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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빛이시다 (요일 1:5-10)

by 【고동엽】 2021.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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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빛이시다  (요일 1:5-10)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사람은 누구와 사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제의 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교제를 하려고 할 때 그 교제가 더 깊어지고, 의미 있게 되고, 결실을 맺으려면 상대방을 알고 그 인격 앞에 합당한 반응을 나타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섭섭한 일은 교제가 깨어지는 것인데, 왜 그렇게 됩니까? 서로가 상대방을 잘 모르는 데서 기인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하려면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우리가 저에게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빛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과 조금도 타협하실 수 없으십니다. 어두움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이시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사람은 빛 안에 거해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빛이신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빛이시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빛은 거룩함을 말합니다. 빛의 반대는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두움은 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교제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성경에 있는 말씀을 베드로가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 여러 곳에 있지만, 특별히 레위기에는 여러 번 반복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본 환상 가운데 스랍들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4장 8절에 보면 네 생물의 노래가 나오는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라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실 우리는 거룩하다는 뜻을 다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짐작하면 두 가지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또한 초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인 우리와는 구별되어 계신 분이십니다.

둘째는 도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순결 무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온전한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흠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그를 공경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거룩해야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있고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

구약 시대에는 음식도 정결한 음식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결례의 법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속죄하는 제사법이 있었습니다. 가령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같은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다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와 같은 규례가 생겼던 것입니다.

물론 신약 시대인 오늘 우리가 구약 시대의 모든 의식을 그대로 답습할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제도는 실제의 그림자였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오순절 때 설교한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13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를 흘려서 단번에 만민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누구든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공로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주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12장 첫 절에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처럼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드릴 것이 아니라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믿는 사람들의 거룩한 생활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몸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산 제사를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다른 제물과 갈라놓습니다. 여기 성결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과 몸은 이 세상의 속된 것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고, 그 다음에 이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옛날 수도사처럼 이 사회를 떠나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묵상만 하고, 독경이나 하고, 따로 은밀하게 도피하는 생활을 하라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보면 항상 사회에 섞여 삽니다. 군대에나 관청에서나 회사에서나 병원에서나 학교에서나 모든 것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그 생활 가운데서 안 믿는 사람들과 구별된 데가 있어야 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짠 물이 듭니다. 그러나 산 고기는 물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 제사는 문자 그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전적인 헌신의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은 다 거룩합니다. 제물은 거룩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 자연히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오직 그 목적에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에 사용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말은 재간이나, 지식이나, 재물이나, 무엇이든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벌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때에야 거룩하게 됩니다. 가령 음악을 하나님께 드리면 거룩한 음악이 됩니다. 예술을 하나님께 드리면 거룩한 예술이 됩니다. 그리고 제물 위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제단에 제물을 드립니까?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물건 위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어떤 것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이 거룩한 것이 됩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있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임재해 계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결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속에 불결한 마음을 품어서 하나님을 떠나시게 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룩해야 이 부패한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 동문 밖 문지방에서 샘물이 나오더니 그 샘물이 점점 많아져서 광야로 흐르고 나중에는 죽음의 바다, 사해까지 흘러가서 사해가 소생해서 물고기가 많아지고, 강 좌우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과일이 열리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문자 그대로 썩었습니다. 이 썩어진 사회에 생수를, 거룩한 물을 부어 주어야 이 사회가 삽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에 가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5절에도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일치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문제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방해가 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죄와 부정직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죄가 있을 때 혹은 정직하지 못할 때 교제는 깊어지지 못하고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죄와 부정직의 문제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려고 할 때 부딪치는 아주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가 깨어져 버리는 두 가지 사건을 오늘 주신 말씀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죄가 있을 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 문제에 대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십니다. 그대로 용납할 수 없으십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일치성이 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속이고 스스로 부정직 속에 빠질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5-9절까지의 말씀이 죄와 부정직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부정직의 문제에 있어서 관심을 가져야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우리는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현재 죄를 범했고 그래서 그 교제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그렇게 되어버린 자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모든 방편과 수단과 언어를 동원시켜서 스스로를 도피시킵니다. 사도 요한은 이 편지에서 이 점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를 깨뜨리는 일곱 가지 거짓이 있습니다.


1. 요한일서 1장 6절에 “만일 우리가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내 생활 속에 죄가 들어와 있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교제가 끊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거짓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요한일서 1장 8절에 “만일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내 인격 속에 죄가 있으면서도 아주 거룩한 척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3. 요한일서 1장 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함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으면서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거짓된 의를 과장합니다.


