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 (행28:12-31)
23저희가 일자(日字)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頑惡)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29절(없음)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여러분! 그리스도인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믿음일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이런 질문을 해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내 노력과 내 수고와 내 의지로 되었나요? 아니죠.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2장 8, 9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수많은 논쟁을 다 하고 나서 로마서에서 이런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
아무리 성경 말씀을 살펴봐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그는 결론 짓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아멘.
그리고 또 한가지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대답이 각기 다르지만, 성경은 오직 한가지 대답을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그러면 나머지 생활은 무엇으로 하는가? 믿음으로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어떻게 자신이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며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하였기에 승리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살고 보는 바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왜 고난당했습니까? 믿음의 부족 때문이었어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데, 왜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나요? 그들의 행위가 아닌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나요? 믿음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나요? 그의 믿음때문이었어요. 어떻게 여호수아가 손 하나 대지 않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나요? 믿음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장 강조한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할 때 혹독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냥 지나친 적이 없어요.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너희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이 탁월한 사람은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칭찬해 주셨어요.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강조하셨나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백부장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예수님을 잘 믿는 유대인도 아니었어요. 성경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실 때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하가 병들었어요. 그러자, 그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궁여지책으로 의사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 신하의 병은 위독해졌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믿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옛날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예수님, 제 신하를 고쳐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보따리를 싸 가지고 그 백부장의 집으로 내려가려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백부장이 놀라운 얘기를 해요. "예수님! 우리 집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심을 저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저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저도 많은 부하를 데리고 있는데 시키는 대로합디다. 제가 이것을 시키면 이것을 하고 저리로 가라고 하면 저리로 갑니다. 예수님! 당신은 만왕의 왕이 아니십니까? 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신하가 낫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나았다. 돌아가라!" 그리고 나서 너무 너무 놀라워하시면서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고 칭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을 계발하시기 바랍니다. 보는 것으로 살아서는 아무 것도 안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에요.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이 다 사실인데 그래도 한가지 질문이 더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믿음으로 사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믿음이 중요한데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오늘 성경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믿음을 확인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내가 믿음으로 사는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아는 방법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의 사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바람이 불죠? 여러분 눈에 바람이 보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혹시 바람이 눈에 보이시면 빨리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셔야 됩니다. 아주 심각한 거예요. 바람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옛날의 어른들은 동네 개들이 바람을 본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바람만 불면 개들이 막 펄쩍펄쩍 뛰니까 개들은 바람을 보는가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수의사한테 물어봤더니, 수의사도 잘 모르더라구요. 그런데 자세히 알아보니 그런 일은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개 눈이라고 해도 바람이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바람이 있는 것은 다 압니다. 바람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향긋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 내 머리카락이 날립니다. 시원하죠. 우리는 얼마 전만 해도 태풍을 겪었습니다. 배가 뒤집히고, 가로수가 넘어지고, 곡식이 다 쓰러졌어요.