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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원 (빌립보서2장12절-16절)(1154-11)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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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서2장12절-16절)

 

 

요즘 볼만한 영화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왕의 남자라는 영화 그것은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영화의 반응은 대체로 지루 하지만 재미는 있었다. 그런데 좀 지루한 영화가 있습니다. 그래도 좀 볼 만한 영화입니다. 뮌헨이라는 영화입니다. 스티븐 스틸버그가 감독한 영화입니다. 조지 요나스의 복수라는 원작을 토대로 영화화 한 것입니다. 1972년 9월 5일 아랍 테러단이 선수촌에 난입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선수들을 무참히 살해를 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을 합니다. 세계가 분노를 합니다. 이스라엘은 경악을 합니다. 그래서 이 잘못된 악을 응징을 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것이 정의다 이리도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한 사람을 정해서 아랍의 지도자 9명을 암살을 합니다. 그 사람은 순간에 민족의 영웅이 됩니다. 그리고 모두들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암살을 할 때마다 더 큰 테러가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이 거기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런 응징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를 생각을 합니다. 그들이 정말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면 겸손하게 그일이 어떻게 해결이 되는 가를 지켜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리를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원리는 한마디로 겸손입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에케노센 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다 경험해 보신 바대로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모든 축복을 받는 그릇이요 모든 은혜의 근본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겸손하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겸손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대로 자존심 부러지는 소리가 뚝뚝 납니다. 사람이 겸손하고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특별히 교만한 사람 앞에서 겸손하기가 힘이 듭니다. 잘났다고 하는 사람 앞에서 고개 숙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겸손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겸손해 질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을 성경이 가르쳐 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2:5)"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에라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겸손하셨습니까?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것을 생각한다면 겸손해지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교만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혹시 '이런 일에는 좀 교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높임을 받아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사람은 낮아지는 것만큼 높아집니다.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가에 따라 그만큼 높아질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높이면 높인 만큼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억울함을 참고자기를 낮추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이 모든 진리를 말하고 나서 이제 결론을 짓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행동 지침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주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까? 복종하면 됩니다. 겸손히 낮추심으로써 다시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복종뿐입니다. 이 원리를 안다면 우리도 스스로를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복종하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 믿음을 아는 자, 그 원리를 아는 자는 복종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종을 알고 그 결과를 알았다면 우리가 이 정도 복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며, 아주 쉽지 않습니까? 낮추심과 높이심의 원리를 이해하는 자는 스스로 낮추어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종은 참 좋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복종의 미덕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종하고 순종하면 자기가 무시되는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인격 때문에 복종하는 그 시간을 괴로워서 못 참습니다. 한번 복종해 보십시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살기가 힘이 듭니다. 직장에서도 자기 마음대로 할 때에는 좋지만 남이 하라는 것을 할 때에는 그저 다 죽어갑니다. 그러니까 항상 괴롭고 항상 찌푸린 얼굴입니다. 복종은 내가 약해지는 것도 비굴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리 교만한 사람도 교통신호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붉은 신호에 갈 수 없고 푸른 신호가 떨어져야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급해도 이질서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을 못 참아서 앞으로 뛰어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30초 먼저 가려다가 30년 먼저 가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어디에서 연유합니까? 복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의 불행한 결과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두렵고 떨림으로……"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움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죄로 인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진노를 두려워하는 것, 형벌을 두려워하는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사랑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것은 귀한 사랑 때문에 오는 두려움입니다. 언젠가 고3 어머니들과 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어머니들한테 아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하나같이 "좌우간 대학은 가야 한다,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 어머니한테 그렇다면 아들이 무슨 대학 무슨 과를 지원할 것 인가고 물었더니 아직 모르겠다고 합니다. 일류 대학에 가라고 하면 실력이 모자라니 아들이 괴로워할 것이요, 그렇다고 아무데나 가라고 하면 사람 무시한다고 할까봐 아직껏 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어머니의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내가 낳은 자녀도 사랑하게 되면 기분 상할까봐 함부로 말을 못하게 됩니다. 또 어떤 부인은 퇴근하는 남편에게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밖에서 아무리 피곤한 일이 있었어도 가족에게만은 유쾌한 아버지, 믿음직한 남편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말을 거리낌 없이 해도 된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사랑으로 인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에도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는 않았는가,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게 된 일은 없었는가,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오는 두려움이지 저주받을까봐 걱정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자 그런데 복종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잠잠히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라."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놓고도 항상 두려움이 있어야합니다. 경건함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과거의 구원,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인 구원, 현재의 구원 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이 세 가지 측면에서 구원을 말씀합니다.

