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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교회 (改革派敎會 Reformed Church)

by 【고동엽】 2021. 11. 18.

개혁파교회 (改革派敎會 Reformed Church)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에서 루터파에 대하여 칼뱅파(캘빈파)교회를 가리키는 호칭.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敎會)의 총칭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스위스와 남부독일의 여러 도시는 루터주의와 좀 성격을 달리하는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이것이 개혁파의 원류(源流)이다. 이 개혁파는 뒤이어 J. 칼뱅과 J.H. 불링거에 의해서 주로 제네바를 거점으로 하여 통합되었고, 1550년대에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독일·폴란드 남부·헝가리에 침투하였다.

 

12세기초 P. 왈도의 사상을 이어받은 북부 이탈리아의 왈도파는 1532년부터 개혁파의 한 파에 가입하였다. 정식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된 교회>이나 <개혁된 교회>라고 줄여 개혁파 교회라고 말한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J. 녹스)에 기원을 두는 교회는 <장로파 교회>라고 불리지만, 신앙내용과 교회제도는 개혁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장로와 목사의 회의가 지도권을 가지므로 한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다.

 

초기의 지도자가 모두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이고, 또한 이 파의 지반(地盤)이 모두 서구였기 때문에, 서구의 지적(知的) 합리주의와 대결·절충을 거듭하여 서구적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특색으로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교리, 교회의 질서와 규율,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립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교회의 자립의 침해에 대해서는 맞서는 경향이 있다.

 

신학을 대표하는 것은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綱要)》이며, K. 발트의 위치도 근래에 와서 비중이 커졌다. 루터파와는 16세기 이래 <성찬론(聖餐論)>과 그 밖의 것을 둘러싸고 논쟁과 대화를 계속했지만 기풍은 크게 다르다.

1877년 <개혁파 세계연맹>을 조직하고, 1970년에는 회중파(會衆派, 또는 組合派) 세계연맹을 병합하였다. 산하의 교회인구는 4900만명에 달하며, 한국에는 100만명 정도의 신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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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파교회 (會衆派敎會 Congregational Church)


영국 청교도주의에서 파생하여 발달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하나. 조합파 교회 또는 독립파·분리파라고도 한다. 각 교회의 독립자치의 원칙에 입각, 교회 상호간 교류를 존중하지만 각교회에 대한 위로부터 지배를 부정하고, 국가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왕조의 R. 브라운·H. 바로 등의 분리파 개혁운동에 기원을 둔 것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교회개혁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국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집회를 가짐으로써 기운이 조성되었다. 뒤에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로 피하고 일부는 미국에 이주하였으며 청교도혁명을 거쳐 하나의 교파로 발전하였다. 즉 미국 식민지시대의 초기 퓨리턴·필그림 파더스나 매사추세츠에 상륙한 사람들의 교파로서, 뉴잉글랜드의 지배적인 교회가 되어 미국 정치·사회의 사상이나 제도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퓨리턴 신권정치(神權政治)의 핵심으로서 신학교육뿐 아니라 일반교육에도 관심이 깊어 하버드·예일·스미스·아머스트·오베린 등 여러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남북전쟁 후 남부에 흑인들을 위한 대학을 세웠다.

 

19세기에 이르러 외국전도와 교육에 주력하여 1810년 <아메리칸 보드>라는 외국 선교단체를 설립, 인도·중국·일본 등지에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동지사대학)] 등 학교 설립에 노력하였다. 영국에서는 왕정복고 후 <예배통일법>이 제정되자 또다시 박해를 받게 되었다. 한편 영국 본토에서는 1689년 명예혁명의 결과 <관용법(寬容法)>이 제정되어 회중파도 공식으로 인정받았으나 여전히 사회적 차별은 계속되어, 1832년 회중파계 여러 교회들은 <회중파연합>을 결성,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 회중파는 정통적 교리보다 비교적 자유로웠으므로 장로파 교회로부터 적대시되었고, 최신 신학적 동향에 쉽게 영향을 받았다. 교회로서의 통합·구심력이 약하여 교단으로서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보다 자유로운 유니테리언이나 보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파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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