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분명히 있음을 우리는 느끼고 압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믿음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으로 사는가 아닌가를 눈으로 알 수는 없어요. 그러나 성경은 얘기합니다. 우리가 바람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내가 사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요. 왜냐하면,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삶에 독특한 모습과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으로 살았던 사도 바울의 인생을 사도행전에 마지막으로 요약해 주시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모습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사는가 아닌가를 알고 싶으십니까?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난 믿음으로 사는 자의 삶의 특징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X-ray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영혼을 진단해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
먼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어떤 삶의 모습이 나타나는가? 첫 번째, 믿음으로 사는 자는 위기를 기회로 삼습니다. 인생에 위기가 안 다가오는 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살면 아무런 위기가 없다.' 여러분,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에요.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몰라요. 기도하면 사고 안 당하고, 기도하면 위기가 안 온다고 설교합니다. 여러분 그것들은 잘못된 거예요.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기도하던 사람들이, 위기를 당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참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어떤 삶의 모습이 있는가? 그는 삶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줄 믿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듭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도 바울은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얘기로 이 말씀을 읽어보세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로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이 로마에 사도 바울 개인적으로, 혼자 원해서 온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몇 번이나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여! 내가 로마에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노심초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오직 복음으로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로마가 어떤 곳입니까?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입니다. 오늘날에는 인구 1000만 그래도 별로 놀라지 않지만, 이 당시에 인구가 약 2000만 정도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에 로마에만 100만 명이 모여 살았어요. 여러분 로마에 모든 길이 통해 있었어요. 로마에 복음을 전하면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오면서 말할 수 없는 감격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장 거리에 나가, 공연장에 나가, 거리에 나가,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하며, 할렐루야를 외치며 로마에 입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게 웬일입니까? 로마에선 감옥이 여전히 사도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로마에 오긴 왔는데 사도 바울은 시장에 나갈 수도 없었고, 거리에 나갈 수도 없었고, 회당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갇혀 있는 죄수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위기가 언제 다가오는지 아세요? 희망이 사라질 때예요.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이 있으면 괜찮아요.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당한 고난 속에서 한 가지 희망을 가지고 참아 왔어요. 그 희망이 무엇입니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지금까지 버텨왔어요. 그런데 로마에 와 보니 여전히 죄수의 몸이에요. 여러분 이 사도 바울의 위기를 짐작이나 해 볼 수 있겠습니까? 그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이후 수많은 재판을 받았고, 판결도 없이 가아사랴 감옥에서 2년 6개월을 감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로마에 오면서 배가 파선되어 죽을 뻔하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고생고생 끝에 겨우 로마에 도착했어요. "자! 이제 로마에 와서 이 인구 100만이나 되는 도시를 내가 복음화시켜야 되겠다! 저 중심지에 가면 10만 명이 들어가는 원형 경기장이 있다는데 내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라는 기대에 부풀어 왔는데, 그는 여전히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이제 실망할 만하지 않습니까? 이쯤 되면 포기할 만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쯤 되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말이라도 한 번 할 법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 같으면 이렇게 했을 것 같아요. 감옥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서 "하나님! 마음대로 하이소! 난 이제 모르겠습니다!" 하며 실망해서 드러누웠을 것 같아요. 아, 그런데 이 본문을 읽으면서 사도 바울의 삶이 저에게 얼마나 도전이 되었던지요. 제 가슴을 얼마나 쳤는지 모릅니다. 저 같으면 "하나님 이런 환경이라면 목회를 못하겠습니다!" 고 말씀드리고 그만 두었을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 어디에도 원망의 말이나 실망의 흔적이 없습니다. 우리 17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 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여러분 형제들아!' 여러분, 실망하는 대신 그는 이전과 똑같이 일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서도 무엇인가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었던 거예요.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모든 환경이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내 질병, 내 자녀의 탈선, 내 사업의 흔들림, 형제가 준 내 마음의 상처와 이 모든 마음의 갈등조차도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그것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기회! 여러분,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형제들에 의해서 팔려갔습니다. 