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첫 증인들 (마가복음16:1-11)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인 성탄절보다도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한 부활절은 기독교의 최대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최대의 숙제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풀려고 해도 풀수 없었던 숙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 숙제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과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숙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소식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직접 그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첫 증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첫증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알게 된 한가지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서 쟁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 그래서 기독교 역사 복음의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비범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부활의 첫증인들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은 4권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입니다. 4권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적은 분량인 16장에 기록되었지만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가장 분명하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귀한 성경입니다. 마가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16장 마지막에 와서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부탁하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립니다. 신약시대의 새로운 막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산 예수님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시니 그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이기에 기쁨과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의 주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의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부활하실 때 그 믿음 그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의 몸을 친히 나타내 증거하셨습니다. 총 13번을 주님께서 부활이후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이땅에 40일간 계속하시면서 반복하여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다함께 부활의 영광과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부활의 증인들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자신을 나타낸 사람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12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가령 제가 어디 멀리 장기여행을 갖다 올때 가장 먼저 전화를 하고 연락을 드려야 할 사람이 상식적으로 누구입니까? 장로님들이 아닙니까? 아니면 권사님들 대충 그렇게 가야 모양새가 좋은 것 아닙니까? 그래야 질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일 먼저 나신 것은 여인들이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토요일 안식일이 지나고 나서 안식후 첫 날 매우 일찍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러 가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와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무덤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9절에서 주목하여 보아야 할 내용은 “ 먼저 보이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자기를 보여주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귀신 들린 여인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천대와 무시를 당하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지극이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그 여자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복음을 부탁하십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평범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그들은 단지 평범하였기 때문에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리아”라는 여인들이 많이 소개됩니다.원래 이 이름은 “마라”에서 온 것입니다. ‘괴로움’,‘비탄’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6명의 마리아가 소개됩니다.마리아 중에서 성경에서 가장 소개되는 분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로 19번입니다. 그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로서 14번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알기 이전에 일곱귀신 들렸던 여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고 고침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은 사역을 하실때에 먼저 12명의 제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사역에 빼놓을 수 없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여인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이하에 보면 그 여인들이 소개됩니다.
여기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은 일곱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려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합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이 자기의 소유와 물질로 열두제자를 도우며 복음 사역을 위해 함께 헌신했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첫출발을 할 수 있엇을까요?
귀신이 그들에게 나갔습니다. 그것도 일곱귀신이 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귀신에 들릴때 귀신들이 일곱 귀신이 들어오면 더 힘도 세고 더 초인간적인 일과 발광으로 미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귀신들려서 옷을 다 벗고 거리를 헤매면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공동묘지를 밤마다 어슬렁거리면서 어두운 삶을 살았을 수 도 있습니다. 모양은 사람이지만 짐승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놀림과 배척과 조롱과 무시를 당하엿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일곱귀신이 나갔습니다. 눌려있던 모든 영혼이 자유를 얻고 정신적인 새로움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귀신이 나가고 질병이 물러가고 모든 영육의 질병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 주의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은혜를 체험한 사람인가 아닌가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인생과 삶의 방향에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가장 나타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의 몸을 헌신하여 주님을 쫓는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를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습니다. 귀신과 질병에서 자유를 체험한 그녀는 주님의 뒤를 좇으며 그분을 위해 시간과 몸과 마음과 모든 정성을 쏱으며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생전에는 모든 소유를 털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자 그 현장에 끝까지 함께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그들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평범했던 여인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인 그들이 그 고난받는 자리 죽음의 자리에까지 간 것은 왜 일까요? 은혜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운명하시자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그 시체가 어디있는지 확인하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항품을 들고 새벽에 동산에 올라온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는 자리까지 새벽에 동산에 오르는 것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 주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진정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해주셨구나! 복음의 은혜가 있는 사람 복음의 삶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삶이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친구에게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 친구가 전도하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 너랑 나랑 다른게 뭐냐? 본질적으로 내가 믿어서 달라진게 뭐가 있냐 너하고 나하고 비슷한데 도대체 왜 믿어 다른 것도 없는데” 라고 했습니다.
그때 전도하던 친구는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다른 게 있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너는 모른다는 게 본질적인 차이야”. 그러자 무신론자 친구가 말합니다 . “야 있지도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나한테 증거를 보여봐”라고 했습니다. “어떤 증거를 보여주기를 원하니?”
“야 너 지금부터 하나님 욕을 할테니까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한번 내려오라고 해.나를 죽이던지 살리든지 어떻게 해보라고 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무신론자 친구가 하나님 욕을 5분동안 거침없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무신론자 친구가 말을 했습니다.
“야. 봐라. 아무렇지도 않잖아. 하나님이 있기는 뭐가 있어?” 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때 전도하던 친구가 그 무신론자 친구를 바라보면서 말을 했습니다.
“ 야! 지금도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증명되었어. 내가 하나님이라면 너를 벌써 작살냇을 거야.그런데 하나님은 참으시는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놀라운 거야. 그은혜가 지금 증명된 거야. 그런데 문제는 너는 그 은혜를 모르고 나는 아는 것 그것이 차이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은혜를 아는 사람 변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누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바로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셨습니까?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처음부터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을 믿은 믿음보다도 주님을 향한 헌신과 충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을때 이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8절에 보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두렵고 떨고 무서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0절에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더너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라고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부활의 소식을 증거하면서 순종할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놀랐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알고 믿고 난 이후에는 담대하게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먼저 원하시는 것은 바로 부활을 성경대로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만났습니까? 그주님을 통하여 정말로 내가 부활할 것을 믿고 영원한 천국의 삶을 믿습니까?
어떤 경우에 우리들 중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회의하고 의심하는 분들이 없습니까? 종종 보면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들 중에 상당수가 처음부터 잘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부정과 의심과 불신의 과정을 겪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대할때에 믿음 생활을 할때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의 이성과 합리적인 태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두개인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기적을 믿지 않고 성령을 인정하지 않고 천국 천사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이성을 우위에 둔 사람들은 합리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믿고 나서 배울때에는 이성을 배제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성경의 내용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차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성을 합세운 이해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우리의 생각이 주님 아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사야55장 8절-9절 “내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성적인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감격스럽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는데 비하여 도마는 과학적인 확증이 없이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완고성과 증거없이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일이 지나서 사도들이 다시 집안에 모였을 때에 지난번에 자리에 없었던 도마도 함께있고 그날도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그러면서 주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도 직접 예수님 부활을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말씀대로 믿는 신앙이 복된 믿음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혹이 있습니다.
어쩌면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도마이상으로 표적과 이적을 구하는 세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은 그것을 경계하셨습니다.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의 눈이 정확한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진짜와 가짜 우리 눈으로 우리는 가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를 믿지 마십시오. 우리는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바라시면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는 믿음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부활절을 맞아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좀 상황은 다르지만 평범한 막달라마리아같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평범한 우리들을 들어 비범한 역사를 만들어가십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듣지 못한 소식들을 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 사망을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을 증거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난 그 은혜 그 믿음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면서 매일 매일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춘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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