과거의 구원은 '이미 구원받은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것을 말합니다. 앞으로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 이것은 종말론적인 구원입니다. 그리고 현재적인 구원은 반복적인 것입니다. 매일매일 당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 낙심하지 않는 것, 죄짓지 않는 것, 의심하지 않는 것,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 이것이 현재의 구원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있는 앞에서는 아주 잘 믿는 척하고 없을 때에는 함부로 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채근담(菜根譚)」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 데서 칭찬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고요함 중에 고요한 것은 고요함이 아니다. 소란한 중에 고요한 것이 참 고요함이다. 남 안 보는 데서 칭찬하는 것이 참 칭찬이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 진실한 것이 참 진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 보는 앞에서 진실한 척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사람 앞에서 이러고 저러고 할 것이 아니라 기도도 혼자서, 경건도 혼자서,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옷깃을 여미고 자기 진실을 물을줄 아는 것이 진실이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굉장히 열심을 내는 척하다가 제풀에 사라져 버립니다. 또 직분 맡기 전에는 열심을 내다가 직분 맡은 후에는 열심이 없어집니다. 직분 맡기 전에는 여러 사람한테 보이려고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오다가 직분을 맡고 나면 주일 저녁 예배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그 위치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하고 이 사람 앞에 나타나고 저 사람 앞에 나타나기는 좋아하면서 자기 혼자의 경건이 없는 그것은 경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고 합니다. 즉 현실 속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완성을 말하며 구원의 실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은 헬라어 소테리아로서 본래 온전함(wholeness)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주 동그랗고 큰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도달해야 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꾸준함으로 변함없는 사람이 되어 사람이 보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이 경건이 늘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완전을 원하십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절)" 우리에게 하나님이 소원을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미래적인 경륜입니다. 나는 이미 나를 포기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나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사회도 나를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나를 버리시지 않고 내게 소원을 두고 계십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그 아들에게 소원을 두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9장 8절을 보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 왕에게 말합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나는 죽은 개 같은 존재입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천하고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이 비록 절뚝발이라 해도 다윗은 그를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으로 본 것입니다. 사랑하던 친구 요나단을 생각해서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랑한 것입니다. 므비보셋 자체에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를 왕자 중의 하나로 대접하고 평생 왕의 식탁에서 시가를 하도록 명령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백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의미 있는 고백이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고백입니다.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까(시 8:4)." 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그만이지, 내가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소원을 두고 계십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무 것도 모르는 핏덩이한테 소원을 두고 키우듯이 말입니다. '이 아이가 커서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하고 부모는 아이한테 소원을 둡니다. 그리고 그 소원대로 키워 갑니다. 무엇을 보고 어린아이에게 소원을 두는 것입니까? 이것 완전히 미래지향적인 소원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섭리, 보이지 않는 그 오묘하고 신비한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에 있다는 뜻입니다.

중국에서 한 선교사가 부흥회를 하였습니다. 끝나고 그 곳에 있는 중국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발견했습니까?" 그 중국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발견하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찾은 것이지 내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것은 하나의 액션(action)입니다. '행하신다'의 헬라어는 '에네르게인' 인데 이 말은 에너지(energy)의 어원입니다. 행동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소원을 두고 기다릴 뿐만 아니라 소원을 두고 행동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에는 액션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곧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처럼 소원을 두었다가 일이 안되면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하실 때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루터(M.Luther)의 말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아 헤매시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할만한 자로 만들어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내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내가 버리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버리게 하십니다. 내가 사랑하지 못할 때에 사랑하도록 만드십니다. 내가 겸손하지 못할 때에 겸손하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할 때에 부지런히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십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도록 만드십니다.

