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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하듯 하라 (골3:22-24)

by 【고동엽】 2021. 11. 19.

주께하듯 하라   (골3:22-24)


19세기까지만해도 세계 어느나라에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주인과 종 즉 상전과 노예의 신분의 벽이 강했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노예가 차지하는 비율은 더 많았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의 로마 사회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짐승 취급을 받는 노예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반이나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전쟁에 지면 노예가 되고 빚을지면 노예가 되어 대를 이어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야 합니다.
20세기 민주주의 사회가 발달하면서 비로소 '인권' 이 중요한 이슈가 됩니다.
노예제도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신성한 인간성을 파괴하는 가증한 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은 그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토대에서 주어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노예들에게 주는 말씀이 있고 또 상전들에게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읽는 말씀은 종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붙잡아야할 중심 문장은 23절의 "주께하듯하라" 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성장과정에 따라서 아이이기도 했다가 청년이었다가 장년이 됩니다. 역할에 있어 자녀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하고 아빠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신분에서도 시대의 차이만 있을뿐 상전이 있고 종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있고 배우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처음부터 주인이지 못하고 처음부터 어른이지 않고 처음부터 가르치는 자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의 신분에게 주는 말씀에서 먼저 교훈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진실한 섬김>
종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섬김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섬김입니다.
왜 내가 종인가! 라는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자유자요 주인인 자는 평생토록 섬김을 알수도 배울수도 없을 것입니다.
섬김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덕목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발적 섬김은 섬기는 자나 섬김을 받는 자에게 행복함을 안겨 줍니다만 피동적 섬김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종의제도는 그런 점에서 가증한 악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섬김을 이용하여 자신을 받으려고만 하고 그것을 신분적 제도 속에 묶어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점에선 그는 섬김을 받아야만 하는 주인이고 우리는 섬겨야 하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 자발적 순종이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 자발적 순종이 참 사랑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섬김에서 출발합니다. 자발적 섬김인 것입니다.
종의 축복은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섬김'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인 것입니다.
자녀의 신분일때는 부모님께 순종함을 배워야 한다는 그것이 섬김의 훈련입니다.
저는 나의 세 아이들을 순종의 훈련을 시키지를 못했습니다.
왜 아이들이 자발적이지 못하고 피동적이 되어 있는지 고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어제도 제 딸 아이에게 주보를 만들어 왔으면 좋겠다고 심부름을 시켜 보았습니다.
당장에 싫다는 표정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싫다는걸 억지로 시키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관둬라 네가 기쁜 마음으로 할때에만 아빠도 너의 필요한 것을 줄거야" 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밤에는 또 엄마의 심부름으로 큰길가의 마트에 가는데 보니 유쾌해 보이지가 않아서 바쁜중에 얼른 뒤따라 동행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순종할 종으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친히 종의 모습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심으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이 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발적 섬김이며 다음으로 자녀된 우리들끼리 형제자매들 끼리의 자발적 섬김을 키워가는 일입니다.

