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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두 종류의 추수꾼 (갈 6:7-14)

by 【고동엽】 2021. 11. 19.

두 종류의 추수꾼  (갈 6:7-14)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逼迫)을 면하려 함 뿐이라 13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러분 최근에 들녘에 나가 보셨습니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논에는 두 종류의 추수꾼이 등장합니다. 환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추수꾼이요, 또 다른 하나는 근심이 가득한 추수꾼입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태풍의 피해를 받지 않은 농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TV를 통해 우리가 바라본 태풍 사오마이의 영향으로 벼가 다 쓰러진 논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의 삶을 추수꾼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땅에서 심어 영원동안 거둡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삶을 매우 심각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세상의 삶은 그저 되는 대로 살아갈 그런 가벼운 삶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이 땅에서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우리가 영원동안 그것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6장 7절,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인생은 심고 거두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심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가 심은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언젠가 죽게 되어 우리의 행한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 영원한 운명이 이 땅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도 역시 두 종류의 추수꾼만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십니다. 그날에 한 사람은 썩은 것을 거둘 사람이요, 또 하나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고 영원한 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입니다. 무엇이 이 둘을 나누나요?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오늘의 당신의 삶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영원한 세계에서 반드시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러나 이 땅에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저 영원한 나라에서 반드시 영생을 거두어들일 것입니다. 우리 6장 8절을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다시 한번 잘 찬찬히 읽어보십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예,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에요. 이 추수의 계절에 이 말씀의 의미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와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영생을 거둘 터인데 성령을 위하여 어떻게 심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갈라디아서 마지막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가 이 땅의 짧은 생애동안 성령을 위해서 사는 방법 몇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생을 거두는 기쁨의 추수꾼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세상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세상을 자랑하지 말자

여러분, 무슨 의미죠? 오늘의 본문 12,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逼迫)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나타난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세상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자랑하는 것이 왜 육체를 위한 것이라고 얘기합니까? 그 원리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부지런히 세상의 것을 심어야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시면 이 땅에서도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조금만 지위를 높이 올라가 보십시오.

미국에 가면 처음엔 백인들이 참 친절하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볼 때, 백인들이 왜 이렇게 친절한가 하고 의아해 하지만 한 10년쯤 산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백인들이 친절하냐고. 우리가 처음에 가서 말도 못하고 청소를 하고 밑바닥 일을 할 때는 그들이 잘 보아줍니다. 그러나 조금 자라서 공무원 시험을 보고 그들의 경쟁상대가 될 때는 가차없이 처벌해요. 그래서 미국에 오래 살면 살수록 고향이 그리워지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지위를 높이 올려 보세요. 한번 출세하려고 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방해합디까? 최근에 송자 교육부 장관, 그 분이 연세대학 총장할 때는 아무 문제없었어요. 그는 존경받는 총장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이었어요. 모두가 그를 존경했습니다. 국민들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육부 장관이 되자마자 수많은 공격의 화살이 그를 향해 쏟아진 것입니다. 결국 며칠만에 그는 장관직을 내 놓아야 했습니다.

