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본문 마5:13-16)
제가 아는 어느 식당은 건물이 무척이나 허름합니다.
요사이 같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들이 많은 세상에서 너무나 초라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름한 식당은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입니까? 그 집 음식이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영양가가 있어야 하고, 보기도 좋아야 하지만 역시 맛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 라면 광고 가운데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광고를 기억하십니까?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은 성공적인 광고였습니다.
청보라는 회사에서 새롭게 라면을 만들었습니다. 회사의 운명은 광고에 있다고 생각하여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한 사람을 광고 모델로 사용하기로 하고 섭외를 하였습니다.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하여도 어떻게 자신이 출연한 경쟁 회사의 광고에 또 출연할 수 있겠습니까?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청보회사에서는 아침부터 문에 지키고 섰다가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광고에 출연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결국 청보는 그를 광고에 출연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역시 생각대로 광고는 대 히트를 쳤습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청보 회사의 라면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광고에서는 성공을 하였는데 맛이 따라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맛이 없다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식당이라고 해도, 광고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의 맛을 내는데는 양념이 중요합니다. 양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소금입니다.
너무 싱거우면 음식의 맛이 없습니다. 너무 짜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음식의 맛을 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소금이기 때문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소금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병사들의 월급을 귀한 소금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월급이 소금이라는 로마의 단어 샐러리가 되었고, 월급쟁이를 샐러리맨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소금은 참으로 요긴한 것입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물이 쉽게 상합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고기를 오래도록 보관하는 방법은 소금에 절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몸에도 소금이 필요합니다. 병원에 입원을 하면 링겔을 맞게 되는데 식염수라고 합니다. 소금이 녹아 있는 물입니다. 우리 몸에 소금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처럼 맛을 내야하고, 소금처럼 세상이 썩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하여야 하고, 소금처럼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까지 주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8복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재물이 많은 것,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높은 학식과 지식이 있는 것, 건강한 것,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이것이 참복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복이긴 하지만 잠깐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함께 다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요, 썩어질 세상의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정한 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썩어질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고, 신령한 것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바로 이 신령한 은혜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의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신령한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8복의 말씀 뒤에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아라, 빛으로 살아라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는 사명도 함께 받은 것입니다.
귀하고 신령한 하늘의 복을 입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책임과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을 잃어버린 소금,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을 보셨습니까?
이스라엘 나라에 가면 사해가 있습니다. 얼마나 짠지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소금이 너무 많이 녹아 있어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둥둥 떠다닙니다. 그래서 누워 신문을 보기도 합니다.
그 주변에는 소금 바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소금을 염전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얻습니다만 그곳에서는 광산에서 석탄을 채취하듯이 소금 광산에서 소금을 생산합니다.
맷돌과 같이 구멍이 송송 똟린 돌에 소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돌을 가져다가 물에 담그면 소금이 녹아 내립니다. 이렇게 하여 음식물의 간을 맞추기도 하였습니다.
물에 넣을 때마다 소금이 녹아 내리는데 오래도록 반복하다보면 소금이 다 녹아 내려서 더 이상 녹아 내릴 소금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인 것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밖에 내다 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짖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소금입니다.
세상에서 맛을 내야 합니다. 죄악이 깊어져 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방부제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은 대통령의 자리입니다.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가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다음에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얼마나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지 모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독재자란 오명을 쓰고 있고
최규하 대통령은 무능한 대통령이고
전두환이나 노태우나 독재자요 부정과 비리에 깊게 관여한 대통령이고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 파탄을 이룬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아칸소주 출신입니다.
아칸소주는 미국에서 촌뜨기 취급을 받는답니다. 아칸소 출신 가운데 크게 된 사람이 별로 없답니다. 그런데 클린턴은 아칸소 출신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클린턴은 아칸소 사람들의 영웅입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아칸소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클린턴은 고향에 가서 변호사 일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폴라 존스라는 여자와 스캔들이 터져 나오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진술을 번복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정치인이 이렇게 다른 말하는 것을 그러려니 하고 말한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아칸소 대법원에서는 클린턴의 변호사 자격증을 박탈하려 한답니다. "위증한 것은 변호사 윤리로서 어긋나는 부정행위"라는 것입니다."(2000.9.1동아일보)
개방적인 서구 사람들에게 남녀 스캔들은 다반사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터지면 누구나 다 아니라고 말합니다. 말 한 마디 바꾼 것이 그렇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변론하여야 하는 변호사로서는 윤리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밥공기에 담겨 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흰쌀밥은 얼마나 맛있고 귀하게 보입니까?
그러나 밥공기에 담겼다가 입으로 들어가야 할 밥풀이 뺨에 붙거나, 옷에 붙어 있으면 그렇게 추할 수가 없습니다. 역겹기까지 합니다.
