말도 아닌 소리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남들이 귀담아 듣지 않고, 중요하게 보지 않는 사람이기에 소리처럼 살았을까요?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로 생각할 만큼 대단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헤롯왕도 맘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파워가 있었습니다. 본문도 그가 가진 놀라운 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이렇게 강조합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온 유대지방, 다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가 가진 놀라운 힘이요 영향력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한번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대대로 이어지는 가장 큰 영예와 축복으로 알았습니다. 이처럼 막강한 힘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를 가리켜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귀한 믿음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자기를 드러냅니다. 특히 지금은 자기 PR(public relations)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자기의 존재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살기 힘든 시대입니다. 그래서 별 희한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PR을 하고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에게 자기를 심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심는다고 심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심지 않는다고 안 심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홍보나 광고나 소개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심어지기에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게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소리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나는 없어지고 사라져야 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조금만 일해도 큰 소리내고 나팔불고 자랑하고 떵떵거리는 것은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늘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믿음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님을 높이는 믿음입니다. 세례요한의 믿음과 삶은 광야의 소리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더 적극적인 측면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대신 주님을 드러내고 높여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세례요한은 바로 이런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자기는 사라지고 주님을 높였습니다. 자기가 가진 최대한 능력과 힘을 통해 주님을 드러냅니다. 그는 이 역할을 믿음으로 잘 감당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드러낸 모습이 본문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처럼 그는 평생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그 길을 닦다가 간 사람입니다. 주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을 평생 사명으로 알고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큰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경험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물건을 파는데 그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무엇을 파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열심히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는데 나중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그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서로 좋다고 큰소리로 꼭 사야 한다고 말하면서 삽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도 권하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물건을 사기에 당연히 좋은 줄로 알았고, 옆에서 말한 사람이 추천하여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습니다. 길에서 산 물건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또 알고 보니 파는 사람 주변에 사람들은 소위 바람잡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에 ‘바람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좋은 의미로 쓰이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 말을 좋은 의미로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 땅에 주님의 바람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바람도 일으켜야 하고, 주님을 몰아세우는 바람을 막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편히 가시도록 길을 닦고, 주님이 높임을 받도록 내가 납작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드러내도록,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모든 것이 주님의 바람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주님을 드러내지 않으면 믿음의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면서 내가 드러나고 내가 영예를 얻는 것에서 그친다면 참된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주님이 바람잡이가 될 때 주님은 분명 우리를 높여주시고 은혜와 축복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데 결코 손해는 없습니다. 손해처럼 보이는 것이 다 이익이 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늘 플러스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일 때 주님은 큰 은혜와 축복으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례요한의 믿음은 검소한 믿음, 자기는 사라지는 믿음, 그리고 주님을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한 주간도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해 힘있게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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