돈은 쉽게 벌립디까? 아니에요. 그야말로 전쟁터입니다. 번 돈을 지키려고 하면 사투를 벌려야 돼요. 언젠가 서울에서 어느 돈 많은 분과 상담을 했는데,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간증했어요. "목사님! 돈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돈을 벌고 나니 아무도 못 믿겠어요. 자식놈을 포함해서 다 내 돈 뜯어가려는 늑대처럼 보입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불안합니다. 밤에 잠도 편히 못 자겠고 비행기도 못 타겠고..." 여러분 이것이 돈 가진 자들의 고백이에요. 우리는 제물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하고, 더 많은 돈을 가지려고 합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그것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내가 가진 것을 얼마나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얼굴이 예쁜 자는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비싼 화장품도 상관하지 않아요. 성형수술도 마음대로 합니다. 돈이 많은 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지위가 높은 자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왜요? 그것이 그들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서 잠시 있을 것을 자랑하기 위해 그것에 자신의 삶을 투자하는 자들에게 저 세상에서 반드시 썩어진 것을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의 자랑거리만을 위해 심고 저 세상에서 영생과 행복과 기쁨을 추수할 방법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이 땅에서 심는 그대로,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고,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듯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자랑입니까? 당신이 지금 무엇을 위해 심고 있는가를 알기 원하면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무엇이 여러분의 자랑거리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서울대학 가서 검사 판사가 된 것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자신 있고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내세워 어깨를 펴고 다니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요,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문제는 간단해요. 돈 백 억을 갖고 계십니까? 그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우십니까? 사람들에게 내세우고 싶습니까?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자신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평생을 육체를 위하여 심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사글세방에 사십니까? 그래서 손님을 초청하기 부끄러우시고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이 없으신가요? 여러분, 역시 육체를 위해 심는자입니다. 문제는 간단해요. 무엇이 나의 자랑거리인가를 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심는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진 자랑거리를 발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거두는 추수꾼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2. 십자가를 자랑하자

여러분, 십자가를 자랑하는 게 왜 영생을 위한 추수라고 말씀할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가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조차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핵심을 예수님의 교훈이라고 말합니다. "와 보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 놀랍습니다. 그의 교훈을 보십시오. 산상설교를 보십시오." 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가로서, 훌륭한 철학가로서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들의 삶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단 한번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내게는 산상 설교가 자랑거리라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산상설교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가르침, 물론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이 결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 나오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병을 고칩니다. 어쩌다가 병이 나으면 온 교회를 다니면서 간증합니다. 입만 열면 내 병이 나았다는 거, 내 사업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도에서 탈출했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은사를 강조합니다. 방언을 합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찾아 보십시오. 사도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은사를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도덕과 병 고치는 은사와 기타 은사들이 오늘 교회에서 자랑되고 있는 까닭은 참으로 슬픕니다. 오늘 14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성경을 보십시오. 무엇이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인가 살펴보십시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굵은 하나의 선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강조점은 너무나 뚜렷해서 어린 아이들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아니요, 예수님의 병 고치심도, 은사도, 능력도 아닌 십자가인줄 믿습니다. 저는 이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오늘 시간 관계상 성경을 다 강의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단 몇 가지의 사실만 가지고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마태복음 16장에 가보면 예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니?"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기쁘셔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 네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풀면 풀릴 것이다."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그 고백을 한 다음부터 예수님이 비로소 무엇에 대해 가르치셨는지 아십니까?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십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가르치셨어요. 그때 그 소리를 들은 베드로가 말립니다. "예수님! 안됩니다. 돌아 가시다뇨?" 그러자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세요.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방금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축복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자기의 수제자에게 사탄이라는 욕을 할 수 있나요? 여러분, 이것을 포착하셔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의 좋고 나쁨이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착하냐, 나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메시아임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렸을 때, 십자가를 방해했을 때, 그는 그 사랑하는 제자를 향해 서슴지 아니하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분이 사람인줄 알았는데 조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변화산이 다 환해졌어요.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던지 "주여! 여기에 텐트를 치고 우리 여기에서 그냥 사십시다!" 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무엇을 상의했는지 아십니까?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9: 30,31)

모세와 엘리야가 왜 나타났는가? 예수님의 죽음을 상의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단 두 가지 예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성찬식이요, 하나는 오늘 우리가 지켜본 침례식입니다. 뿌리는 물이 아니에요. 물 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분명히 명령하셨어요. 여러분, 성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6절)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이 찢겨질 것을 아시고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그리고 계속해서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 27,28)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말씀 하셨나요? "무릇 너희는 이것을 기념하여 계속해서 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성찬예식의 의미는 다른데 있지 않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피와 몸을 상징하며 떡과 잔을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침례를 왜 받나요? 어떤 사람은 죄를 씻기 위해서 침례를 받는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침례를 백 번 받는다고 해서 내 죄가 조금도 씻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침례를 왜 받습니까? 침례는 간증입니다. 결혼식과 같아요. 한 젊은 사람과 내가 사랑한다면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결혼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간증하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6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3, 4절)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물 속에 들어갈 때 주님과 함께 죽은 겁니다. 그리고 물 속에서 나올 때 부활한 겁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으신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들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왜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까? 주님이 행하신 두 가지 예식이 다 그것을 상징합니다.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이유는 사도들의 증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들이 무엇을 증거하고 무엇을 설교했나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22-24절)