노예제도 속에서의 노예가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주인에게 순종할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겉으로만 눈가림으로 할뿐 돌아서면 속이고 심지어는 원수 대하듯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종된 그들에겐 그리스도인된 삶에 있어 대단한 해악이 되었습니다. 섬김이 삶에 모든 것인 그들에게 그 섬김의 내용이 자발적이 아닌 눈가림의 것이니 '섬김' 도 무서운 외식의 죄가 되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진실과 성실이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단의 도구요 이용물이 될 뿐입니다.
억울한 종살이의 삶, 죽지못해 먹고사는 삶에서 무슨 자발적 순종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엔 역설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산 만큼 자신의 생애에서 억울한 종살이, 죽지못해 사는 삶을 늘려갈 뿐인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종살이요 억울한 옥살이 생활을 상당히 했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생활은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는 수업의 과정이었습니다.
자신이 종살이를 종살이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심으로 보디발을 하나님께 하듯 섬겼으니 하나님 섬기는 삶이였으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면서도 진실과 성실함으로 감당하니 거기에서도 섬길 일이 있었고 애굽의 바로왕 앞에 나아가는 길 닦는 과정이 된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 총리 대신의 일이 맡겨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보디발의 집에서의 가정 총무의 일과 감옥에서 전옥의 눈에 발탁되어 죄수들을 관리하는 인력관리의 경험은 한 제국을 관리하는 행정 관료로서의 수련장이 된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젊은 시절 유학을 가서 주말에 잔디 깍는 일과 집안 청소일을 하면서 학비를 조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참으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어느날 2층 베란다에서 주인이 청년 안창호의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합니다.
"저 사람은 청소하는 자도 아니고 잔디깍는 자가 아니라 신사로구나"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곳까지 쓸고 닦으며 진실하게 일하였기때문입니다.
안창호는 떠나면서 주인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제가 떠난 후에 이 자리를 한국 유학생에게 주십시오"
이때에 주인은
"청년, 청년의 성공을 비오 청년은 우리집에서 몇년동안 일을 했지만 당신은 청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로 신사였오"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지도자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위치에서든지 감동을 줄 수 없는 자는 성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모로서 성공하려면 자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으로서 성공하려면 아내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로서 성공하려면 남편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로서 성공하려면 학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되려고 애쓰기 전에 있는 위치에서 관계된 자에게 감동을 주는 자가 되십시오.
정직하며 성실하고 관대하면 누구나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십니까?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자가 되든지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한다는 각오로 한번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생애는 주님이 책임쳐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하듯이...>
정직과 성실로 감동을 주는 삶은 단순한 노력과 생각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무슨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23절)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면 정직과 성실은 항상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주님께 하듯 하는 자세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라 말합니다.
주님은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십니다.
보이는 주님은 땅에 없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십니다. 때문에 보이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땅에서 할 일과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 대접한 것을 잊지 않으리라"
나와 관계될수 밖에 없는 사람을 주님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은 그 대상이 주님은 아닐지라도 여기는 그 사람에게 주님이 되어 주십니다.
그 행한 행실을 주님이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평생을 아내 고생만 시키고 폭력만 행사하는 남편이어도 그를 주님 대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아내는 남이 할 수 없는 섬김을 주님께 한것입니다. 직장에서 사장과 윗사람을 그렇게 섬기는 것입니다. 윗사람은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랫사람을 볼때에 하나님이 내게 보낸 천사라 보고 사랑하며 대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지기 자식을 볼때 내 자식이라 보지않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준 어린 천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통사고로 그 딸을 잃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상실감으로 몇날 며칠을 잠을 잘 수 없이 고통하는 그들이었는데 어느날 아내에게 갑작스런 성령의 감동과 위로가 생각으로 되어 왔습니다.
"네 딸은 내가 잠시 네게 기쁨을 주기 위해 맡겨둔 나의 천사였다"

사람으로 보여지고 내것으로 여겨지면 우리는 사람을 바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까지나 악하고 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나의 모든 소유가 섬김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한 이땅의 천국은 이루어집니다.

태어날 때는 노예와 같은 신분이어서 태어난 날도 모르는 흑인이였지만 1943년 그가 세상을 떠날때에는 백인과 흑인을 망라하여 모든 미국인으로부터 존경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입니다.
그는 농학박사로서 한 크리스챤으로서 자신의 직업과 삶을 모든 사람들에게 섬김의 도구로서 송두리째 바친 사람입니다. 당시 미국의 남부지방은 면화를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면화는 땅속에 질소를 없애버려 금방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모든 땅이 못쓰게 되어 생존의 위기에 처했을때에 땅콩재배가 땅을 다시 옥토로 만들 수 있게됨을 발견하고 땅콩을 심도록 장려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땅은 금방 비옥해졌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농장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땅콩을 처분할 판로가 없었던 것입니다.
'심심풀이 땅콩' 이라고 그 땅콩이 주식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때에 카버 박사는 하나님앞에 가서 상한 심령을 토합니다.
"하나님! 왜 내게 땅콩을 알려 주셨습니까?"
한참을 기도하는데 음성이 들립니다.
"땅콩 한 줌을 갖고 네 연구실로 가라"
거기에서 그는 100여가지의 식용품과 200여가지의 실용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땅콩 마가린, 땅콩비누, 요리용기름, 화장품용 기름, 버터, 물감, 구두약, 연고, 크림...
그러나 그는 그 연구품목 생산품목에서 단 일달러의 로열티도 받지를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얻을 상급>
섬기는 자는 이땅에서 영광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참신앙이란, 자신의 노력과 수고에 대한 열매를 어디에서 얻으려고 집착하느냐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믿음은 하늘나라까지 연장되어야 합니다.
봄에 씨를 뿌렸으면 가을에 추수하듯 신앙인에게 봄과 여름은 이땅에서의 수고의 계절이고 가을의 추수와 겨울의 쉼은 하늘 나라의 계절입니다. 여기에서는 수고만 생각해야 합니다. 열매까지 거두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냥 인간이지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이땅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내가 취할 것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여러분이 섬겨야 할 여러 대상자들의 얼굴의 모습에 주님의 모습을 오버랩시키면서 그를 나로 알고 섬길수 있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럴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하듯 하십시오.
저에게 있어 여러분은 나의 주님입니다.
여러분이 내게 주님이 되지 못할때 나는 목사로서의 직임이 끝날것입니다.
아내이나 아내이지 못하며 남편이나 남편이지 못하며 자식이나 자식이지 못하고 직업인이나 직업인이지 못한 여러분이 되지 마십시요.
주님처럼 섬길 자가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없는 빈수레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출처/임종학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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