존경을 많이 받는 유명한 성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겸손하고 온유한 인품에 반하여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여 그런 인품을 가지게 되셨습니까?" 성자는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자네가 모르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지." 호되게 한번 얻어맞은 때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생활 한다고, 마음 고쳐먹는다고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진실도, 겸손도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동이 있기에 그 행동의 결과로, 그 은혜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믿음의 대표자인 사도 바울을 봅시다. 그가 저절로 겸손해졌습니까? 그 같은 겸손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는 사단의 사자,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평생 따라다니는 가시, 빠지지 않는 고통의 가시가 항상 그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대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낭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행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소원을 두고 붙드시면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만들어 내고야 마십니다. 하나님의 그 의지는 참으로 엄청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도적으로 역사 하시고 지속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진실하고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보겠습니까? 만일 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반드시 무릎을 꿇게 만드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반드시 그렇게 될 줄 알고 일찌감치 정신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눈치를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놓아주시지 않을 것 같으면 고집을 버리고 빨리 따라가야 합니다. 멀리서 미적거리다가는 얻어맞게 됩니다.

맞아도 한번만 맞아야지 두고두고 연거푸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바보요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시는지, 내게 대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지 이것을 잘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우리가 알고 이것이 꼭 이루어질 줄을 믿을 때, 이제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말씀을 줍니다. 14절을 봅시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믿음 안에서 우리는 아무도 원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아는 사람이라면 시시한 일로 남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하나님께로 까지 원망이 올라가게 됩니다. 원망은 거슬러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작은 사건 때문에 이래저래 원망하다 보면 나중에는 별난 원망을 다 하게 됩니다. 어떤 부부는 10년 넘어 살면서도 한번 다투고 나면 중매쟁이를 원망합니다. 또 주례해 준 사람, 낳아준 부모, 그 다음은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이처럼 원망을 한번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심해집니다. 때문에 절대로 원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그 뜻을 알았으면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시비도 없어야 합니다. 시비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무슨 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잘했다 못했다, 내가 크다 네가 크다, 이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한테도 원망과 시비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를 지실 참인데 제자들은 네가 크냐 내가 크냐, 우편에 앉느냐 좌편에 앉느냐 하는 그 시시하고 너절한 소원 때문에 다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한심한 소원입니다. 그러기에 남보다 더 커지고, 먼저 되겠다고 나서던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고 하실 때에 그 잔이 죽음을 뜻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넙죽 마시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12제자 중에 가장 먼저 순교했습니다. 야고보의 그 대답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이요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원망과 시비가 없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많은 원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주도권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적인 소원을 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했고, 원망했고, 불신앙에 빠지고, 결국은 광야에 엎드려 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심령들입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대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밤에 죽는다 해도 구원받을 자신이 있습니까? 만약 자신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고쳐야 합니다. 내일로 밀지 맙시다. 그리고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경륜을 깨달았으면 이제 우리가 거기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고, 찬양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하나님과 메피스토텔레스의 대화입니다. 메피스토텔레스는 파우스트를 유혹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마치 사탄이 욥을 시험을 하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주신다면 녀석을 슬쩍 나의 길로 끌어 내리리다. 하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을 하는 한 방황을 하는 법이니까. 그때 메피스토텔레스가 대답을 합니다. 고맙습니다. 사실은 나는 죽은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통통하고 살찐 놈들이 좋습니다. 송장이 찾아올라 치면 대문을 걸어 잠급니다.

유혹을 받는 다는 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송장을 향해서는 유혹 할 가지가 없는 겁니다. 이미 사탄의 손에 있는 데 무슨 유혹을 한다는 겁니까? 자기의 손에 있는 데 무슨 유혹으로 그를 넘어트린다는 겁니까? 인생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해서 살려고 그러면 사탄이 유혹을 합니다. 기도의 시간을 더 가지려면 사탄이 유혹을 더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그러면 말씀에 살려고 그러면 치열한 전쟁을 하는 겁니다. 사탄과의 전쟁을 하는 겁니다.

