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자 (요20:1-16)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요20:1-16)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뒤 3일째 되는 날 새벽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새벽에 대해서 긴 수식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라고 시작합니다. 그냥 좀 이른 시각이 아니라 아직 어두움이 도망하지 못하고 깔려있는 그런 새벽이었습니다. 이런 새벽 시간에 인적이 끊어진 길을 지나 묘지들이 있는 동산을 오르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합니다. 복음서 속에 나타난 그녀에 대한 기사를 볼 때 원래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으나 주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고치시고 그 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헌신적인 여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초기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실 때 자기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던 자매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이 여인은 제자들조차 버리고 떠나간 처형의 현장에 끝까지 남아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님의 운명하시는 광경을 지켜본 여인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주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치되었고 큰 돌로 입구까지 닫히고 인봉이 되어있는 날이 저문 시각인데도 하염없이 무덤을 향해 울고 있던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안식일은 무덤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밤을 초조하게 보낸 이 여인은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도망가지 않은 어두움이 깔려 있는 길을 지나서 묘지들이 있는 음산한 동산까지 달려왔습니다.
성경의 문맥으로 미루어볼 때 이 여인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은 아직 이 여인이 새벽에 무덤에 달려간 것은 주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무덤에 가보니 무덤의 입구를 가로막았던 돌은 누군가에 의해서 굴려졌고 옮겨져 버렸습니다. 누군가가 무덤을 열고 그리스도 예수의 시신을 가져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도움을 받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여인의 기별을 받은 두 제자는 급히 달음박질하여 시신을 모셔 두었던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새벽에 달려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8절에서 말하기를 "그때에야 다른 제자들도 믿더라"
그들이 보고 믿은 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계절은 봄이었지만 해가 지면 모닥불을 지펴야되는 때였고 시간은 이른 새벽에 추위를 느끼는 때였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무덤 주위에는 대제사장의 지휘하에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보도도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그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지만 혹시 발각되면 상당한 문초를 당하거나 예수의 시체를 감추고 예수 그리스도가 평소에 가르친 대로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낸 이단자로 몰렸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시체도 없는 무덤 앞에서 서성거려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즉각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이에 두 제자가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함으로써 무덤 앞에 달려왔던 제자들의 행동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왔지만...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와 교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는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무덤까지 단숨에 달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뵈옵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마땅히 만나야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할 주일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이 없습니다. 매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면서도 그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예배와 경배 가운데 나타나 주시지 않는다는 심각한 회의나 고통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왔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때에 그들은 조금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도 없고 다시 우리를 위해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당신을 보이십니다. 궁금해서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고 돌아간 제자들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빈 무덤만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 돌아가지 못하고 거기에 주저앉아서 슬피 울던 이 여인은 결국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뵈옵는 영광스런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와 갈망과 사랑이 있는 마음의 여인에게 처음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오늘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중대한 도전과 의미를 던져줍니다. 한번쯤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가 예배의 중심이 되고 있고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땅에 계실 때나 하늘에 오르신 후에나 주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세상을 살펴도 전심으로 자기를 찾고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어보십시오. 어디서든지 하나님과의 위대한 만남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을 뵙고 싶어하는 갈망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시편을 살펴보십시오. 3장,4장,5장,6장,13장,42장,43장... 어디를 펴든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주님을 뵈옵고 싶어하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 간절하고 절박한 갈망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지자도 있었고 제왕도 있었고, 지도자도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던지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사도들이 아닌 여인에게
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비천한 여인에게 먼저 보여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평생 제자들의 가슴속에 지워버릴 수 없는 교훈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처음 영광을 보았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몇 일 전 그리스도 예수의 그 피어린 고난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목격한 그 여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처음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때 사랑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찾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그리스도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리고 그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이 여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도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있는 사랑을 종식시킬 수 없었습니다. 시체라도 찾고 싶어했던 것은 시체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니라 그 시체를 매개체로 그리스도 예수의 그 관계를 확인해 보고 싶어하는 그리움이 가져다주는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환경에 의해서 얼마나 자주 막힙니까? 사람에 의해서 얼마나 자주 끊어집니까?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연약한지 수시로 변하는 환경과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실낱같은 사랑은 끊어지고 한번 끊어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어질 줄 모르고 긴 세월을 지나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습니다. 그 시체조차 사라졌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은 죽지 않았습니다. 시체조차 사라졌는데도 오히려 사라진 시체를 보자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더 불꽃같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이 여인을 지배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는 자들에게 내려질지도 모르는 어떤 형벌도 이 여인 안에 있는 타오르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의 불꽃을 끌 수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두루 살펴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전심으로 발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려고 자기를 죽이며 몸부림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배교에 가까운 냉담함이 오늘 이 시대의 교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도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순결한 애정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그분을 찾고 싶어하는 그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