얼마나 좌절했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존경하며, 그렇게 사랑했던 형들 아홉 명, 그들 중 단 한 명의 반대없이 그를 애굽의 종으로 팔았어요. 그 중에 몇 형들은 그를 죽이자고, 요셉이 보는 앞에서 주장했어요. 그래서 그는 언어도 모르는 보디발의 집에 팔려 왔습니다. 우리 같으면 낙담했을 거예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 보디발 장군 집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아! 이제는 고생 끝에 뭔가 이루어지나 보다" 하는 순간, 그는 모함을 받아 다시 감옥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감옥에서 얼마나 좌절했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고생하다가 겨우 보디발 장군 집에 총리가 됐는데 감옥이라뇨?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 감옥에서 요셉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허송세월 하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서 기회를 다시 재창출한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 감옥은 특별했거든요. 일반죄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애굽 왕궁의 신하들을 가두는 감옥이었어요. 신하가 잘못할 때 가서 6개월형을 살게 하고 벌칙으로 어떤 신하는 죽이고, 어떤 신하는 살려서 복직시켜 주기도 하는, 골치 아픈 애굽 신하들을 가두는 감옥에서 요셉은 드디어 감옥의 총무가 됩니다. 그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그는 애굽 나라를 능수 능란하게 다스리는 훌륭한 총리가 된 줄 믿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요셉이 감옥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그 감옥에서 애굽 왕궁에 있는 대신들을 다루는 총무 역할을 해 보지 않았다면, 그가 바로 총리의 역할을 맡았다고 해도 그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믿었어요. "선하신 하나님!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위기가 올 때마다, 그 곳에서 허송세월하며 불평하고 좌절하고 원망하며 자기의 인생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거리에도, 시장에도 나갈 수 없었고, 회당에 가서 전도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 가운데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어요. 사도 바울이 갇힌 감옥은 상당히 특이했습니다. 그는 자기 사비로 전세를 내어 밖에 가 살 수 있는 특권이 있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여러분, 배가 파선했을 때 백부장과 로마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얼마나 존경했습니까? "아! 저분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다 죽었구나!" 사도 바울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아 왔잖아요. 그러니까 이 로마의 정예부대와 백부장이 로마 정부에 얼마나 많은 탄원서를 넣었겠어요? 장관에게도 탄원서를 써서 "이 사람은 위험한 죄수가 아닙니다. 그러니 재판 받기 전까지 특대우를 좀 해 주십시오!" 그래서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 특대우라는 것이, 감옥에 갇히긴 갇혔는데, 자기 돈으로 28평 아파트를 딱 사놓고 거기에서 지내는 거예요. 자기가 그 아파트 바깥을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만, 수많은 사람들 중에,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누구든지 만날 수 있도록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오늘 17절에 보니까, 수많은 유대인들을 초청해 놓고 자기의 집에서 또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마도 시간의 제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침 9시에서 5시정도. 낮에는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5시 이후에는 무엇을 합니까? 28평 아파트에서 친위대 1명과 서로 째려보며 눈싸움을 하겠습니까? TV가 있었나요? 너무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옥중 서신을 연구해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읽다가 한 가지 기가 막힌 것을 발견했어요. 사도 바울의 전체 서신서 가르침 가운데 가장 놀라운 가르침이 에베소서 6장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얘기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 에베소서 6장을 보면 우리는 로마 군병의 복장을 보지 않아도 환하고 알 수 있어요. 로마의 친위대가 투구를 쓰고, 방패를 차고, 칼을 차고 자신을 지킵니다. 그 밤에 사도 바울은 그 위기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기보다, 하나님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로마 군병의 복장이 들어 왔어요. 그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탄의 공격에 승리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며 세상을 살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교인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가운데, 어느 날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그 복장이 들어왔어요. "앗! 바로 저거다! 우리에게 구원의 투구가 필요하구나! 우리에게 믿음의 방패가 필요하겠구나!" 너무나 에베소 교인들이 흠모해오던 로마 군병들의 제복을 통해 그는 믿음의 놀라운 진리 에베소 6장을 썼던 것입니다. 6장만 썼나요? 그는 바로 이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서 전체를 기록했습니다.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서신서를 무슨 서신이라 부르죠? 감옥에서 썼다고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사도 바울이 자유의 몸이 되어 로마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아침에 전도하고, 저녁에도 전도하고, 밤에도 전도하고, 사람들만 만나다가 다 전도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고 칩시다. 그렇게 했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없습니까?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신약성경에 없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서신서를 읽고 위로 받고 구원받았습니까? 감옥에서 그는 외로웠습니다. 낮에는 사람을 제한적이지만 만날 수 있었지만 밤에는 너무 너무 답답했습니다. 저 같으면 좀 짜증을 내고 "아!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라는 원망의 마음이 들어갔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그 감옥에서의 위기, 그 밤의 위기조차 기회로 삼은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음으로 사는가 아닌가를 진단하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아시길 원한다면 이런 질문을 해 보십시오. 내 인생에 수많은 위기가 찾아왔을 때- 육신 적인 위기, 영적인 위기, 교회적인 위기, 내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나는 과연 과거의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 곳에서 허송세월 했는가?