요즘 경기가 침체다, 불경기 건국이후 최악이다. 그런데 불이 튀는 전쟁터가 있습니다. 로또 복권방입니다. 날이 갈수록 더 그러합니다. 그 열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기관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조사를 했더랍니다. 만약에 100억원의 복권에 당첨이 되면? 첫 번째가 이혼을 먼저 한다. 하고 싶은 일의 첫 번째가 이혼이랍니다. 정신들 차리세요. 돈이 없으니까 너하고 산다. 이런 여자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지요. 우리교회야 끌쎄올시다.

이런 마음이니 거 로또가 당첨이 되도 문제요. 그게 행운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8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나온 글입니다. 그곳에서 운좋은 사람이 되려면 그런 제목으로 리처드 와이즈먼이 쓴 글입니다. 그는 운 좋은 사람으로 살려면 축복받은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1.마음을 열라고 권면합니다. 그 글에 의하면 운좋은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그런 기회를 만나는데 운 나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모두에게 신문을 주면서 신문에 사진이 몇 개나 실려 있는지 말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운이 나쁜 사람은 사진을 세는데 평균2분이 걸렸다. 반면에 운이 좋은 이들은 불과 몇 초가 걸렸다. 신문에 큰활자로 그만 세시오. 사진이 43장이 있답니다. 운이 좋은 이들은 그 메시지를 잘 찾는 편이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또 다른 글을 실었다. 그런데 그들의 차이는 이것이다. 운이 나쁜 이들은 그저 자기가 찾으려는 것에만 집중을 한다. 그런데 운이 좋은 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관심을 둔다는 겁니다. 2.는 상승의 맛을 즐겨라. 어떤 이가 은행 강도가 쏜 총알이 그의 팔을 관통했답니다. 그런데 운이 좋은 사람은 그나마 팔에 맞았으니 다행이지, 혹이 머리를 맞았으면 그게 그들의 생각입니다. 언젠가 총알이 철모를 비껴서 머리에 자욱이 남은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야 정말이지 내가 산 것이 기적이야. 그게 되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운이 좋다는 그런 이상한 것을 보지마세요. 3.는 언제든지 행운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라. 언제든지 삶에는 기회의 부여성을 찾아라. 즉 미래를 어떤 생각으로 보는가를 말합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지 말라 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 다 아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칩니까? 실은 받아들이는 자가 어떤 자세로 받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삶의 자세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세히 살피면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볼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의 가치관을 어디에 둘 것 인가를 말씀합니다. 구원 지향적 가치관을 가진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가끔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 자기의 뜻을 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당신의 보내신 이를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게 중요해요. 아무리 성공을 해도 구원과 멀어진다면 그건 성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두신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면 그게 성공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네 안에 소원이 있다. 누구의 소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원을 두셨다는 겁니다. 성경을 읽어봄 그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계신다는 겁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자식이 이렇게 자라주기를 소원하지요? 그런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 겁니다. 목사인 나에게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이 이런 소원을 두고 계십니다. 당신의 직분이 중요합니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를 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언젠가 부모가 그리도 반대하는데 끝까지 갑니다. 그래 결혼해. 좋아서 이리뛰고 조리뛰고 그런데 자기가 부모가 되서는 그때 부모의 마음을 알았다는 겁니다. 아버지 그때 ...난 네가 내 소원대로 그 일을 했으면 했다. 그 소원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꼭 불효한 사람들이 불러봐도 울어봐도... 그건 아주 똑같아.

그래서 너의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기쁘신 뜻을 두고 행하신다.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목사인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장로인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를 향한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부모는 당신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이 그렇게 커주기를 바랍니다.

좀 웃자는 말입니다. 제인이란 아가씨가 남자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는 부모님에게 인사를 시켰답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 친구를 보고선 맘이 편치를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 이 몸에 문신을 한 것과 말을 하면서 듣지도 못한 욕을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 사람 좀 마음에 안 들어. 좋은 사람 같지는 않더라. 엄마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왜 사회봉사를 500시간을 하겠어요.

그런 자식으로 살기를 바라지는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의 소원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나에게 실망을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이 있으셔서 버리지 아니 하십니다. 나는 네 이름을 손바닥에 썼다고 하십니다. 영원히 버리지 아니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이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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