그뿐 아니에요. 고린도전서 2장에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1,2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해야 되죠?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에요. 예수님의 교훈이 아니에요. 나의 헌신이 아니에요. 내가 병 나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입만 열면 십자가, 십자가를 자랑해야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예수 믿었더니 은사 받았다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믿고 부자 되었다고 간증하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입술에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복음적인,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꿰뚫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단어가 너무너무 중요해요. 이 점이 놀라운 점입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까닭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것이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의 우리 주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대의 가장 큰 비극도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착한 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동정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얼마나 부끄러운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오늘날의 사람들을 어떻게 사형시킵니까? 교수형을 시킵니다. 아무리 세대가 이상하게 바뀌었다고 해도 여러분, 그 교수형에 사용하는 올가미를 목에다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는 사람 봤어요?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일이 못돼요.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합니까?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 오늘 교인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하니까 십자가를 포장해서 자랑합니다. 철학적으로 해석합니다. 이상적으로 해석합니다. 여러분, 아닙니다. 십자가는 순수하게,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형틀이었어요. 거기에서 죄인 되신 예수께서 돌아가셨어요. 여러분 우리는 그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1절)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무슨 뜻인지 아세요? "플랭카드에 나타난 것처럼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어찌하여 너희가 십자가를 버리고 다른 예수를 자랑하느냐?"라는 뜻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우리는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왜요?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한 것이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구원의 방편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바로 그 방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도 바울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실 때 바로 그 십자가상에서 이루는 일이 우리를 구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하셨다면 아무도 구원 받을 자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한 사건입니다. 나를 이 세상에서 구원한 사건이에요. 나는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의 운명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운명이 무엇입니까? 욕심부리고 그저 시기하고 질투하며 죄짓다가 마지막날 결국 다 멸망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운명을 따라가야 할 자들인데, 내 공로에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하여 구원받은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날 설교하다가 이렇게 마지막 설교의 결론을 맺습니다. 사도행전 18장 38, 39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러므로" 는 결론이죠.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는 모든 일에도" 이 말씀을 우리 식으로 번역한다면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 무슨 일로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일에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1장 3,4절에서 그는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십자가는 우리더러 자신을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할 어떠한 일을 행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이쯤에서 여러분 가운데 많은 질문이 생기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한단 말입니까? 방법을 모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아주 중요한 질문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언제 그 십자가를 진실로 바라본적이 있으셨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발걸음을 갈보리 언덕으로 옮겨 보십시오. 거기에 회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의 십자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그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누구입니까? 여러분 이것이 문제예요. 왜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라고 얘기하는 겁니까? 그분이 누구시기에...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 누구냐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거기서 일어난 일의 의미를 여러분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분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사도는 그를 우리에게 이렇게 소개해 주십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요. 그분은 분명 사람이셨어요. 다른 두 죄인과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아프다고 신음하셨습니다. 눈물 흘리셨던 분입니다. 배고파 하셨던 분이요, 피곤을 느끼셨던 분입니다. 나이 30세까지 목수일을 했습니다. 30세가 되어서 3년간 전도 일을 하시고, 이 땅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겁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정치적 선동가입니까? 종교적인 천재입니까? 그래서 공부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산상설교를 할 만큼 위대한 천재입니까? 4대 성인의 한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아신다면 여러분은 십자가를 모르십니다. 그분은 주인이십니다. 당신의 주인이라고요.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을 만드신 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 해서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말씀하시고, 그 후 중요한 말씀을 하는데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무슨 얘기죠? "베드로야! 네가 인간적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면 내가 누군지 몰랐을 거야! 너의 실력으로, 너의 지식으로, 너의 철학으로 나를 바라봤다면 결코 그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러나 네가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알게 하셨구나! 그래, 내가 하나님이야!" 만약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십자가위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왜 죽어야 했습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이 땅에 왜 온 줄 아니?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단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섬기려고 했는지 아니?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나는 왔다" 고 하십니다. 무슨 얘기예요? "얘들아! 모든 사람이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죽으러 왔어! 죽으러 왔다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그분이 죽으셔야 했나요?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그 해답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선한 사람, 나쁜 사람, 도덕적인 사람, 부도덕한 사람, 전과자, 전과가 없는 사람, 그것에 대한 차별은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넌센스예요.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국가적으로는 중요한 구분이 될 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하시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전과 7범이라고 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누가 죄인인지 잘 판단하지 못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하게 죄가 없으신 분이에요. 완벽하게 깨끗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 우리 모두는 다 극악한 죄인인 겁니다. 한가지 죄를 범했건, 열 가지 죄를 범했건, 전과가 있든 없든,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덕성이라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샤야는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 64: 6 上)