온 세상이 이렇게 당신 자신을 찾는 세상이 되어서 이 세상의 더러운 탕자와 같은 모든 부도덕과 영적인 무지와 모든 패역한 더러움들을 씻어버리고 그 위대한 부활의 광명이 온 땅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게 하고 싶으셔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더럽고 추한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씻음을 받았고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씻고 용서함을 받은 것만으로는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고 이 백성들을 품에 안고 죽게 하신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 부끄러움과 고난의 때를 일체의 순종함으로 승리하시고 보좌우편에 계셔서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으로 온 땅을 통치하시고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거룩한 부활의 계절에 이 세상을 내려다 보시면서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그토록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모하고 그렇게 이 세상에 영광스런 변혁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들이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셨을 때에 그 백성들 가운데서 재현되기를 갈망하셨던 영광스런 부활이 우리들 안에 재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다시 사신 위대한 부활을 모든 백성들이 송축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죽음을 이기시고 깨뜨리고 부활하신 이런 권능과 영광이 그 부활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삶과 교회 속에 죽음을 이기고 교회를 뒤덮은 모든 사단과 죽음의 세력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변혁 속에서 살아 숨쉬는 수많은 생명을 얻은 무리들의 영적인 부활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비로소 당신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보람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영광스런 주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가면서 그는 이 세상에서 저주받아야 할 강도들과 동료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못 박혀 죽어 가는 흉악한 강도들에 의해서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때리면 맞으셨습니다. 침을 뱉으면 뱉음을 당했고 못 박으면 못 박힘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며 죽어 가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잠시 후 이렇게 찬란한 영광으로 자기를 못 박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시리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난과 낮아지심은 숙명적이 아니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이 고난을 이기실 수 있었던 것은 이 죽음 너머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넘쳤으니 잠시 후 이 고난이 끝나고 나면 고난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의 부활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느낌이 아니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아버지의 전능하신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지금은 비록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 있어도 주께서 그 거룩한 손으로 우리를 향하여 명하실 때에 홀연히 그와 함께 변화되리라고 하는 자신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는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방법과 수많은 이 세상의 견해가 치유하도록 애를 썼지만 실패한 이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교회와 동행하시는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영적인 부활을 우리는 믿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이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잠시 후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리셨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를 그렇게 영광스럽게 살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권세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도록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맞으면서 고난주간에 흘렸던 수많은 눈물을 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절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매순간 자기를 죽이고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받들고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통해 성취하시고 싶어하시는 데에 자신의 신명을 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몸부림칠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몸부림이 이 무지하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시대 앞에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마음의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여있는 절망적인 처지나 교회가 처한 답답한 상황이나 이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깨뜨릴 수 없는 수많은 문제의 벽을 인해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서 나를 살리신 그 주님, 처참하게 죽고 이슬처럼 분토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그렇게 놀라운 부활의 권능이 오늘 우리들이 놓여있는 삶의 자리에서 재현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에 다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활을 어떻게 찬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거룩한 부활에 다시 살아남을 믿지 못했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의 심령이 죽었던 곳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지 못했던 죄뿐만 아니라 넘어설 수 없는 환경의 벽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도무지 어떤 변화를 꿈꾸지 못했던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놓여진 모든 정황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갖는 대신에 더 많은 절망으로 괴로워했던 것도 모두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사단의 모든 무기들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린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모든 삶에 있어서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실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그러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비천하였지만 그러나 사모하는 마음으로 처절한 사랑으로 죽음조차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으로, 시체조차 사라져 버린 빈 무덤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슬피 우는 이 여인에게 나타나셨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부활에 우리는 역사와 교회와 우리 개인과 모든 영역에 있어서 부활하신 위대한 권능이 우리를 뒤덮을 수 있도록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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