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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로 행하십시오 (요일 1: 5-10)

by 【고동엽】 2021.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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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로 행하십시오   (요일 1: 5-10)  

요한일서는 사도요한이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서신에서 사도요한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두움 등 대조적인 단어들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요한은 우리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예수님의 인성은 실체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하는 이단들의 이야기에 대해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통해 반박하며 바른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도요한이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신앙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체험을 한 사도요한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단들과 영지주의자들에게 “나는 주님을 보았고 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분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삶에 부인할 수 없는 신앙의 고백과 체험이 있습니까? 밤을 새며 간증할 고백이 있습니까?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귐을 주고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그 사귐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행하게 합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우리들에게 ‘빛 가운데 행하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사도요한이 예수님에게 듣고 전하는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독특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품이 어떤지를 설명합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다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책에서 하나님의 본성을 3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말합니다. 둘째,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1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합니다. 그분은 어둠이 아닌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1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지식이요, 진리입니다. 의입니다. 빛이 비추이면 사물이 밝히 드러납니다. 빛은 스스로 보일 뿐 아니라 다른 것들을 보이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지성적으로 보면 빛은 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빛으로 인해 우리는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빛은 우리에게 순결과 거룩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어두움은 거짓, 무지, 죄 등을 보여줍니다.
빛이 거룩이라면 어두움은 죄입니다. 빛이 진리라면 어두움은 무지와 불신앙입니다. 빛 가운데서 죄는 힘을 잃지만 어둠 속에서는 마음껏 활보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죄악은 어둠 속에서, 밤중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어둠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생명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다니면 안 됩니다.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그에게 어두움이 없다면 성도들 역시 어두움을 벗고 빛의 갑옷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십시오!

하나님과 사귀면서 죄 지을 수 없다

사도요한은 본문에 세 개의 부정 조건문을 통해 당시 그릇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주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린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첫 번째 거짓된 주장은 불의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만 어느 정도의 죄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죄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찬송가도 부르고 말씀에 은혜도 받습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죄를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나아가 죄를 누립니다. 죄의 습관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그것은 거짓말이며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는 영을 감싸고 있는 단순한 껍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은 육체의 행위에 의해 더럽혀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라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 개념은 ‘빛 가운데 행한다’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도요한은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7절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사도요한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이 있습니다. 둘째,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죄를 갖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각장애인이라서, 청각장애인이라서, 손이 짧아서 우리와 교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벌렸고, 우리 손의 피가, 우리 입술의 거짓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사 59:1~3)
빛이신 하나님은 그 빛을 우리에게 비추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합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많은 빛들이 서로 비추며 사귐이 일어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라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뿐만 아니라 성도 사이의 교제와 나눔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죄 없다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자

또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여기서 ‘모든 죄’라고 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범주에 제한을 두시지 않습니다. 또한 죄의 숫자에 한계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악취가 난다고 해도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어린 아이가 똥을 싸고 그 똥을 온 몸에 묻히면 부모는 아이를 씻기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악취가 나는 우리의 더러운 죄를 먼저 씻기십니다. 더러운 죄는 무엇으로 씻어야 합니까? 흠 없고 거룩한 어린양의 보혈의 피 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정결함과 깨끗함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죄일지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모든 죄를 씻음 받아서 온전히 교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두 번째 거짓 증거는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입니다. 다같이 8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면서 죄의 실제를 부인합니다. 사도요한은 이런 자들에게 만약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지적합니다.
사람은 죄를 의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 속에 죄가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해주는 은혜는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속량하셨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8절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아담이 최초로 지은 원죄가 아니라 흔히 지을 수 있는 자범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구원이 우리를 과거, 현재, 미래의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심판의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연약함속에 무너지는 부끄러움에 대해서 고백해야 합니다.

죄사함의 시작 - 고백

9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 안에는 허물이 있습니다. 자식은 도둑질을 해도 여전히 자식입니다. 다만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를 씻어야 합니다. 허물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싸우고 잘못을 했을지라도 여전히 부부입니다. 그러나 온전히 아름다운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 신분에는 변함이 없지만 용서를 구해야 바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우리는 이런 자백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지은 죄를 갖고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죄를 주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의 굴레로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유함을 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주님은 약속한 대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미쁘다’는 말은 예쁘다는 말이 아니라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을 보면 “...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빛에 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사탄은 그 죄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너무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힘들어 하지만 회개하면, 주님 앞에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경험하고 자유롭게 되십시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십시오. 그래서 점점 성화되어 가십시오.

십자가에서 새 힘을 얻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거짓주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가 우리의 행위로 드러나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10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영지주의자들은 우리의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선한 영은 육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이 짓는 것이지 영혼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죄를 짓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죄를 지은 적도 없다는 뻔뻔스러운 주장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행동도 부인하고 죄성까지도 부인하는 가장 나쁜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결국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픈 사람입니다. 우리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를 벗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그 보혈이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거룩한 가운데로 나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낙심할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지만 우리의 죄를 주님께 고백함으로 다시 일어서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며 거룩함 가운데 나아가십시오! 실패하거나 낙심될 때, 좌절할 때,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새롭게 힘과 용서와 축복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용서를 받아들이시고 더 이상 죄와 어두움과 과거의 죄의 습관과 벗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이 빛 가운데 행하시는 우리를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더럽고 추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
쓰러지고 좌절하고 낙심될 때,
다시금 일어나 전진하게 하옵시고,
죄로 말미암아 아픈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사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게 하옵소서.
빛 가운데 행함으로 다시금 승리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하용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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