귀한 자리에는 귀한 자리에 걸 맞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귀하고 소중한 자리에 걸 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 한다면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지만
귀하고 소중한 자리에 합당하지 못하면 이 보다 더 추하고 역겨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차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영광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렇게 귀한 직분을 맡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맛나게 하고, 세상이 썩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하고,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맛 잃은 소금이 되면 이보다 더 추한 것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습니다.
건너 마을 박씨가 바람이 나서 딴 살림을 차렸대 하고 말하면, 그 사람이 그랬어 하고 말합니다.
건너 마을 이씨가 사기를 쳤대 하고 말하면, 그 사람이 그랬구만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바람을 피웠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목에 힘을 주고 "목-사가 그랬다고?" 하고 말합니다.
장로나 집사가 사기를 쳤다면, "교회 장로가 그랬단 말이야? 교회 집사가 그랬단 말이야? 예수 믿은 것들은 다 위선자들이야!"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에이즈가 외항선원이나, 동성연애자, 사창가를 통하여 퍼져 나갔습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요사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빠르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남편이 부인에게 에이즈에 걸렸다고 실토하였습니다. 출장 중에 있었던 부적절한 관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부인이 즉시 가서 검사를 하였습니다. 부인도 에이즈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이 기사를 읽으며 운이 없다, 안됐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장로가 부적절한 관계로 에이즈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장로가 그랬냐고 흥분할 것입니다.
만약에 목사가 부적절한 관계로 에이즈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해외 토픽감입니다.
부적절한 관계를 실토한 장로 때문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까?
한 나라의 장관이 되어 가지고, 교회의 장로가 되어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다 그렇고 그렇게 살지만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면 이보다 더 추하고 이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복음의 말씀을 따라 의롭고, 정직하고, 진실하고, 사랑하며 섬기며 산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부흥하였습니다. 힘있는 교회, 권세 있는 교회, 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기 보다 세상의 권력을 붙잡고, 세상의 썩어질 재물을 붙잡고 산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과 섬김은 없었고, 세상의 잡배들과 다름없이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처럼 교회가 추하고 악취가 날 때가 없었습니다.
이때처럼 교회가 힘이 없었을 때가 없었습니다.
이때처럼 교회가 무기력할 때가 없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있는 교회, 권세 있는 교회, 능력 있는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철저한 윤리와 도덕성에 바탕을 두고
섬김과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힘있는 그리스도인,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밖에 버려집니다. 사람들에게 짓밟힙니다.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맛을 내며 살아야 하는 우리가 맛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버려질 뿐 아니라 짓밟힐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도 욕이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포도로 심으셨는데 이스라엘은 들 포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참 감람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참 감람나무를 심었는데 돌 감람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내가 참 포도를 심었는데 들 포도가 맺힘은 어쩜인가? 내가 포도원을 다 헐어 버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 망하였습니다. 짓밟혔습니다.
맛 잃은 소금이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짓밟힌다는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1천만 성도를 자랑합니다.
25%가 기도교인입니다.
이 정도의 비율이면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숫자입니다.
국민의 25%가 도덕적 윤리적 기초 위에서 부정과 불의를 배격하게 되면 이 사회는 정직한 사회, 진실한 사회가 됩니다. 정직한 국가, 진실된 국가가 됩니다.
클린턴처럼 말을 바꾸는 사람,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이 사회에서 발을 붙이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소금으로 세상을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라는 우리조차 맛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데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우리 자신부터 부족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세상의 소금은커녕 시장의 잡배들과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세상을 변화시길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의 순수함과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처음 가졌던 진실함과 정직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들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그릇된 교훈을 받아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들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거짓 선지자를 받아들여 거짓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들었습니다.
사대교회는 죽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몇 명의 흰옷을 입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죄로 옷을 더럽혔습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합당치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습니다. 전혀 맛을 내지 못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맛 잃은 소금이 밖에 버려지는 것처럼 토하여 내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 맛도 없는 그냥 그런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는 미지근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맛나게 하는 신앙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인
철저한 윤리적, 도덕적 기초 위에서 죄악이 점점 깊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지켜 나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말씀하실 뿐 아니라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이기 때문에 바닥에 두어서는 안되고 높은 등잔 위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빛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빛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입니다. 선행을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하며, 영원한 저주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을 구원하여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행을 입은 우리들도 선행을 행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다비다라는 여인이 욥바에 살고 있었는데 병들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우들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한 일이 심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면서 이 옷을 다비다가 지어 주었다고 말하며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다비다 때문에 전도가 되었고, 교회가 흥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자 다비다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비다를 다시 살려 주신 것입니다.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한 다비다를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다비다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하늘에서 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부흥되는 교회에는 다비다가 있습니다.
구제와 선행을 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처럼 세상에서 빛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착한 행실이 널리 퍼졌고, 그들의 착한 행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월산교회의 다비다가 되십시오!
소금과 빛으로 사십시오.
세상을 맛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세상을 밝게 하는 삶을 사십시오.
구제와 선행을 베풀며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복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풍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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