앞으로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모든 환경을 하나님의 기회로 삼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세월을 허송하지 않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듭니다.
2.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자
두 번째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믿음의 사람의 삶의 모습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중요한 단어는 있는 곳에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로마 감옥 생활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 특징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가 감옥에서 복음 전하기 위해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23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일자(日字)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여기 구절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자기가 우거하는 집에' 라는 구절이 나오죠. 이미 설명을 드렸던 내용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라는 단어는, 그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9시부터 5시까지만 면회가 허용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와요. 23절을 다시 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단어가 나오는데 저희가 무엇을 정했다고 나옵니까? '일자'를 정했다고 해요. 요즘말로 쉽게 얘기하면 스케줄을 정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9시에 오시오","당신하고 그 지방 15명은 10시 반에 오시오", "당신은 12시에 와서 도시락을 좀 싸 오시오, 나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소?" 라고 정해주었을 것 같아요. "당신은 2시에 오시오, 5시에 오시오." 사도 바울이 자포자기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 감옥이라는 곳이에요. 집안에서 비록 조금의 자유는 있었지만, 감옥이나 집안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처음에는 감옥에 있다가 집안에 들어오면 좋은 것 같지만, 28평 아파트에서 밖에 못나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좌절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원망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처한 환경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면회가 가능하다, 됐다!" 스케줄을 짜는 겁니다. 저도 목회자이기 때문에 심방을 하거든요. 때때로 안 믿는 사람들 찾아가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 가운데 제가 5주 공부를 찾아가서 공부 한 분들도 있어요. 그 때가 참 좋았죠? 지금은 제가 어떻게 찾아가요? 오는 사람도 다 못 가르치는데... 그런데 심방을 가보면 하루에 세 집, 네 집도 못 가요. 부산시내가 얼마나 막혀요? 차 타고 가는데 한 시간, 오는데 한 시간, 가서 좀 가르치려고 하면 전화 오지요, 벨 누르지요, 얼마나 많은 방해를 받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 보세요. 감옥에 앉아 있어요. 그 감옥에는 로마 군병이 있어서 다른 사람은 못 들어 와요. 그런데 사람들이 면회를 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시간하나 낭비하지 아니하고 9시부터 5시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가르친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의 축복이에요. 놀라운 비결이에요. 있는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한 겁니다. 바울은 면회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23절에 보면 세 가지를 했다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강론이요, 두 번째는 증거요, 마지막에는 권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 단어가 다 달라요. 강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쭈욱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는 우리 나라 말로 증거라고 했습니다만 조금 부적절한 번역입니다. 살살 설명한 게 아니라, 어떨 때는 탁상을 치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그 친위대가 끄덕끄덕 졸면서 옆에 있는데 꽝하고 치니까 놀라서 깰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선포했습니다. "나도 이렇게 사는데, 당신들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소?" 하고 외친 거예요. 그 다음에 권했다는 것은 생활을 터치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권면했습니다. "이집사님! 남편으로서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당신만 피곤합니까? 직장 갔다 돌아와서 가끔 물걸레질도 해 주십시오." 아멘. "설거지도 해 주십시오. 이게 사랑의 표시 아닙니까?"라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권면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감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했더니 그 반응과 결과가 어땠습니까? 24절 다같이 읽습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제가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한 가지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이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이것을 특별한 시제로 표현을 했더라구요. "부정과거"라고 하는 특별한 시제.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이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안 믿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예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안 믿겠다는 데 찾아가서 전도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설교 들으러 자원해서 와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다 듣고는 계속해서 안 믿는 거예요. 그런데 계속해서 오기는 와요. 그런데 믿지는 않는 거에요. 여러분 이쯤 되면 화가 날 법도 하죠. 우리가 전도해보면, 마지막 전도를 했는데, 안 믿는다고 해요. 빤들빤들해요. 그러면 나오면서 '확~ 지옥이나 가버려라!' 이런 말은 못하지만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제가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우리 목회자들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이 한가지가 있는데, 설교할 때 교인들 가운데 조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그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제 눈에는 우리 교회에서 조는 사람이 하나도 안 보여요. 할렐루야! 저는 그 사람 안쳐다 봅니다.