우리가 의가 하나님 앞에서 비춰보니 더러운 옷 같습니다. 여러분 그 더러운 옷이 무슨 옷인지 아세요? 사람의 고름을 짜내어 닦은, 사람의 몸에서 나온 불순물을 닦은 가제입니다. 썩은 냄새가 가장 많이 나요. 그 쓰레기들을 청소부들이 제일 싫어해요. 자기가 의로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백한 말입니다. '하나님 내 의가 더러운 고름 같은 옷과 같나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용서하실 수 없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죄인이면 용서하면 되지 않습니까?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에요. 죄는 반드시 벌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구약을 읽어보면 종종 발견하게 되는 게 뭡니까? 제사 제도 아닙니까? 모세 오경을 읽다가 출애굽기 후반부와 레위기에 딱 들어가면 성경책을 다 덮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할아버님께 여쭤 봤어요. "할아버님!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좋아하시는 책이 뭐예요?" 할아버님께서 기상 천외의 대답을 하셨어요. "레위기다." 저는 그것을 이해 못했어요. 신학교를 4년이나 다니는 동안에도 도저히 이해를 못했어요. 그러나 이제 제가 조금은 이해합니다.

여러분 제사 제도가 뭡니까? 왜 제사 제도가 필요했나요? 제사란 간단한 거예요. 제사 드릴 사람이 염소를 데리고 옵니다. 양을 데리고 옵니다. 제단 위에 올려놓고 그 제사 드릴 사람이 안수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앞에 나아가서 흰옷을 입고 양의 목을 칼로 확 땁니다. 피가 튑니다. 그런 다음 태워서 그것을 제물로 드려요. 오늘 이 예배 시간에 제가 저기에 양을 묶어 놨다가 밑에 내려가서 칼을 뽑아서, 버둥거리는 양을 부목사님이 한 다리씩 잡고 모가지를 꽉 찔러서 제사를 드리면, 여기에 남아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일을 수백년간, 수천년 동안 해 왔어요. 여러분의 일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집에서 새끼같이, 자식같이 기르던 양을 가지고 와서 죽인단 말이요, 1년에 한번, 아니 예배 때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시키셨어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시키셨어요?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시키셨어요? 양을 데리고 와 안수합니다. 이 양에게 안수하는 의미를 아세요? 내 죄를 양에게 전가시키는 거예요. 내가 안수할 때 나의 죄가 이 양에게 넘어가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 대신 양에게 내 죄를 전가시키고 대제사장이 양의 목을 따서 그를 죽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내 대신 양이 죽은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끗하다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죄를 범하면 또 드려야 돼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어요. 침례 요한은 그가 오신 목적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는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받으실 제물을 공급해 주신 겁니다. 그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갈보리의 산 위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그 자신의 아들의 머리 위에 우리의 죄를 전가하신 다음에 그 아들을 잔인하게 내려치셨습니다.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를 죽이셨습니다. 왜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오는 성경구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뿐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시고 하나님은 잔인하게 자기의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를 죽이시고 나서 하나님은 슬프셔서 해를 가리우셨습니다. 땅이 흔들리도록 하나님은 슬퍼하셨습니다. 그동안에 아들이신 예수님은 무엇을 했나요? 그는 불평했나요? 아닙니다. 기꺼이 이 일을 스스로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이에요.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 1: 4)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습니다.
요 3:16은 무엇이라 얘기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이것이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한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가는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전할 뿐이에요. 저는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설교자로서 여러분 개인을 알아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에 관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죄를 지었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대단치 않은 것일 수도 있고 극악 무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 모르게 감추어둔 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바울이 비시디아와 안디옥에 전했던 그 마지막 말씀은 다름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얻게 하는 이것이니라"입니다. 저는 동일한 설교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십자가를 힘입어 우리의 죄가 사해집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복음이 마음에 와 닿으십니까? 여러분, 마음 깊이 감동이 되십니까?