4. 요한일서 2장 4절에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순종치 아니하면서도 순종하는 것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5. 요한일서 2장 6절에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있는가 자문해 보세요. 없다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6. 요한일서 2장 9절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거짓된 형제 사랑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중적인 삶의 본질을 파헤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직을 맡은 형제끼리 서로 중상 모략하고 세상 법정에서 싸우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이것은 거짓된 형제 사랑입니다.


7.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직성에 대한 일곱 가지를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여기서 이론과 실제가 모순이 되고 자기의 주장과 행동이 모순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위선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도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위선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는 나의 죄된 삶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 놓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부정직으로 인해서 끊겨진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제가 끊겨진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마치 내 삶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자기를 과장하고 자기의 영적인 참담한 현실에서 도피해 버린다면 우리 삶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말씀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과 8절을 보세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 속에 말씀을 완전히 놓쳐버리고 진리가 정착할 수 없으며 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10절에서 더 사실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시시때때로 내 삶 속에 경적을 울리고, 내 발걸음이 그릇된 방향으로 갈 때마다 나를 경고하며, 치료하며, 나에게 역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서 나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거짓이 가져온 일시적인 연합은 결코 인격적인 연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깨어지고 맙니다. 진리에 기초한 연합만이 영원히 흔들림이 없는 연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거짓말쟁이가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바로 비상한 기억력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하고,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계속 기억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기억력이 비상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I. Q.가 높습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더구나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 삶의 감격, 하나님의 축복, 이런 복된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잠언 28장 13절에도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기 때문에 공허하며, 찬양을 해도 열납되지 아니하므로 자기의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온갖 부정적인 비판과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서 그 예배는 순전히 종교의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죄를 숨기기 위해서 거짓말과 자기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조작하다 보니 건강도 쇠약해집니다. “내가 죄를 주 앞에 숨겼더니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음이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결과로 삶의 모든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끊어진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7절을 보세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이 피의 권능, 이 피의 은혜, 이 피의 감격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의 속죄의 피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영속적인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갈등과 불안을 끌어안고 삶 속에 기쁨이 사라지고, 괜히 가슴이 답답하고, 무엇인가가 나를 얽매는 것 같은 이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성경적인 방법을 모르 되르면 잘못된 접근 방법을 시도할 수가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서도 마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영적인 위장과 가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희극 배우와도 같은 것입니다. 배우는 가면을 쓰고 연기합니다. 자기에게는 기쁨이 없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기쁜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기이지 참된 삶은 아닙니다. 기쁨이 없으면서도 기쁜 것처럼, 평화가 없으면서도 평화로운 것처럼, 만족이 없으면서도 만족한 것처럼 사는 것, 이것은 가면을 쓴 연기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또는 본성에 대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죄에 속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죄가 없다고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기만은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전에 다윗이 범죄하고 나서 취한 행동을 기억하시지요. 나단 선지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그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이고 당장 4배나 갚게 해야 한다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윗은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단 선지가 바로 그 사람이 다윗 자신임을 가리킬 때에야 자기 죄를 생각해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께 거짓말함으로 버티어 보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사도 요한 시대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영지주의자들은 육체가 아무리 죄를 범해도 영혼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이원론적인 잘못된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요사이도 이런 주장들이 가끔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잘못된 방법을 합리화하거나 자기 자신을 숨기려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용서가 있을 수 없었고, 법 아래서 정죄되었고,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적인 범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해방되었고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범죄가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해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게 하고, 내 삶 속에서 기쁨을 앗아가며,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도 죄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길입니까? 우리가 죄를 범해도, 연약해서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도,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즉각 용서하십니다. 용서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사역에 근거해서 죄를 자백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과 교제 없이 살게 되면 죄를 범하고도 그 죄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 처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의 피는 그리스도인을 성화시키는 방편임을 가르쳐 줍니다. 신앙이 깊어갈수록 죄에는 민감해집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생활 전체를 하나님과 직면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인격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어 참으로 거룩해질 수 있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백해야 합니다.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동의해야 합니다. 이 죄를 원문에 보면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낱낱이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아니라 그 죄를 포기할 때 자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하나님의 참 용서를 받아들일 때 자백의 사역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상처나고 오염된 내 인격의 자리들을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며 빛나고 아름다운 인격을 내 속에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해야 하나님과 사귐이 있습니다. 모든 거짓을 버리고 죄를 자백하여 용서함받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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