왜냐하면 조는 사람을 쳐다보면 설교가 나중에 딴 곳으로 가 버려요. 자꾸 그 사람 깨우려고 강대상을 치게 됩니다. 나중에 몇 번 치다가 안 깨잖아요. 그럼 신경질이 나요. 그래서 설교가 그냥 때리는 설교를 한단 말이에요. 저도 그런 경험 해 봤어요. 예배시간에 조는 것 보다 더 나쁜 게 장난치는 것이에요. 자기만 낙서하면 괜찮은데 옆에 있는 사람, 잘 듣는 사람 쑤셔 가지고 적은 것 보라고 해요. 그런 모든 행동이 눈에 다 들어와요, 사실 여기 앉으면. 안경 약간 내려쓴 것까지 다 들어와요. 그걸 쳐다보기 시작하면 설교 못해요.
사도 바울이 찾아 간 것도 아니고 자기가 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계속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낙심되는 일입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30절 보세요.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다 영접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한 일주일 한 달 전에는 "나 안 믿어"라고 말하면 "넌 오지마!" 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모두 영접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면회라고 해서 아무나 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면회 가보셨는지 모르지만 면회 가면, 만날 것인지 말 것인지 죄수에게 결정권이 있어요. 죄수가 안 만난다고 하면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 에요. 사도 바울에게 권한이 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 영접했어요. 그리고 31절에 보면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 사람만 봐요. 아! 우리 영안 교회에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집사님들이 얼마나 많아요? 정말 믿음이 탁월하고 헌신된 사람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와서 안 좋은 사람만 보는 거예요. "어느 집사는 예배시간에 졸더라"하며 실망해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것만 보는 거예요. 여러분 그쪽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조는 사람이 있어도, 제가 설교 안 하는 것 봤습니까? 계속해서 이렇게 힘차게 설교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이러한 자세가 중요해요.
여러분, 제가 어떤 사람에게 목자 일을 맡깁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대로 다 잘되면 누가 못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마음 문을 열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도 목자 일을 맡기면 한 두 달, 1년하고 와서 "목사님! 못하겠습니다." 하고 사표를 던집니다. "왜요?" 라고 물으면 "아이고 목사님! 얼마나 빤들거리는지요?" 여러분, 빤돌이가 여러분의 목장에 있어도 목자 일은 계속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장난치는 애가 그대로 교실에 있어도, 교사는 말씀을 가르쳐야 돼요. 계속 전도해도 믿지 않는 친척들이 있어도,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계속 가르쳐야 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여러분, 이런 모든 것을 알고 전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앉아 있어도, 전해도 빤질거리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목장에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말 믿음이 있는 자라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의 특징입니다. 두 가지 특징을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위기를 기회로 삼습니다. 두 번째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본문이 보여주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특징은 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에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만사 형통합니다. 아멘.