비시디아와 안디옥에서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얻게 한다는 설교를 한 사도 바울은 행 13: 41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심판이 올 것입니다. 두 종류의 추수꾼의 일이 우리에게도 찾아 올 것입니다. 이 땅에서 당신은 무엇을 자랑하나요? 당신의 마음 속에 진정 십자가만을 자랑하십니까? 내가 전세방에 살아도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고 내 몸이 병들어도 십자가 때문에 참으로 평안하고 ,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영생을 위해, 성령을 위해 심는자입니다. 다른 무엇이 있다면 우리는 망할 것입니다. 그날 에 우리는 놀랄 것입니다.

한 가지로 여러분을 시험하길 원합니다. 오늘 이 복음의 말씀이 마음에 감동이 되었거든 수요 예배에 나오십시오. 저는 요즘 수요 예배때 "그리스도론"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다른 수요 예배에 안 나오셔도 좋아요. 그러나 이 4개월동안은 시간을 내십시오. 지난 수요일에 약 260여 명의 성도들이 나왔어요. 저희 교회에 나오면서 한 번도 수요 예배에 나오지 않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시험한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위해 십자가를 더 알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여! 우리에게 이 십자가에 대해 설교해 주시오.' 여러분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 나아와 주님을 배우십시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되는 귀한 말씀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시를 읽어드리길 원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찰스 웨슬레가 우리에게 남긴 시입니다.

주여 내 재능과 은사와 은혜 모두다 당신께 드리나이다
오직 주의 말씀 전하며 주의 영광만 바라며 살게 하소서
나의 모든 성결한 삶은 죄인된 친구를 변화시키는 데 쓰이게 하소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내 마음 넓게 해 주신 그것으로 불꽃이 일어 가득차게 하소서
내 있는 힘 다 기울여 당신의 열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당신의 문으로 인도하겠나이다
목자되신 주님이 위하여 죽으신 양들을 위해
산을 옮길 수 있고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는 믿음을 제게 주소서
주의 집을 다시 짓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기도의 열망이 넘치는 사랑을 제게 주소서
주의 사랑을 내 마음에 부으사 대속량받은 영혼이 사로잡히게 하소서
귀한 시간 내어 나는 이 목적만을 위해 살고 싶어요
아직 내 구주 모르는 자들을 위해 그 모든 시간도 쓰고 싶어요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은 그것이라고 생각해요
주의 사랑만 십자가만 전파하고 전파하리라

이 찰스 웨슬레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십시오.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갈보리 산위에 여러분의 발걸음을 옮겨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심고 있나요? 영생할 것을 거둘 자신이 있습니까? 세상에 대해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참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자는 세상과 나와의 관계가 정리되어야 합니다. 입으로 십자가를 외치고 세상의 것이 정리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해 주세요. 세상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해 주세요.
오!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 앞에 겸허히 내 영혼을 드립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도와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행한 이 침례식이, 이 자리에 참석해서 드리는 우리의 모든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되지 말게 하시고 남은 생애동안 십자가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들 되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출처/박정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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