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성장은 위에서 예시했듯이 대중의 적극적인 관심을 끌게 한 경건한 목사들의 모범에 힘입은 것이었다. 한편 윌리엄 퍼킨스나 로렌스 채더턴의 경우처럼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할도 청교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청교도 학자들로 채워진 케임브리지의 임마누엘 대학이나 서섹스의 시드니 대학은 재능있는 청교도 목사들과 설교자들을 꾸준히 배출하였다. 청교도의 진전 배경을 거슬러 살피려면 강의의 역할도 인정해야 한다. 마을에서는 시장이 자체 설교자들을 화보하고 평일 공개 설교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예배 때의 기도서 사용과 교회 의식의 일치를 위해서 강의를 사용하였다. 에섹스의 웨더스 필드에서 사역한 리처드 로저서와 런던의 세인트 클레멘트 데일즈에서 사역한 헨리 스미스는 공적 강사들이엇따. 1560년에서 1662년 사이에 적이도 700명의 목회자들이 런던에서 이런 공개 강의에 가담하여 누구나 한두 번 정동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약 60퍼센트가 청교도들이었다. 귀족들과 상류층의 후원도 청교도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유한 후원자들은 청교도 설교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였다.
엘리자베스 통치 동안에 '프라퍼싸이즈(Propersyings)'라는 것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은 강해 설교와 토론을 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모임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제재를 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주교인 에드먼드 그린달이 여왕의 뜻을 받들지 않고 프라퍼싸잉즈를 옹호하는 주장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사망하기 전 7년 동안 대주교직에서 정직되었고 이 가간 동안 대부분 가택 연금을 당했다. 여왕은 1577년 5월에 직접 감독들에게 사허나을 보내어 프라퍼싸잉즈 집회를 억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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