3. 믿음으로 사는 자는 만사 형통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고 허송세월하지 않았어요. 있는 그 곳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옥중서신서에 보면, 그 결과들이 나타나요. 우리 모두 한 군데를 읽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22절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사람 중 몇이니라
'가이사 집사람 중 몇이니라' 자! 지금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데 누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가이사 집사람 중에 몇 명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씀합니다. 가이사 집이 어떤 집입니까? 여러분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제대로 번역하면 '시저'입니다. 황제예요. 로마의 황제! '바로'는 애굽 황제의 명칭입니다. "야! 이놈의 바로는 아브라함 때 살더니, 야곱 때도 살고 죽지도 않나?"라고 말하는데 '바로'가 이름이 아닙니다. '파라오' 라는 뜻이에요. '가이사'도 마찬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종대왕'할 때 그 '대왕'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왜 로마를 다스리는 가이사 황제의 집안 가운데 몇 사람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문안을 전해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빌립보서를 쭉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제가 조금 전에 설명 드린 것과 내용이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긴 했는데 좀 특별한 감옥이에요. 셋집에서 자기가 돈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를 지킵니까? 로마의 친위대가 지키고 있었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청와대의 경호실 요원들이 그를 지킵니다. 하루 3교대로, 한 명씩 돌아가며 지켜요. 문밖에 한 명, 집안에 한 명 들어왔던 것 같아요. 아! 그래서 집안에서 하루 8시간 사도 바울과 같이 있어요. 낮에는 복음 전하는 것을 다 듣습니다.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좋은 사람이라 고 하니까, 호감을 좀 가졌을 것 아니에요? 배가 부서졌는데 살았다는 소문이 쫘악 돌았을 것 아닙니까? 얼마나 호기심이 생기겠어요? 목에 힘을 주는 척 하지만 귀는 사도 바울의 말에 가 있습니다. 하루 8시간씩 듣습니다. 궁금하겠죠? 그 다음날 밤에 교대해 와서 질문을 합니다. 1:1 과외공부 안 했겠어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 지, 260년만에 기독교가 로마 국가의 국교가 되었어요. 여러분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네로가 로마 기독교인들을 다 죽였는데 그로부터 260년이 지나지 않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어요.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는지 아세요? 사도 바울이 가이사 집안을 복음화시켰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이 자유의 몸이 되어서 시장에 나가,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면, 아마 그 당시에 몇 만명을 복음화 시켰는지 몰라요. 그러나 로마 국가는 복음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로마 전체가 국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만사 형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이사 집안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었어요.
여러분 이런 생각도 한 번 해 보세요. 만약에 사도 바울이 자유의 몸이 되어서 로마 시장에 나가서 "예수 믿으시오!" 하고 설교했다면, 제 생각에는 아마도 한 달도 살지 못하고 순교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를 죽이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결심한 유대 청년들이 40여명이나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갇혔던 로마 감옥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저는 그곳을 오늘날의 청와대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누가 지키고 있습니까?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이 지켜요. 아무나 들여보내 주나요? 아니요. "저 박갑돌이가 왔는데 사도 바울씨 들여보낼까요?" , "응, 들여보내시오."하면 만날 수 있어요. "김덕이가 왔는데" "아! 나 모르는 사람이니까 잠깐 신분을 확인해 보시오."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몸수색, X-ray 검사 다 해서 무기가 없는지 확인해 보고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 그러나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다 지명해서 만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청와대가 아닙니까? 청와대를 방문해 보세요. 여러분이 간다고 해서 다 만나 줍니까? DJ께서 허가를 해 주셔야 됩니다. "아, 박정근이가 찾아왔습니다." 라고 했을 때,대통령께서 "들어와!"라고 하셔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입장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안전한 곳에서 그는 로마를 완벽하게 복음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시 30절을 보십시오. 28장 30절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할렐루야! 만사형통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예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만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기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항상 만사형통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을 읽고 오늘 제 말씀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다 아는 말씀이지만 다같이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곧 하루하루 믿음으로 나의 삶을 주님 앞에 살기로 작정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이에요. 믿으십니까?
오늘 한 찬송가 작자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여러분 오늘 이 찬송가 가사를 지은이가 장님인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페니 J 크로스비' 장님이 무슨 만사형통하겠어요? 그러나 그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내가 장님이 된 것도 만사형통 하리라." 할렐루야!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 찬양을 주님 앞에 드리십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을 못 보는 장님, 그가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당신은 믿음으로 오늘을 사셨습니까?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아 오셨습니까? 영안 교우 여러분! 우리 믿음으로 사십시다
출처/박정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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